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사도행전 1:8-9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시편 7:10
생긴대로 산다고 다들 자기 생각대로 산다. 뭐라 해도 듣지 않는다. 그러다 결국 꺾이고 쓰러져, 더는 생각대로 할 수 없을 때에야 돌아본다. 철들자 망령이라고 사람보다 미련한 게 또 있을까? 돌아보면 나의 생이 그러했고 저마다의 탄식과 후회도 다를 게 없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어 결국은 사망뿐이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하등에 쓸모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요일 3:14).” 그럼에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능력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하심을 얻었다.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4).”
성령으로다. 성령으로밖에는 이 일을 하게 하실 수 없다. 오늘 본문에서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시고 주님은 승천하셨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행 1:8, 9).” 오직 성령으로만이 내가 너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안다.’ 늘 사는 게 지옥이라! 자기 생각대로 산다는 일이 실제 즐거운 일이던가? 스스로도 그 고집을 꺾을 수 없어 자신에게 질질 끌려 다니던 것이었으니, 오죽하면 철들자 망령난다는 소릴 할까?
나는 요즘 저마다의 고집과 아집에 혀를 내두른다. 어찌 감당이 안 되는 게 사람이라, 다들 그야말로 생긴대로 사는 수밖에! 급기야 살아서 사는 동안에 삶으로 이를 깨달아야 하는 일인데, 그러느라 치르는 생의 값이 때론 너무 잔인하다. 기어이 망하고 문드러져 더는 쓸모가 없어졌을 때에야 그 고집이 좀 꺾이려나? 어느 어르신은 여든이 넘어서야 마나님 품으로 돌아와 철없는 아이처럼 졸졸 따르며 바라기를 한다. 젊은 땐 난봉꾼이 따로 없고 망나니처럼 굴며 떠도느라 속 깨나 썩이더니, 다 늙어서는 전세가 역전되어 자나 깨나 마나님 품을 떠나려 하질 않는다. 그런 거 보면 참, 사람 아집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허무한 일인지 짐작이 간다. 남 얘기 하듯 하지만 내 고집도 장난 아니고, 저마다 그 고집과 그 성질대로 사는 것이었으니, 어쩌겠나? 살아서 깨달아야 하면 사는 날 동안 서로들 찌르고 상해 허덕거리며 살아보는 수밖에! 그러니 나는 요즘 주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을 저마다의 고집들로 학을 띤다. 나나 저들이나 서로가 그 모양으로 사는 것이다. 어쩌겠나?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이런저런 우리네 인생을 둘러볼 때면 은혜뿐이다. ‘한 사람의 순종하심’을 덧입어서 용서받고, 그저 다만 의롭다하심을 받는 수밖에 달리 어떤 의로도 의가 될 것이 없다. 때로는 나야말로 나 자신이 지겨울 때도 있다. 이 성질머리하고, 그 고집 누가 꺾을 수 있겠나? 그러니 아픔이 오고 슬픔이 더해져 더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비로소 두 손을 든다.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염치없이 도와주세요, 하는 소릴 해댄다. 얻어야 하는 일이지 이룰 수는 없는 게 구속하심이다.
“내게 대한 어떤 자의 말에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에게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사 45:24-25).” 내가 주의 자손임은 주가 나로, 이 모양인데도 의롭다하시는 데서 증거 된다. 그리하여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30-31).” 나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라, 그럴 때면 더욱 입을 다물고 더는 대대거릴 염치도 없는데….
며칠 전부터 아내의 걸음이 현저히 쩔뚝거리며 눈에 띄게 불편해보였다. 약을 먹으라고 난리를 치고 처가에 오르내리는 일을 좀 자제하라 일러도 귓등으로 듣지 않더니, 어제는 결국 화딱지가 나서 지랄을 떨었다. 내가 그렇게 노래를 해도 듣질 않더니, 친정 오빠가 그 시술 한 사람이 인공관절삽입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말 한 마디에 당장 오늘부터 친정에는 안 가기로 하였다. 아들은 잇몸이 성나고 허리가 아프면서도 뭐라 한들 소용이 없다. 그러니 다들 그 고집으로 망하고 문드러져야 정신을 차린다. 늘 나는 어디가 아픈 게 일인 사람이라, 다들 이래저래 걱정을 하지만 나름 요령이 있어 적당히 알아서 아프다. 한데 아내는 낑낑거리고 쩔뚝거리고 징징거리는 게, 하여간 그 엄살을 누가 말리겠나? 하긴 평소 아파봤어야지? 자다 말고 뭘 먹어도 거뜬히 소화를 시키는 내장과 뭐든 하면 척척 다 말을 듣는 것 같은 몸뚱이로 살아왔으니, 다들 겁이 없어서 저 모양이다. 그러는 동안 빌빌거리며 조심하는 나의 모습이 가소롭기도 하였겠지만 아파봐야 아픈 사람을 안다고….
