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사도행전 8:21-2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시편 14:2-3
두 사람이 눈에 띈다. 둘 다 유명하여 하나는 마술로 많은 사람이 따르고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행 8:10).” 할 정도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던 마술사 시몬이다. 또 한 사람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였다. 고위직에 있는 저는 예루살렘에 왔다가 이사야가 쓴 성경을 읽으며 돌아가고 있었다. 시몬은 돈으로 성령을 사려 베드로에게 구하였고, 내시에게는 성령이 빌립을 저에게 보내 말씀을 풀어주게 하였다. 하나는 자신의 능력으로 성령의 권능을 받고자 하였고 하나는 성령의 권능으로 저에게 사도를 보내시었다. 둘의 차이를 가만히 묵상하다보면 오늘 시편의 말씀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
이는 어제 설교원고 초안을 잡다가 붙들린 한 구절의 반복과도 일치한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2, 20).”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스스로를 존귀하게 함으로 짐승만 못한 존재로 전락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야말로 인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가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을 되새기게 하였다. 마술사 시몬의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어쩌면 우리에게 훨씬 더 호응을 얻는다. 분명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행 8:13).” 저도 믿었고 세례도 받았고 주의 권능을 행하며 말씀을 전하는 빌립을 따랐다. 그 나타나는 표정과 능력으로 놀라워하면서 말이다. 그런 그가 더욱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으로 안수를 하면 성령을 받아,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7-8).” 그 모습에 더욱 열광하며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이르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18-19).”
그도 그럴 것 같다. 일련의 사태 가운데 모 교회는 전국적으로 지부를 두고 서로 순회하며 병 고침과 성령의 은사를 행하였다고 하는데,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이가 전국적으로 돌며 그 모임에 참석했던 기사가 어제그제 연거푸 보도되었다. 그 심정이나 관심은 알겠는데 오늘 말씀을 이에 대비해보면 어떨까? “베드로가 이르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20).” 돈이란 저의 열심이나 스스로의 열정과 의지로 볼 수 있다. 자신이 가진 것으로 그 값을 치르려 하는 것인데, 성경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 49:8).” 마치 일상의 소소한 사건과 상황이 말씀의 면면으로 비춰지면서 우리 안의 본질적인 문제를 돌아보게 한다. 곧 돈으로, 그 열심으로 무언가를 이루고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배우고 이에 준행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일갈한다.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 지어이다!’
그렇게 유난하여 열심을 떠는 무리가 있다. 마치 자신들이 아니면 세계를 구원하실 능력이 하나님으로는 안 되는 줄로 안다. 언론이나 세상적인 시각으로 교회를 싸잡아 욕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은 저들의 일이라 어쩔 수 없는 노릇이고, 도대체 우린 무얼 믿고 무얼 붙들고 사는 것일까? 스스로의 열심이 자신을 삼킬 수도 있다! 급기야 저들은 교회를 장사꾼의 소굴로 만들어버린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격노하셔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14, 15-16).” 이를 보며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17).” 여기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란 이중적으로 비친다. 하나는 예수님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자기 열심들이다.
우리의 열심과 노력으로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에디오피아 내시의 경우는 평온하기까지 하다. 저는 다만 말씀을 손에 붙들었고 무슨 내용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읽고 있었다. 빌립이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행 8:27-28).” 저는 예배하려 왔었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30-31).” 모든 게 다 성령으로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노력하고 계획하여 얻어지는 것은 없다. 성령으로 감동하였던 이들이 성경을 기록하였고, 그 성경을 손에 들고 읽을 때에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이해와 깨달음을 더하신다. 주의 종을 붙여 풀어서 설명하게도 하신다. 곧 그의 안에는 스스로 어찌 해보려고 하는, 시몬과 같은 의도적인 욕망이 없다. ‘존귀하나 이를 알지 못하면 짐승과 같다.’ 그저 으르렁거리며 자기 욕심으로 교회를 다니고 은사집회를 떠도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를 빌미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교회에 대하여, 나는 뭐라 할 말이 없다. 마술사 시몬을 보면서도 드는 생각은 오죽하니 그랬을까? 싶다.
