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사도행전 11:19-21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편 17:15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으나 그로 인해 물길을 돌리기도 한다. 바람은 가로놓인 장벽을 탓하지 않고 눈길은 그 위에 쌓이고 빗길은 그것을 타고 흘러 스민다. 뜻하지 않은 어떤 어려움 앞에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다하고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는 길이 성도의 가는 걸음이겠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기껏 복음을 전하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다. 그 일로 더러는 상심하였고 더러는 피하여 숨었다. 그 일을 들어 하나님은 오히려 복음을 더욱 확장하신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행 11:19-21).”
오늘 말씀을 가만히 우리가 당면한 현실로 가져와서 묵상한다. 교회가 세든 곳이 다시 공사를 하여 여러 개의 소(小)사무실로 쪼개려고 한다. 한동안 또 공사를 견뎌야 하는 일도, 그 안에 서너 개 이상의 사무실이 들어서 예닐곱 개의 사무실로 나뉘는 것도 마음이 쓰인다. 주일에 예배는 가능할까? 평일에 조용하고 청결한 분위기는 유지될 수 있을까? 생각이 많은 중이었다. 그 일로 옆에 산모들 피부 관리를 하던 이가 옆 건물 어디로 옮겨가기로 했다. 그런데 맞춤하니 동일업종의 장소를 그대로 인수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런 말과 함께 평수가 혼자 하기에는 조금 커서 임대료가 부담된다는 말을, 우연히 복도에서 만난 나에게 소상히 알려주었다. 일이 되려는가, 점심을 먹고 슬쩍 그 곳을 둘러보았고 위치도 장소도 나쁘지 않아 어쩔까? 같이 움직일까? 여러 마음이 오고갔다. 우리야말로 삼분의 일 정도면 충분하여서, 그럼 현재보다 월세도 반 가까이 줄어드는 셈이다. 것도 그렇지만 현재 주인은 우리가 계속 있기를 바라고 이래저래 마음을 많이 쓰는 경우라, 우리 생각만 할 수도 없다. 뭐라 하는 아내에게 우리는 교회인 것을 먼저 상기시켰다.
일예로 이처럼 뜻하지 않은 일, 난데없는 상황에서 가만히 주가 어찌 행하실지 마음을 기울이는 것. 그 기준에는 오로지 교회가 교회됨을 우선하는 일이겠다. 생각이 많아 마음이 어수선한 하루였다. 우리에게 기적이란 노심초사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주의 뜻을 살피며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나날이다. 믿음의 결실이란 이와 같이 하루를 이기며 살아가는 걸음걸음이다. 아무리 천적이 없어 40년 이상을 산다는 독수리도 파리는 잡지 못하는 법이다. 어려움이 우리를 들고 흔드는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작정으로 이뤄질 일이다. 성경은 되묻는다. “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사 50:2).” 이 모든 일의 조화는 주가 행하심이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59:1).” 행여 처한 상황을 탓하고 불안해할 게 아니다. 우리가 주의 뜻을 바로 보지 못함은,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2).” 이에 우리 가는 길을 주가 아신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믿는 자의 고백은 참으로 진귀하다. 마음은 어지러운데 일의 순리는 주의 손길에 둔다. 내가 어디 있더라도 주가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 139:9-10).” 오늘 나의 처지가 하늘 가로 몰려 궁지에 처해져 있다 해도,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 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신 30:4).” 모르실 리 없고 거기서부터 이끄신다. 이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가장 든든한 무기다. 믿음이란 역경을 이기며 살아가는 날들이 아니라, 역경 가운데서도 주를 바라며 실패도 좌절도 마다하지 않는 의뢰다. ‘고난은 변장한 축복이다.’
어려움이 믿음이 좋다고 피해가는 게 아니다. 신앙이 좋아 순탄한 생을 산다고 하는 소리는 복음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은 더욱 가까이에 계셨다. “만일 내게로 돌아와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하건대 기억하옵소서(느 1:9).” 정신 똑바로 차리고 주의 말씀을 붙드는 일, 주의 계명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은 거기서부터 우리를 모아 거기에 주의 이름을 두신다. 누가 나의 하나님 같은 팔이 있겠나?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욥 40:10).” 믿는 자로서의 위엄과 존귀를 잃어서는 안 된다. 어제는 종일 그런 생각과의 씨름이었다. 현실적으로야 이것저것 못 마땅하고 탐탁지 않아, 싫으면 말고 하는 식으로 다른 곳을 선뜻 생각해도 되겠지만… 가정예배를 드리며 나는 아내에게 우리는 교회인 것을 강조하였다. 떠나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같이 갔으면 하는 사람도 있다. 저들이 좋게 보는 것이 그저 나라는 사람이겠나? 인상적인 기억은 비록 저이가 교회를 나가지는 않지만 아들 사장에게 첫 월급을 받았다며 5만원을 봉투에 담아 가져왔던 일이다. 또는 저편의 누가 새해를 맞으며 차 한 잔을 하러 와서 ‘목사님 기도해주세요.’ 하고 기도 받기를 원하였다.
