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사도행전 7:54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시편 13:5-6
하나님의 뜻은 우연한 세상만사에 깃들었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바람은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전 1:5-7).” 사람의 일도 누가 알겠나? 서너 명의 이혼 남녀를 앞에 앉히고 저들의 이런저런 사연을 듣는 프로를 보다 자신의 이상과 현실을 혼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저 웃음으로 또는 한두 번의 울음으로 남모를 저들 사연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결국 세 치 혀끝의 말과 한 치 앞의 일도 분간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이상이고 현실이다. 본래 그런 것이어서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8).” 하물며 사람과 사람과의 일이라면 어디 그 또한 사람 뜻대로 되겠나?
오늘 본문은 다소 아이러니한 반응과 그 결과로 참혹하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행 7:54).” 하여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59).” 마음에 찔림으로 돌로 쳤다? 앞서 누구들도 마음에 찔려 이를 어찌할꼬? 하다,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하고 전하여주는 말씀 앞에서 저들이 이를 따라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38, 41).” 한데 같은 찔림에도 다른 상황이 펼쳐진 것을 본다. 오늘 스데반은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7:55-56).” 이와 같은 놀라움을 저들이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저가 죽기 전에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59-60).” 말씀 뒤에 정적이 흐르는 것 같다.
서너 명의 이혼 남녀가 이런저런 사연을 말하다 아이 문제 앞에서 눈시울을 붉혔다. 우연히 채널을 돌리다 저들 이야기를 듣고 같이 먹먹해지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섭리와 계획하시는 작정은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누구는 서울대를 나와 치과의사로 살고 있다. 누구는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던 자동차 모델이었다. 누구는 연예인으로 일찍이 웃음과 입담으로 사는 사람이었다. 다들 그렇게 될 줄 몰랐던 것에 대하여 말을 하다 웃고 말을 하다 울었다. 문득 전도서의 내용과 중첩되면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도 같이 마음이 안됐다. 자기 인생을 자기 것으로 아는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는 것은 빈껍데기로 사는 일과 다를 게 없다. 그런 경우 세상만사에 온통 다 신경을 쓰게 된다. 그러느라 피로하다. 만물이 다 피곤하다.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낫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뻔하였다.
살면서 누가 누구에게 어찌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고 살겠나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를 주께 맡김으로 넉넉하게 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 18:6).” 특히 스스로를 자부하는 사람으로는 자신이 장담하는 만큼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 맡긴 것은 하나님이 감당하신다. 열에 여덟을 맡기고 둘은 미덥지 않아 짊어지고 있는 일이면 그 둘을 가지고 씨름해야 한다. 맡김이 적고 짊어진 것이 더 많은 경우는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어서,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7).” 그러니 주께 맡김뿐이다. 저들 네 사람의 숨겨진 사연까지 일일이 알 수는 없고, 분명한 공통점은 하나님이 없이 사는 고단함은 여실하였다. 이래저래 잘나가고 잘들 먹고 사는 것 같았으나 그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다들 그러고 사는 거지, 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모든 현실은 논리적이지 않다. 이성보다 어리석은 해결책은 없다. 특히 부부 사이에는 더욱 그렇고 사람과 사람 사이 어느 것도 예외는 없다. 대체로 사람 관계는 비극적이다. 어느 연예인이 백억대의 횡령을 친형에게 당했다는 보도를 보면서도! 그런 가운데 오늘 본문은 스데반의 설교를 통해 더욱 확실히 한다. 성경은 하나님을 증명하지 않는다. 저의 살아계심을 증거할 뿐이다. 엄연한 선언이고 선포다. 누구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이에 반응은 ‘어찌할꼬!’ 하다 돌이켜 회개하거나 이내 돌로 쳐 분을 발한다. 어느 쪽도 이성적이지 않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어른들의 일로 고스란히 아이들이 짋어지는 세계인 것 같지만 그 어른들도 그리 짊어진 세상에서일 뿐이다. 어쩔 것인가? 지혜는 말한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이는 살면서 깨달아 얻는 게 아니다. 일찍이 지혜는 있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22).” 이를 가지고 이 모든 삼라만상을 창조하시고 일구셨다. 그렇게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25-26).” 지혜는 그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목소리로 성경은 일갈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엄연한 사실이고 선언이다.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다.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저마다 대가리 터지게 열심히 살고 나름의 보람으로 취하고자 하는 것이 모두 헛것이다. 헛되다는 게 거짓되다는 소린 아니다. 일시적이란 것이다. 다만 그것을 영원한 줄 알았던 게 문제다. 연애 때는 어땠는데 결혼하고는 어떻다, 하는 소리보다 어리석은 깨달음도 없다. 둘러서서 하나둘 돌을 던질 뿐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생은 모두가 그러하다. 믿지 않는 생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생이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6:8).” 다만 우리에게는 긍휼하심만이 살 길이다. 감정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순간 서로를 동일시한다. 나도 괜히 눈물이 핑, 돌면서 우리가 살 길은 주가 더욱 바람뿐이란 생각을 하였다. 서로 연관도 없는 생각이었다.
