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사도행전 13:38-39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19:14
그럼에도 의기소침해지고 점점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간 것 같다. 땅이 그 빗장을 잠가 오래도록 막은 것 같은 때 말이다. 요나의 기도와 같이,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욘 2:6).” 그러한 구덩이에 갇힌 것 같은 기분에서 낙망할 때 주를 더 앙망하는 사람들이 우리들, 바로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자들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7).” 저는 지금 지옥을 맛보는 중이다. 물고기 뱃속에 갇혀 있다. 그런 와중에 기도라.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9).”
누가 말하길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이 종식되면 곧이어 사람들의 정신적인 공황상태가 찾아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우울감은 물론 불만과 불안으로 누적되었던 감정이 폭발하여 세계적인 위기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는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몰표가 나왔고 저마다 지금의 위기를 현 정권을 비난하는 데 집중하였다. 정책이나 인물에 대한 판단은 사라지고 정권 심판론을 내세우는 결과였다. 그때마다 그러는 게 사람이겠고, 특히 믿는 자로 사는 데 있어 ‘믿음 때문에’ 오는 스트레스도 가히 장난이 아니다. 남들은 잘만 만나고 적당히 살다 틀어지면 언제든 그만인 것을 너무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관여하려 든다고, 점심 먹고 앉아 잠깐 이야기하다 딸애가 내게 뭐라 하였다. 그게 아니라,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고 말을 더하면 더할수록 아내와 딸애의 반감은 컸고 나는 궁지에 몰려 더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누구보다 공감과 지지를 더할 것 같은 두 사람의 관점이 안 믿는 자들과 같은 논리로 반박을 하니, 급 마음은 우울하였고 마치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한 것 같았다.
우리의 정신적인 쇠약함이 주를 더욱 역동적으로 사모하게 한다! 쫓겨 들어오든 방에 와서 TV를 켜고 앉았는데 공연히 마음은 시무룩하였다. 그렇다고 정색을 하고 훈계를 할 일도 아니고, 이제들 장성하여 자기들 가치와 판단을 굽히지 않는 것이라… 아들한텐 그런 소리 하지 마러. 걘 그럼 아예 안 볼 놈이야! 하는 아내의 핀잔이 더욱 가슴을 때렸다. 하긴 그 나이 때 누가 부모 말을 듣고, 말씀을 우선으로 주의 뜻을 앞세우겠나? 그런 말이 나온 게 같이 붙어 다니는 친구 다섯 중 둘은 시집을 가고, 하나는 만난 지 석 달 만에 올 가을인가로 결혼을 잡았다고 하니 혼기가 꽉 찬 딸애도 마음이 싱숭생숭했던 모양이다. 한데 서로가 좋다면 그 가정이 어떤지, 혹은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전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좋다고만 한다니까, 그래서 나온 소리였다. 앞서 간 한 아이가 부모가 목회를 하는데도 결혼 후 교회를 안 간지 꽤 됐다고 한다. 물론 친정부모는 코로나 때문에도 그렇고 화상으로나마 주일을 지키는 줄 아는데, 주일이면 시댁에 늘 가 있고 둘이 그렇게 알콩달콩 어디 자주 놀러나가는 모양이었다. 안 믿는 시각으로 보면 얼마나 행복하고 부러운 모습인가. 더욱이 시댁이 좀 사는지, 서울에 그 귀하다는 아파트도 신혼집으로 과하게 해주더니 아들며느리에게 각각 일억씩 주며 주식을 좀 배우라고 하였다나…? 그러니 사는 데 넉넉함이 주를 멀리하게도 하였다.
그게 부럽냐? 하고 물었을 때 물론 난 그래! 하면서도 싫을 게 또 뭐 있어? 하는 식이라. 아내 또한 그 옆에서 거들며 오히려 경계하는 나를 타박하니, 나야말로 할 말이 궁벽해질밖에. 그러니 정색을 하고 뭐라 이르려 하면, 다 안다는 식으로 치부해버리니. 아들한테 그런 식으로 조건을 달았다가는 걘 아마 안 볼 놈이야! 하는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말씀이 이론으로 있을 때는 그런가보다 하다 실제로 우리 일상에 관여하려 들면 싫은 것이다.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시 86:13).” 나는 저 혼자 떠들어대는 TV 앞에서 멍하니 딴 생각을 하듯 한없이 기분은 가라앉았다. 뒤늦게 아내가 눈치를 살피며 ‘서운하지 않지?’ 하고 묻는데 괜히 울컥하면서 속상하였다. 이게 어디 서운하고 말 일인가? 내가 아는 누구는 그렇게 도망치듯 결혼을 하여 아이 셋을 낳았다. 족히 10년 세월은 남부러울 게 없었다. 미국에 있는 시고모 댁이 부자라 이를 또 등에 업고 안 믿는 신랑은 서너 개의 룸살롱을 운영하면서 그야말로 호화로운 생활로 주변을 부럽게 하였다.
