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전봉석 2021. 4. 15. 06:12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사도행전 17:2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1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남다른 무엇을 모색하는 무리가 있다. 당시 아덴 사람들이 그러해서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기를 좋아했다. 사상과 문물과 사고와 가치를 새로운 것에 두어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을 정도였다. 이에 바울은 말씀을 전한다.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행 17:22).” 이에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23).” 오늘 날 우리의 실상을 가만히 살펴보아도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들이 참 많다. 그것은 사람들의 관심이 되고 관심은 돈이 되고 돈은 곧 권력이 된다. 이를 한 번 맛보면 헤어날 길이 없다. 늘 더하고 더해 더 많은 것을 더하려고 한다. 이에 성경은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6).” 있는 자가 남은 것까지 독식한다.

 

이를 사람들은 서로 뭐라 하면서도 부러워한다. 그저 다들 자기 입맛대로 사는 것이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그리고는 이것을 저는 자부한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그런 우리의 속성을 아심으로 하나님은 자꾸 덜어내신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위하는 것을 빼게 하심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하신다.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가 의지하는 모든 양식과 그가 의지하는 모든 물과….(사 3:1).” 제하심으로 더하신다. 우리 신앙에 도움이 안 되는 습성을 버리게 하신다. 서로 의존하고 위하는 것을 멀리하게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약속하신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 12:2).”

 

가령 아브라함은 우르를 떠나올 때 조카 롯을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함께 하는 동안 저를 아들처럼 위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들이 너무 밀착하여 함께 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시고 아브라함에게서 롯을 떨어뜨리셨다(13:1-18). 우리는 더하고 하나님은 빼신다. 빼신 만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은혜를 부으신다. 롯이 빠지고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셨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18).” 곧 우리가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릴 때 찾아오는 놀라운 반전이 있다.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30).” 곧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말이다(29). 버린다하는 말은 더 위하고 바라는 마음에서다.

 

더 위할 때는 하나님을 이용해서 저들을 위한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열심으로 주를 섬기는 일이 나름의 목적을 두고 하는 일을 뜻한다. 시쳇말로 꿍꿍이가 있다. 그것으로 자식이 잘 되고 부모가 장수하며 자신의 일이 만사형통하기를 구하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삶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었다. 그렇게 일방통행은 없다. 점점 더 우리의 가치는 뻥뻥 뚫리는 고속도로를 선호하여 시간을 단축하지만 오히려 모든 행복을 빨아들이는 것만 같다. 더 몹쓸 인생이 되었다. 여기서 저기만 있다. 과정은 생략되고 결과만 평가된다. 이와 같은 우리의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밀어낸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경계하신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5-6).” 이와 같은 말씀에서 경고를 들어야 한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신이란 섬김의 대상이 아닌 유희의 정도이다. 지적허영이며 자신의 영적 허기를 달래는 만족감이다. 오늘 본문의 아덴 사람들이 그러했다.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위하고 바라였다. 이에 바울은 이를 빗대어 저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섬긴다고 증거한다. 우리의 앎이란,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요 3:31-32).” 오늘을 살면서 우리는 늘 어떤 어려움에 봉착하고 무슨 일에 당면하여 힘에 겨워하지만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엄연한 사실은 하나님은 선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높고 위대하시다. “하나님은 높은 하늘에 계시지 아니하냐 보라 우두머리 별이 얼마나 높은가(욥 22:21).” 이를 알면 알수록 오늘 내가 붙들고 의지하려는 것들의 한없이 작아짐을 느끼게 된다. 위하고 바라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헛될 뿐인지. 결코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전 1:9).”