우리를 덮어 벌거벗음을 가리워 주시지 않으면 수치심으로 살아야 한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하고 물었던 대문호 톨스토이의 물음이 아니더라도,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다른 길은 없다. 내가 더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하물며 자식이라도 내 마음 같지 않다. 다른 무엇으로 가릴 것이 없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4-5).” 오직 의로 여겨주심으로 산다. 하나하나 주께 맡김으로 얻는다. 저들의 공통된 항변은 나름 열심을 다해 살았다. 그런데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치과의사란 이는 얼추 나이가 많아 폐경을 맞으면서도 꿈이 많다. 믿는 자 같이 굴어 관심이 갔으나 저가 아는 하나님과 내가 아는 하나님이 달랐다. 다들 자기 인생으로 여겨 항변하는 한 별 수 없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6-8).” 나야 말로 복에 복을 받은 자이다. 주께 맡김은 문제없다는 소리가 아니다. 저마다 안고 사는 문제는 없어지는 게 아니다. 다들 헐떡거리며 문제에 문제를 더하며 산다. 그러한들 “겹겹이 쌓인 구름과 그의 장막의 우렛소리를 누가 능히 깨달으랴(욥 46:29).” 그러니 우리의 지혜란 주시는 이의 것이지 내 것으로는 아니다. 참으로 기이하여서 어쩌다 내게 생긴 변화인지 나는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미 예정하시고 택정한신 바 된 창세 전의 일이 지혜다. 이를 내가 어찌 알았을까?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밤에는 불로 밝히셨으며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를 가져 오시고 또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하셨도다(시 105:39-40).” 나의 만족은 지혜의 산물이다.
아내의 무릎 수술과 아이들로 인한 여러 복잡한 심경은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자꾸 주 앞에 내려놓는다. 내가 아는 나의 하나님은 그때마다 구름을 펴시고 불을 밝히심으로 여기까지 나를 지키셨다. 그때마다 메추라기를 보내시고 하늘의 만나로 배부르게 하셨다. 어디 아파트 시세도 모르고, 주식이 어찌 요동을 치는지 하나도 알지 못하지만 나는 지금 누구보다 넉넉하다. 그 하룻길이 충분하다. 아프면 아픈 대로 오늘은 좀 나으면 나은 대로,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관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작정을 무작정 신뢰한다. 어떠하든 하나님이시다. “너희 민족들아 함성을 질러 보아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그러나 끝내 패망하리라 너희는 함께 계획하라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해 보아라 끝내 시행되지 못하리라.” 사는 일이란 다 그러하여서, 하나님이 아니시면 아무 것도 아닌 게 인생이다. 오히려 이를 통하여 나는 이제 확신한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니라(사 8:9-10).”
고로 듣기를 원한다.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65:1).” 내가 언제 주를 바라고 찾고 구하여서 주가 나를 붙드셨던가? 한사코 외면하고 부정하며 멀리하며 산다고 사는데도 무던히 참고 또 기다리신 주의 사랑이 아니었던가? 내가 아는 하나님의 이 놀라우신 작정을 나는 이제 붙든다.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2-3).” 내가 한다고 기를 쓰고 하는 일이 되레 병이라! 오늘도 이 하루가 연장되고 이 나라와 민족이 나아가 온 지구가 한 날을 더 연장하여 유지되는 까닭은 주의 큰 소망과 놀라우신 섭리 때문이다. 이는 이제 진흙 위의 자국처럼 선명하다. “그것의 아래쪽에는 날카로운 토기 조각 같은 것이 달려 있고 그것이 지나갈 때는 진흙 바닥에 도리깨로 친 자국을 남기는구나(욥 41:30).” 이쯤 살아서 깨달은 지혜가 아니었다!
오늘 시편은 이를 바로 알려준다. 그리하여 주를 더욱 바르게 알게 하려 한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 13: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