인생사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그것이 헛되고 헛된 것은 일시적일 뿐인 것을 누가 말로 들려주는 경고에 귀를 기울이겠나? 그래서 언닌가 되는 아이가 무슨 암에 걸려 돌아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친구들 사이에서도 서로 시집 잘 갔다고 하는 애가 있고 부러워도 한다고 하니…. 아무리 남 얘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나는 가만히 돌아보면 가장 후회되는 것이 함부로 사람을 만나고 서로 어울리며 그 가운데서 위로를 얻고 보람을 찾고, 이도저도 아닌 사람으로 아이들 어릴 때 신앙으로 바른 생활을 보여주지 못한 것인데. 까무룩 꺼져드는 기분 때문인지 등짝과 허리가 아파서 오후 내내 등을 지지며 누워있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 40:2-3).” 서로 뭐라 한들, 말씀은 말씀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그 또한 서로의 가치관이 다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니, 이를 뭐라 해야 하는지 그냥 둬야 하는지. 더욱이 아내와 딸애 앞에서는 괜히 골 부리는 사람으로 취급당할 뿐이다. 그러니 이걸 내가 어찌 하겠나? 세상이 온통 요지경이라.
우리의 타락은 약함이 원인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멀리하는 데 있다. 은혜도 좋고 축복도 좋은데, 적당히… 말씀은 말씀으로만 있으시고 우리 생에 관여하지 마시기를… 사는 건 세상 사람들처럼 추구하고 영혼의 위로와 평안은 그래도 하나님께 의뢰하는 편이니… 마치 그것으로 됐다는 식이라. 그게 아니야! 거기가 아니야! 하고 아무리 말해주어도 소용이 없다. 주식이 아니면 가망이 없고 ‘영끌’로 장만한 ‘똘똘한 집 한 채’가 소원이다. 그것이 부럽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축복이 저울질 당한다. 누군 잘만 사는데, 하는 식이라. 그런 걸 보면서 그게 왜 안 돼? 인생 뭐 있어? 그게 왜 나빠? 하고 날 세운 말로 치고 들어오면 당해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시쳇말로 ‘영혼까지 끌어 모아’ 이 땅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눈만 뜨면 장세를 살피고 위로 쭉쭉 뻗은 빨간 줄이면 행복하고, 나락으로 곤두박질하는 파란 줄이면, 이게 다 정권이 무능해서 이 모양이다. 행복의 척도가 남들과 다를 게 없으니 바라고 구하는 삶의 기준도 점점 낮아져서 세상 것을 우선하게 되는데, 당장도 오락가락 하는 판에 먼 내일의 일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결국은 살아봐야 아는 일이니, 인생은 늘 나중으로 미루다 볼 일 다 본다. 저들을 당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저들은 거인족이라!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 6:4).”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2).” 이를 정색을 하고 뭐라 한다고 해서 들릴 소리이겠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3).” 우리 인생의 헛되고 헛됨은 이제와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때나 이제나 믿는 사람으로 살기란 낙망뿐이라.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3).” 나는 딸애 친구의 친정부모 곧 목사 내외를 생각하다 저들이 염려하지 않아? 하고 물었더니, 혼수로 하나도 해준 게 없으니 할 말이 없다나? 거기다 기껏 신학교에서 조교 일을 하며 학교 교회를 섬기던 아이가 시부모로부터 턱하니 일억을 받고, 주식이나 하라 했으니 요즘은 저 둘 사는 모습이 친구들 사이에서도 부러움의 온상이 되었다. 시부모는 어디서 정보를 얻는지 고급 정보를 넘겨주고, 신랑 애도 잘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한 날의 장세가 때론 일 년치 연봉보다 낫다면서 매일 둘이 고급차를 타고 놀러다니는 모양이었다.
“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그에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신 9:2).” 아무리 뭐라 해도 부러운 건 부러운 거라. 젊은이는 젊어서 뭘 모르고 그런다고 하지만 목사내외이기 전에 친정 부모로 저들 입장인들 딸이 행복하다면 됐다는 식이니까! “오늘 너는 알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맹렬한 불과 같이 네 앞에 나아가신즉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사 네 앞에 엎드러지게 하시리니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는 그들을 쫓아내며 속히 멸할 것이라(3).” 이와 같은 말씀이 어찌 귀에나 들어오겠나? 결국은 다 털리고 감당도 못할 빚더미에 앉아 다들 장성한 아이 셋까지 온전치 못한 상태로 전전긍긍한다는데… 내가 아는 전에 누구 이야기라도 들릴까 하여 떠들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때 그이는 신앙도 버리고 믿음도 잃고 안 믿는 신랑, 돈 많은 시댁으로 도망치듯 시집을 갔던 것이었으니. 하긴, 자꾸 저들 이야기를 들추어 생각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인생사 다홍치마라. 거인들과 높은 성벽을 두르고 사는 세상에 대하여는… 살자. 살아서 사는 동안에 삶으로 주의 긍휼하심만을 바라는 수밖에.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시 89:26).”
이를 아는 데 드는 비용으로 한 생을 다 허비하고도 모자라는 게 문제이겠다. 그나마 죽기 전에 돌이킬 기회라도 얻으려나…. 나는 오늘 말씀에서 위로를 찾는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 우리는 오로지 ‘이 사람으로 힘입어’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살뿐이다. 이는 작정하심에 따른 일이라,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48).” 작정된 영혼이 아니면 어쩌겠나? 아,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19:14).” 나의 무력감은 도리어 주 앞에 굴복하게 한다. 남들 이야기야 그렇다 해도 가족들에게마저 말로는 뭐라 한들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7-8).” 나의 변변찮고 별 수 없음이 오로지 주만 더욱 바라고 구하게 하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9-10).”
부디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