말씀이어야 한다. 새삼 느끼게 되는 결론은 말씀으로밖에 달리 길이 없다. 주체할 수 없는 우리의 욕망을 어찌할까? 더 살고자 하는 욕망과 떵떵거리며 잘 살고 싶은 욕망과 더욱 더 존귀함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쉴 새 없이 우리를 들고 일어나는 법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가 아니면 아무 소용이 없겠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잠 4:7).” 이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함이다. 이것이 우리 지식의 근본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1:7).” 살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 온 우주를 있게 하시기 전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지혜다. 그 지혜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신다. 이 지긋지긋한 현실의 면면들이 소리를 높인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8:1).”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르신다.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4).” 왜?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12-13).” 곧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루를 더하여 사는 것이 복이었다.
이와 같은 말씀은 모두에게 들려지나 아무나의 소리로는 아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태초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워지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22-26).” 지혜의 기원은 하나님과 함께 한다. 하나님을 아는 이 지혜는 우리 안에 있다. 교회를 욕하고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람들도 안다. 알기에 저를 대적한다. 끔찍이도 싫어하고 멀리한다. 혹은 왜곡하여 마술사 시몬과 같이 자기 유익을 위하여 돈-자기 열심으로 사려 한다. 그리 얻으면 그 값으로 속전을 얻을 줄 아는 것이다. 한데 성경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 49:8).” 부디 이와 같은 말씀에 자중하기를.
다만 우리는 주께 구할 뿐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우리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럼 빌립을 급히 보내시는 이가 성령이시다. 열심을 다해 돈으로 구하려 하던 시몬에게와는 다른 결과다. 우린 아무리 이런저런 어려움에 우겨쌈을 당했어도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신 31:6).” 성경은 우리를 붙드신다. 말씀으로 붙들림을 당하면 자신의 열심에 열심하지 않는다. 자칫 그 기도가 또는 찬양과 주를 바람이 속된 것과 같이 마술사 시몬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아, 저의 결말은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회개하고 용서하심을 구하였을까? 끝내 자신의 열심에 빠져 교회를 장사터로 만들지는 않았을까? 그리 믿고 그리 교회를 다니는 열심들이 참 많다.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자신의 안녕과 무탈함을 위해 돈을 주고 성령을 사려하는 무리가 의외로 많다. 구하는 것마다 자기의 필요를 위한 것이다. 기도의 전반적인 요구가 자기를 위한 것들뿐이다. 상대적으로 남을 위한 것이 없고 나아가 주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함도 없다. 먼저 주의 나라와 주의 의를 구할 수 없다. 하다보면 늘 자기 필요로 꽉 찬다.
은사를 사모하며 치유를 위해 전국을 순례하였던 이들의 열심을 나는 무슨 마음으로 접하고 읽었던가? 뉴스를 보며 어떤 마음이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다만 그로 인하여 또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이 욕이 되고 망령되이 일컬어지는 데 화가 났다. 우리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문제로만 그치는 게 아닌 것이다. 다들 이래저래 어려운 시국이라, 누구는 정권을 비난하고, 누구는 대놓고 교회를 탓하며 하나님을 욕하고, 서로가 서로를 겨누어 으르렁거리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무엇으로 이 난국을 견뎌낼 것인지?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 가히 오늘의 현실도 그러하지 않은가? 이때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 부디 말씀으로밖에는 설 수 없다. 담대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감히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행 8:20).”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요한은 이어서 연거푸 증거하였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그러므로 우리 속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11, 12).” 모두가 미쳐 날뛴다 해도,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 그래서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4).” 아무리 어떠하든지, 우리의 지혜는 주를 경외함으로였다. “그러나 거기서 그들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