[묵상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전봉석 2021. 3. 29. 06:09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한복음 21:15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

시편 6:7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의 절정이다. 주를 경외하지 않으면 기도하지 못하고, 한다 해도 자기의 유익만을 구한다. 주를 경외함은 사랑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기꺼이 전부를 내어드린다. 백세에 얻은 아들을 바치라 하실 때도(창 22:1-12)… 이와 같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믿음으로 받고 경외함으로 얻는다. 이에 우리의 받음과 얻음은 말씀이다.

 

이내 부활이 없었다면 흐지부지 옛 생활로 돌아가며 끝이 났을까? 저들을 찾아오시고,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 21:15).” 그쯤 되었으면 실망하고 포기하고 말았을 텐데, 연거푸 물으시길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16).” 다시 또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17).” 하시는 말씀을 접할 때마다 나는 늘 마음이 벅차다. 우리는 그저 슬픔에 젖으면 주저앉고 도로 전의 생활로 빠져들기 일쑤인데….

 

이와 같은 타락의 본성은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 끝내 주를 바라고 의지함으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날마다 죽어지는 자신을 본다. 예수를 멀리하며 주를 떠나서 살던 자리의 일을 종종 떠올린다. 마치 실의에 빠져 저들이 머물던 디베랴 호숫가 같다. 저들이 누구인가?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회개하고 돌이켰던 베드로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고백하였던 이다. 도마는 또 누군가? 의심하는 저에게 못에 찔린 손과 발을 보이고 옆구리의 창 자국을 만져보게 하셨는데…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요 21:2).”

 

믿음이란 이와 같이 ‘믿지 않음으로 꺾이고 믿음으로 선다.’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일러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롬 11:20).”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우리를 붙든다고 하였구나. 이는 누구에게 이르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왜 날마다 죽고 또 죽여야 하는지를 알겠다. 금세 또 돌아서서 물고기 잡으러 간다. 할 줄 아는 게 그것이라, 나는 지금 오늘 본문의 베드로와 도마, 요한과 그 외의 제자들을 보며 어찌 저럴 수 있지? 하고 의문을 품다가도 그게 나였다는 데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요 21:3).” 그렇게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4).”

 

지난날의 모습이 스치면서 내가 저기에 있었다는 것을 돌이켜본다. 묵상이란 이와 같이 나를 동일시하며 여기에 세우신다. 뒤늦게야 이를 알고,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7).” 앞서 저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보았으면서 어찌 도로 저기에 있었던 것일까? 나는 그 숱한 시간 속에 주님이 그때마다 찾아오시고 만났으면서도 어찌 번번이 주를 보지 못하고 살았던 것일까? 굵직하게 기억을 더듬어도… 딸애가 천식이라며 어려움을 겪을 때도 나는 회개했고 주님은 돌아보셨고 깨끗함을 얻게 하셨다. 이어 도로 디베랴에 있을 때 아들애가 부비동염으로 호흡을 할 수 없어 응급실에 실려 가고, 저들은 소아정신과에서 아이의 정신을 운운하며 그 원인을 찾지 못하고 갈팡질팡 할 때도, 나는 돌이켜 주를 보고 주는 깨끗함으로 낫게 하셨다. 전혀 그럴 사이가 아닌 사람을 붙여 신학을 다시 공부하게 하실 때도 저가 어떻게 등록금 일체를 대신 지불하게 하셨는지, 지금도 돌아보면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때도 채 이를 다 끝내지 못하고 돌아서서 디베랴로 갔다.

 

그때마다 나의 디베랴에는 같이 알던 동료들이 있었고 같이 주를 멀리하는데 동조했다. 그때마다 기다리시고 다시 또 버려짐을 당하시던 주님인데… 나의 디베랴에는 어김없이 주님이 찾아오셨다. 파산을 맞고 공황으로 쓰러져 질질 끌려서 신대원을 하면서도 번번이 나는 도망칠 궁리만 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고 나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면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셨고, 다시 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면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대답하였고, 그러면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셨다. 또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였던 것처럼 나 또한 뭘 어찌 해야 할지 몰라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답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하셨다. 돌아보면 저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다. 저와 주님의 대화는 내 안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우리 모두 믿는 자로 사는 일이란 이와 같은 것이다.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습 3:12).” 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이란 때론 나의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이고, 때론 ‘나’ 자신이기도 하면서, 서로의 사연을 나누며 같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너’이다. 그처럼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 주의 백성을 내 가운데 두셨다. 이르시기를 ‘내 양을 먹이라.’ 하시는 것이다. 그러한 말씀의 변이는 놀라운 작용을 일으키신다. 지금도 누구의 일이 떠오르고 저의 사연을 두고 주를 생각하면서도, 지난날 나와 어떻게 함께 하셨는가 하는 것들이 그야말로 주마등처럼 순식간에 스쳐 지나는 것이다. 그때마다 십년씩 훅훅 세월은 흘렀다. 학번으로 87학번에서 97학번으로, 97학번에서 09학번으로 십년 세월 서너 번으로 인생을 다 허비한 것 같다. 말씀을 그때 믿음으로 순종하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와 또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 3:2).” 오늘도 여전히 그와 같은 반복은 이어진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구나! 저의 고백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허튼소리가 아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2).”

 

오늘을 사는 일은 충성이다. 주신 상황 속에서 나는 또 실의에 빠질 수도 있고 좌절하여 디베랴를 서성거리다 옛 생활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러면 주님이 포기하실 법한데, 그러는 동안의 여러 우여곡절과 삶의 굽이들이 곡소리를 낸다. 그 하나님의 뜻은 분명하였다.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되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에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거늘 그가 내 규례를 거슬러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를 둘러 있는 나라들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겔 5:5-6).” 그때마다 그러고 있는 나를 그냥 두실 수 없었다. 나름은 늘 할 말이 있었다. 한다고 했다. 돌아보니 모두가 헛되었고 불순종의 길이었다. 주님은 끝까지 나를 사랑하신다! 신대원을 하면서도 한 번도 내 수고로 얻은 게 없다. 등록금 일체도 그때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손길을 통해 채우셨다. 조금이라도 나의 노력으로 이룬 게 있다면 나는 순간 나의 공로를 내세울 것이다.

 

후에 베드로는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 2:5).” 하는 말을 오늘 나에게 들려주고 있다.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이렇게 주가 이루어버리신 이 모든 것이 나에게는 분에 넘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아침마다 나를 깨우시고 말씀으로 나를 만나주시는 일에 대하여,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 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계 8:3-4).”

 

기도였다. 돌아볼 때면 후회와 부끄러움이 나를 옥죄는 날들 뿐이지만 그럼에도 그 가운데서 주의 사랑이 어떠하셨는가를 알게 된다. 두려움과 탄식으로 그치는 인생을 원하시는 게 아니었다. 기도는 주를 경외함의 진수였고 절정이었다. 나로 하여금 끝내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셨다. 엄연히 나는 죄인이고,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나는 죽어 마땅하여,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그런 나를 끝끝내 의롭다 하심으로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나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심이다. 그의 의가 내게 전가되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직접적으로 예수께서 나의 이 보잘것없는 생애에도 함께 하심을 숨김없이 다 기록하려면 한도 끝도 없다.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시 6:1).” 나는 이제 내 안의 두려움을 사랑한다.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3).” 때로는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두워졌나이다(7).” 그러나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4).” 나는 이제 거침없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내 간구를 들으셨음이여 여호와께서 내 기도를 받으시리로다(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