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전봉석 2021. 4. 13. 06:03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5:9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

시편 21:13

 

 

사람으로 사람을 어찌할 수는 없다. 부부지간은 말할 것도 없고 부모자식간의 일도 다르지 않다. 주의 마음으로, 주의 사랑으로가 아니면 모든 게 허사이고 낙망할 따름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우정이란 게 어릴 때 가졌던 것처럼 그리 절대적인 게 아니다. 좋을 때야 간 쓸개도 서로 빼줄 것처럼 굴다, 저도 어쩌지 못할 어려움 앞에서는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새삼 어느 유명한 자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암을 앓으며 죽을 고비를 넘겨보니 알겠더라고 하는 말도 그렇게 들렸다. 시인 백무산의 표현처럼 우리는 모두 <정지의 힘>으로 나아간다.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중략)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린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서로의 단절인 것 같으나 그것으로 우리의 정도가 참으로 미약한 것을 안다. 곧 주의 사랑이 아니면 ‘너와 나’는 하등에 쓸모가 없었음을 안다. 그렇게 우리는 비천한 몸을 심고 시간을 들이고 노력을 다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교훈을 얻는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 15:43-44).” 이를 알 때 부질없는 것에 대한 미련도 버린다. 가만히 돌아보면 정말이지 우리 인생이란 게 그렇지 않던가? ‘비천한 가운데 묻히지만 영광 가운데 살아납니다. 약한 사람으로 묻히지만 강한 사람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의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의 몸이 있다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읽으면 그 뜻이 좀 더 알기 쉬웠다. 멈춤으로 나아감을 알고, 부딪침으로 화해를 바라며, 떨어짐으로 같이 있는 기쁨을 깨닫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과 바라바의 떨어짐을 통해 알겠다. 저들이 이방인의 사도로 함께 하였다. 하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였을 때,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의견이 나뉘었다. 그러자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행 15:36-41).” 서로의 가는 길이 갈림으로 복음이 전하여지는 속도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코로나19의 교훈을 단순히 생각하면 그렇지 않나? 너무 붙어 밀착하여 생겨나는 전염병이다. 말을 줄이고 접촉을 삼가고 서로간의 거리두기가 예방과 방역의 기본이 된다.

 

그러니 절망이 또는 좌절이 우리의 새로운 희망이기도 하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 15:53).” 유일한 진리는 여전하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54).” 서로 죽이 맞아 쑥덕거리며 의존하고 서로를 너무 위할 때 정작 그 사명은 뒷전이 되기 십상이다. 가령 우리에게 기업으로 맡기신 자식이라. 너무 기대가 크고 소망을 그것에 두어 모든 의미를 삼켜버리면 도리어 그 사랑이 독이 된다. 우상이 되어 저를 섬기느라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한다. 나는 나에게 두신 육신의 어려움이나 정신적인 문제에 대하여 이제는 그리 받아들인다. 언제 내가 이처럼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던 시절이 있었던가? 수시로 누굴 찾고 만나고 저와 어울리며 그릇 행하기 일쑤였는데, 나의 약함이 나로 하여금 저와 나의 관계를 바로하게 하였다. 떨어뜨림으로 도리어 그 영혼을 위한다. 이에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55).” 아무리 떨어져있다 해도 서로는 기도로 왕래하고 주를 바람으로 예전보다 밀착되는 관계도 있다. 즉 아무리 어둠이 깊다 해도 아침을 이기지는 못한다. 겨울이 모질었어도 봄은 온다. 불행이 겹쳐서 오는 것 같으나 새로운 감사를 알게 한다.