 

그런데 늘 자고 나면 새 것이라 일컫는 것으로 열광하고 사람들의 관심이 몰리고 돈이 쏠리고 권력이 되어 행사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10).” 어제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일부러도 우리를 굴곡지게 하신다. 일직선으로 갈 수 있는 약속의 땅을 네 배는 더 먼 길을 돌아 광야로 가게 하시고, 이도 40년이라는 긴 시간을 통과하게 하신 것이다. 운하를 파고 보를 만들어 뱃길을 놓으면 사람에게는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으나, 흐르는 물길은 굽이지고 감싸 안은 곡선에서 다양한 생물들이 생존한다. 미틴슐레스커의 <가문비나무의 노래>에서 직선형인간과 곡선형인간을 비교하며 그 차이를 말한 게 기억난다. 직선형인간은 우회를 용납하지 않고 완고하며, 자기포기를 용인히지 않고 고루하며, 다른 사람을 살피려는 배려를 모르고, 앞만 보고 달려 좁은 시야를 가졌다. 이에 하나님마저 자신이 뜯어고쳐 조종하려 든다. 기도는 많이 하고 바라는 것도 많은데 듣는 게 없으며, 성경은 여러 번 읽고 또 읽는데 정작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려고 하지는 않는다.

 

나야말로 어떠한가? 나는 종종 이와 같은 메모를 하면 마치 다 내 이야기인 것만 같아 부끄럽다. 또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묵상글에 담은 마음만 같았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다. 한 날의 마음이 참으로 다채로운 것 같다. 은혜로 풍성하였다가 금세 또 염려와 근심에 사로잡히기 일쑤고, 말씀으로 연마하는가 싶었는데 언제 또 화가 눈물이 나서 속상하기도 하다. 그럴 때마다 아침에 이처럼 간절하였던 마음에 반에 반만이라도 간직하며 살게 하여주시기를.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잠 25:2).” 어찌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 마음은 저 혼자 요동치기 일쑤다. 당장 오늘 아침에는 건강검진을 받기로 하였다. 늘 해오던 조그만 병원이 있는데 동네에 새로 개원한 종합병원에서 하기로 하면서 마음이 어렵기 짝이 없다. 먹는 약을 알려달라고 해서 쭈욱, 적어 알려주었더니 한참 뒤에 전화가 걸려 와서 수면이 안 될 수 있다면서 통보가 왔다. 뭐가 이리 그때마다 힘들기만 한지.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 갈등하면서 이러고 있다. 주만 바라고 주만 의지하게 하시려고, 가끔은 부러 하나님이 나로 하여금 외따롭게 하신다. 대나무는 새순이 돋는데 4년이 걸리고 그 뒤로 쭉쭉, 잘 자라는 것 같으나 잠깐씩 멈춰서 매듭을 다진다. 가문비나무는 빽빽한 숲에서 더 높이 자라기 위해 스스로 밑동의 잔가지들을 말라서 떨어지게 한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주신 생을 다하는 날 동안 묵묵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완만하게 굽이돌아 싸안고 산다. 사람만이 이를 허물고 통제하여 스스로가 절대적인 존재인 줄 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사 7:11).” 우리가 주를 바람은 나의 필요나 소용에 따른 필요조건에 의한 게 아니라, 그와 같이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만을 먼저 바람에서였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특유의 불안이 새로운 것에 대한 부담으로 종일 시달리게 하였다. 아내는 돌봄 직급으로 분류돼 다음 주 토요일에 우선순위로 코로나 백신을 맞는다. 이래저래 우려와 염려가 떠나질 않고 그때마다 불안은 가중될 따름이지만, 그럼에도 주를 바람이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나는 늘 못하겠다, 안 했으면 좋겠다, 하면서도 주의 권능으로 산다. 이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은 나의 연약함으로이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래서 더는 나의 약함을 무장하거나 숨기지 않고, 이를 한탄하거나 끌려다니지 않으며, 이것으로 나를 바로 알고 온전히 주를 바란다. 주의 은혜가 내게는 족하다. 나의 약한 데서 주의 강함이 나타나신다. 거기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문다. 다들 잘난 줄 알고 사는 세상이지만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까지 의존하며 사는 사회에서 나는 온전히 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어릴 적에 암송했던 이 구절의 말씀이 오늘에 이르러서도 기억됨은 실전에서 나의 삶이 항상 그러하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셨고 내게는 늘 부족함이 없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 23편,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