누구에게는 문지방이 뒷산보다 높고, 계단 하나가 낭떠러지보다 까마득한 법이다. 그러니 우리네 인생이 결국은 이런 것인가? 도대체 다른 방도는 없는 것일까? 그저 헛되고 헛될 뿐인가?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오죽하니 저가 저런 소릴 다 할까? 예수 믿는다고, 믿음이 좋고 신앙이 뛰어나다고 해서 그럼 인생이 헛되지 아니한가?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12:8).” 별 수 없다. 우린 다 헛되이 산다. 그 원인은 자기 고집대로다. 생긴대로 사는 것처럼 생각대로 굴다 기어이 꺾이고 문드러져 더는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서야 주여, 하고 곡소리 나는 법이다.
나는 자꾸 더 속상하고 화가 났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고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지, 옆에서 보고 있자니 복장이 터질 것 같다. 인생은 참으로 덧없는 것이어서 무엇으로 의지하고 살아야 할까?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러니 오죽하면 그러실 수밖에 없었겠나? 다른 길이 없었던 것이다. 옮길 만하시면 옮겼으면 하셨던 잔이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 22:42).” 아내를 탓하고 자식을 욕하고 누구를 평가하려는 소리가 아니다. 실은 그게 나였고, 나의 나 됨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로서는 그저 민망하고 송구하여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뿐이다. 기어이 죽음에 이르러서야 주를 바랄 텐가? 언제 우리가 이처럼 주를 간절히 구하고 바라던 때가 있었나?
그러니 그럴 수만 있어도 그게 복이라. 한 친구는 안 믿는 양가 부모를 모시느라 정신이 다 나갈 지경이다. 노인네들 고집이 황소고집이라, 그 와중에도 각자의 신을 찾고 저마다의 자기 생각으로 쇠심줄이다. 주를 전하고 죽음 너머의 더 큰 영광을 알게 하려는 데도 소용이 없다. 그야말로 소귀에 경 읽기다.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면, ‘아미타불’ 각자의 염불을 외우고 있으니… 그저 다만 애타는 심정으로 주의 은총을 바랄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복인가? 아무리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는 주의 은혜를 안다. 너무 늦은 것 같아 송구하고 죄송하여 탄식뿐이지만 염치없지만,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나라’를 바라는 한쪽 강도와 같은 심정으로 부끄럽다 해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에 이른다.
한 사람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두려움에 떨었다. 저는 신앙이 좋고 믿음을 가진 자였다. 그와 상관없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일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다. 저가 하루는 심방 온 목사에게 물었다. 죽어 천국에 이른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영화에서처럼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길이 저처럼 험난한 것입니까? 그러자 목사는 풋, 하고 웃음을 지으며 젊을 때 집사님이 신앙이 없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어찌 집에 왔는지 기억도 못하는 일과 같습니다! 하고 농담처럼 위로를 하였다. 위로를 더하려 웃자고 한 말이었겠으나 정작 우리는 아무 공로도 없이 맞이하는 곳이다. 어떤 수고도 애씀도 없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아내는 언제 옷을 갈아입히고 손발을 씻겼는지, 거실에서는 해장국을 끊이며 아침을 준비해두었다. 우리의 죄로 인한 죽음의 모든 결과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이와 같은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죽음 너머의 날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린데…
이를 깨달은 바울은 자신의 염치없음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더는 배설물로 삼은 까닭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다른 더 좋은 게 무엇이 있겠나?
누구 말마따나 지루하게 아픈 몸을 이끌고 이제 늙는 일밖에 없다. 젊을 때는 기를 쓰고 그처럼 뭔가 이룰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결국 얻는 것은 이런저런 병치레와 낡아지는 몸뿐이라! 그러나 바울의 멋진 고백과 같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과연 이 기쁨을 알고자 가는 길인가? 우리는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와 같이 살아났으며, 오직 이 지혜는 하나님의 숨은 신비로운 지혜로만 안다. “그런즉 지혜는 어디서 오며 명철이 머무는 곳은 어디인고? 모든 생물의 눈에 숨겨졌고 공중의 새에게 가려졌으며 멸망과 사망도 이르기를 우리가 귀로 그 소문은 들었다 하느니라(욥 28:20-22).”
우리로는 이를 알게 하심으로,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20).” 그러므로 늙음과 죽음은 출생과 젊음만큼이나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래저래 마음이 어려운 시절을 보내면서, 가뜩이나 황사로 극한 미세먼지 때문에 숨도 못 쉴 것 같은 이 지경의 하늘 아래에서 나로 이를 알게 하시는 이의 지혜로 산다!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히 2:16).” 나를 위한 주의 사랑과 긍휼하심이다. 저마다 누굴 위하고 섬기는 것처럼 요란을 떨지만, 이 얼마나 감사한가? 천사를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고 나를 붙들어 주려 하심이니!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