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9편 / 존귀하나 짐승 같은 사람
210411 주일
시편 49편
존귀하나 짐승 같은 사람
들어가는 말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육신을 따를 것인가? 영을 따를 것인가? 죄악이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죄는 본래 우리의 상태다. 처음 사람 아담 이후 모든 인류는 죄인이다. 그 죄에 대해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없이해주셨다. 이는 만인을 향한 말씀이다.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죄인이다. 우리의 믿음은 이를 받아들임으로 죄인이나 죄로 인한 죄는 없다. 곧 전인적으로 구속함을 받았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다. 하나님의 계획은 처음과 끝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궁극적으로 택함과 불택함의 교리는 우리가 시시비비를 가릴 문제가 아니다. 성경은 논쟁하지 않는다.
1. 성경은 선언이다.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시 49:1-2).”
우리는 이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하면 된다. 이를 위해 성경은 우리를 설득하지 않는다. 다만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3).” 곧 하나님의 뜻에는 중간이 없다. 암묵적인 용서란 없다. ‘하는 거 봐서’ 구원을 해 주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중간은 우리 사람의 헛된 시도뿐이다. 이를 오늘 시편은 ‘존귀하나 짐승 같은 사람’이 저지르는 문제로 분류한다.
즉 사람이 자신에 대해 그 권리를 주장할 때, 저는 존귀하나 짐승과 같은 결과뿐이다. 하나님의 뜻에는 ‘즉시로’만 있다. 사울이 바울이 되고,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행 9:20-21).” 사람들이 뭐라 하든, 전에는 어떠했던… 이와 같이 베드로와 안드레도,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마 4:20).”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22).” 즉 우리의 공통점은 즉시로, 곧, 머뭇거림이 없다. 주저하고 생각하며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따져보고 분석해서 얻은 결론이 진리가 아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7).” 이는 곧 아주 특별한 일이다. 스스로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자신을 자신하지 못한다.
진리는 우리가 만든 게 아니다. 진리는 다만 주신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우리는 받은 것이다. 어떻게 믿는지 우리도 모른다. 믿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 진리다. 그래서 이는 거듭난 사람의 기인한 현상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죄의 본성이 있어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를 오늘 시편은,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2).” 곧 누구나 다 때가 되면 죽는다. 장구한 생명은 없다. 연거푸 이를 되새기며,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 하고 시인은 언급한다.
그런데 두 구절의 말씀에서 좀 다른 점이 보인다. 12절에서의 사람은 모두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20절에서는 서로가 나뉜다. 한 쪽은 ‘깨닫는 자’이고 한 쪽은 ‘깨닫지 못하는 자’이다. 이를 깨닫지 못하면 짐승 같다! 여기서 깨닫다, 받아들이다, 믿는다는 표현은 모두 하나의 의미다.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 지혜는 주시는 것이지 우리가 터득하여 쌓은 게 아니다. 받아들임으로 믿을 때 생성되는 지혜다. 지혜는 주를 경외함이고, 주를 경외함은 두려워할 줄을 아는 일이다. 오늘 시편은 이를 진술하고 있다.
2. 말씀을 들어라.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시 49:1-2).”
먼저는 들어야 한다. 들음에서 믿음이 온다. 온 천하에 전해진 말씀이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 한데 우리는 토론과 다수결의 원칙을 선호한다. 이를 민주주의의 토대로 삼는다. 하지만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행 15:7-9).” 들어야 믿는데, 믿으면 듣는다고 하니… 우리로 성령을 주어 증언하게 하셨다. 저들로 듣고 믿어서 죄에 대하여 깨끗하게 하심이 차별이 없게 하려 하심이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변론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증명되지 않는다. 말씀은 증거될 뿐이다. 그래서 오늘 시편은,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시 49:3).” 누구와 시시비비를 가릴 게 아니다. 안 들으면? 발에 먼지까지 털고 더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마 10:14).” 이를 아는 지혜가 제일이다.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잠 4:7).” 그럼 어떻게 이 지혜를 구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그러니 구하려면 믿어야 하고 믿으려면 받아들여야 하는데… 선택해야 한다. ‘육신을 따를 것인가, 영을 따를 것인가.’