 

바울은 이를 훗날에 이렇게 정의하였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 15:4-8).” 곧 우리 안에는 부활의 능력이 있었다. 죽은 줄 알았으나 살았고, 끊어진 줄 알았으나 더욱 단단히 연결되어 있었다. 서로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위하여 서로를 기도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기를 주님은 그것을 위해 우리를 갈라놓기도 하시고 더는 바랄 수 없는 지경에도 놓아두신다. 시편 50편의 요점은 그런 게 아닐까? “내 백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로다(시 50:7).” 그러므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15).” 이와 같은 주의 음성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함께 웃고 떠들고 시시덕거릴 때에 들리기야 하겠나! 그러니 그 입에 마스크를 봉하고 서로 떨어뜨려 각각의 자리에 두시고 이를 듣게 하심은 아닐까? 다음 설교원고를 위해 본문을 읽다가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때 문득 예전에 읽었던 백무산의 <정지의 힘>도 떠올랐던 것이다. 땅 속에서 죽은 것 같은 씨앗의 시간이 정지되었을 때 비로소 싹이 돋아 줄기를 돋우며 단단한 땅을 밀고나오는 게 아니겠나?

 

문득 밀려드는 외로움으로 누구를 생각하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 또한 누군가의 이런저런 어려운 소식을 접하고 그 심정을 헤아리다 저의 정지된 시간 같은 어둠의 순간이 곧 물러갈 것을 묵상하였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오늘 바울과 바라바의 갈라서는 모습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지만 저들의 길이 결코 각자도생의 길이 아님도 안다. 주는 하나요, 성령도 하나시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4).” 곧 오늘 나를 홀로 떨어져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외롭게 두시는 것 같으나 그로 인하여 주를 알고 내 곁을 같이했던 이들의 면면을 두고 누구를 그리워하다 저를 위해 기도하게 하신다. 시인은 이를 되새기며 경고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곧 우리의 정지된 시간이 정지의 힘을 발휘하는 것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 50:22).” 이 또한 주의 은혜다.

 

누구에게 그 말을 들려주고 싶었으나 어찌 말할 수 없어 가만히 혼자 되뇌었다. 저가 겪는 어둠의 순간을 나는 숨죽이고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시한다. 그럼에도 이 모든 과정에서 감사로 드려지기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23).” 혼자서 본문을 읽고 묵상하고 설교 초안을 잡는데도 이처럼 주의 은총은 나로 하여금 말씀으로 위로받게 하셨다. 내 안의 이런저런 어둠이 왜 없겠나? 누군들, 살아서 사는 동안에 말 못할 사연이 왜 없겠나? 모든 걸 다 누린다고 누리느라 여념이 없었던 어느 지혜자는 일갈하였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잠 14:13).” 저가 정의하는 인생이란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3).” 그러니 우리에겐 허무뿐인가? 허망함으로 끝내려고 인생을 두신 것이겠나? 내가 아는 성경의 하나님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우리가 더러 넘어지고 쓰러져 낙심하고 좌절하기도 하지만 우리들로 하여금…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 24:16).” 우리는 일어난다. 기어이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던 겨우내 얼었던 땅은 봄이 되고 헐거워져서 봄비가 스미며 길을 트면 바람이 들고, 바람이 들고 난 길로 볕이 들고 따뜻한 열기가 전해져서, 헐거워진 흙을 뚫고 씨앗은 기어이 돋움을 하는 것이다.

 

낙담할 수 있으나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서게 하시는 이가 계시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세우셨도다(시 118:5).” 그러할 때,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6).” 누가 나에게 이런 굳셈을 허락하신 것일까? 그리하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7).” 고로,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

뭇 나라가 나를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그들이 나를 에워싸고 에워쌌으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그들이 벌들처럼 나를 에워쌌으나

가시덤불의 불 같이 타 없어졌나니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끊으리로다

너는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는 나를 도우셨도다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오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8-14)

 

가만히, 이와 같이 가만히 주와만 함께 마주 앉게 하시려고. 이어 바울의 증언을 좀 더 들어보면,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6-58).” 결코 오늘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셨으며 그의 입술의 요구를 거절하지 아니하셨나이다 (셀라)(시 21:2).” 곧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그를 영접하시고 순금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셨나이다.” 하여 “그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그에게 주셨으니 곧 영원한 장수로소이다(4).” 그리하여 “주의 구원이 그의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을 그에게 입히시나이다(5).” 곧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찬송하게 하소서(1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