종종 나는 나의 부족함과 상관없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게 하시고, ‘영광과 영화를 입’하시는 하나님을 느낀다. 연세 지긋하신 이가 아들 뻘 되는 내게 첫 월급이라며 얼마를 내어놓겠나? 비록 지금은 이사를 갔지만 어떤 이가 저들과 와서 새해 덕담을 나누는가 하였는데 기도 받기를 사모하였겠나? 우리는 교회다. 나는 주의 전이다. 세상적으로는 볼품없고 단돈 얼마의 월세라도 좀 줄일 수 있다면, 더 여건이 좋은 장소라면 훌훌 털고 훨훨 옮겨가면 그뿐이겠느나… 우리는 교회다. 교회이어야 하고 교회이다.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다. 전이어야 하고 거룩한 성전이다. 싫든 좋든 하나님의 팔이 깨어 있어 나에게 미친다.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바다를, 넓고 깊은 물을 말리시고 바다 깊은 곳에 길을 내어 구속 받은 자들을 건너게 하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니이까(사 51:9-10).” 그러므로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그래서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우리의 절망의 벽을 깨시고, 막힌 담을 허무소서. 완고하여 죽어도 주를 영접하지 못할 것 같은 저이의 마음을 여미소서. 헤어날 길 없는 이 절망의 늪을 잔잔한 호수로 바꾸소서.
나는 내 곁에 누가 부탁한 기도 내용들을 적으며, 말도 안 되는 저들의 불가능한 사실을 나열하고 <깨소서, 여호와의 팔이여!> 하고 외치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이 현실에서의 주를 의뢰함이란 회개뿐이다. 돌아보아 자신의 고약한 마음을 주께 아뢰는 것뿐이다. 진정한 회개는 변명이 아니다.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4).” 오직 주를 바람으로 오늘을 오늘 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가 후원헌금을 보내온다. 저들이 보내오는 돈으로 교회 임대료를 충당하고 사택 것까지도 해결하고 있다. 비록 여의치 않아 살림은 아내의 수고나 딸애의 수입으로 충당하고 있지만 그래서 종종 나는 밥벌이도 못하는가, 하는 마음으로 시달림을 당하기도 하지만 그런 불편한 마음까지도 내가 지고 가야 하는 걸음이었다. 믿음은 믿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믿게 되는 기이함의 결과이다. 나는 아무 공로가 없다. 특히 교회를 이루어 가는데 있어 주가 어찌 관여하시고 직접 행사하시는가 하는 하나님의 작정을 나는 그때마다 실감하고 목도하였다. 물론 마음은 어지럽고 생각은 또 수시로 여러 갈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하여,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시 17:4-4).” 오늘 시편은 나의 가는 길의 방향을 일러준다.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6).” 하나님이 응답하실 것을 알고 아뢰는 소리다. 주의 사랑은 언제나 기이하여서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7).” 어렵고 곤고한 처지인 것 같으나 그것으로 선을 이루어 가신다. ‘민들레는 벚꽃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조뱅이풀이라고 일컬어지는 두 해 살이 풀 국화는 묘하게도 보도블록 틈새에서도 자란다. 그 생명력이 질겨서 사람들이 밟고 짓이겨도 다음에 보면 파릇하니 다시 자라있다. 어제는 꽃술이 예쁘게 핀 민들레도 보았다. 어찌 저런 데서 자랐을까? 싶을 정도로 횡단보도 끝 아스팔트 틈 사이에서 노랗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어디서 들었는데 풀이 헐거워진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힘이 일톤 트럭도 들어올릴 정도라고 하였다. 그래서 저가 벚꽃도 부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벚꽃은 화려하였으나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어느새 봄바람에 다 날리고, 봄비에 맥없이 풀려 철딱서니 없게도 흉물스럽게 여기저기 들러붙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복음을 들은 초대교회들이 흩어져 오히려 주의 말씀을 만천하에 전파하고 있었다.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행 11:17).” 주가 이루시는 세계이다.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30).” 우리는 다만 교회를 먼저 생각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주를 바람이 곧 의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5).” 그리하여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6).” 그러할 때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13).” 그렇게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