이어 시편은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시 49:4).” 곧 우리 믿는 자의 자세다. 의지적으로 이를 들으려 해야 한다. 들었으니 됐고, 믿었으니 됐다고 여기는 마음을 경계해야 한다. 죄악은 의도적으로 거절하는 것이고, 의로움은 의지적으로 이를 들으려는 것이다. 우리가 의지적으로 주를 바란다 하는 것은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이를 논하고 분석하여 연구하고 탐구하여서 얻는 결과물이 아니다. 받아들임은 순종에 대한 의지다. 순종은 자신의 주권, 결정권을 이양하는 일이다. 주를 의탁하는 일이란 복종으로부터 온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19).” 복종은 순종을 연마한다. 예수님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21).”
3. 자신을 의지하지 마라.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시 49:5).”
사는 동안 우리는 모두 자기 고집대로 산다. 이는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는 신호다. 사는 동안 환난이 나를 에워싸는데 내가 어찌 지혜로울 수 있겠나? 남들처럼 살려고 하는 것이다. 남부럽지 않게 살려고 할 때, 더 많이 소유하고 더 가진 자를 부러워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 안에 염려가 쉴 새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함으로 ‘혹시나’ 하고 끌려간다. 이에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신 31:6).”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는 것을 멀리하려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떠나지 않으심은 실감해야 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럼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자신하면서 그 속전의 값을 물려고 한다. 오늘 시인은 그래서 절규하는 것이다.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 49:6-8).” 감히 ‘생명을 속량하는 값’을 스스로 물려고 하다 보니, 사는 게 지옥이라.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우리는 이 진리를 알고 저들은 이를 깨닫지 못한다. 말씀은 누누이 강조하였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1-12).” 아무리 들려주어도 들으려 하질 않으니 어쩌겠나? 오늘 시편은 참담한 심정으로 진술한다.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시 49:10).”
그래서 지혜자는 인생을 정의하기를,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 여기에 예외는 없다. 오늘 시편은 그런 자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시 49:11).” 나름의 특권을 가지고 얍삽하게 토지를 매입하고 보상을 받고 되판다. 서로들 암암리에 이를 능력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속고 스스로들 속이는 것이다. 지혜자는 말하길, ‘헛되고 헛되다!’ 그래봐야 장구하지 못한 생명이고, 이를 깨닫지 못하니 영원히 불쌍할 따름이다. 성경은 일찍이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주신 날에 충성하며 살라. 어차피 우린 모두 장구하지 못한 생을 산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12).”
4. 깨달음으로 지혜를 취한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
모든 사람이 장구하지 못하여 인생은 죽으면 끝이지만, 이를 깨달은 자는 죽음 너머의 죽음을 안다. 우리의 깨달음은 무엇인가? 첫째, 어리석은 자들의 최종적인 종말을 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13).” 오늘 시편의 말씀으로 우리는 되레 안도한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5).” 그야말로 천적이 없어 독수리가 장수한다고 하지만 ‘독수리도 파리는 잡지 못한다.’ 결국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그러므로 스스로 자부하지 말라.
둘째, 이 일은 정해진 이치다.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시 49:14).” ‘어쩌다 지옥’이 아니다.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43).” 우리는 누구도 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이 놀라운 빛으로 우리 안의 어둠이 물러간다. 어둠에 가리었던 거짓들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깨닫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셀라)(시 49:15).” 오늘 시편은 뒤로 가면서 우리를 권면한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16).” 저들 잘되는 거, 부러워할 거 없다.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37:35-36).” 저들의 결말을 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
오늘 시편은 단언한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시 49:17).” 아무리 부자요, 능력자로 살았으면 뭐하나?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18-19).” 그러니 오늘 시편의 교훈은, 이를 깨닫지 못하면 존귀하나 짐승 같이 끝날 뿐이라고 한다.
나오는 말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스스로 날개를 내어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4-5).”
다들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이 땅에서, 조물주 위의 건물주가 되는 게 꿈인 이 시대의 희망에 대하여… 오늘 시편은 간곡하게 되풀이해서 강조하는 것이다. 이를 깨닫지 못하면 그게 더 비참하고 끔찍한 결과이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어차피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하여 장구하지 못한 인생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도 장구하지 못함으로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 하지만 받아들임으로 깨닫는 지혜는 죽음으로 끝이 아닌 것을 되뇐다. 하지만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 4:18-20).”
다들 그러고 산다 해도, ‘오직 너희는’ 그러지 말라는 말씀이다. 우리는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배우지 않았다. 오늘 시편의 이와 같은 진술 앞에 마음이 숙연해지기를. 우리에게 더하시는 시편의 역설적인 진술에 귀를 기울이기를.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12).” 그런데 그보다 더 비참한 사람이 부지기수였으니,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20).” 아, 결국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