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사도행전 18:9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시편 24:1, 7
‘까마귀는 바람 부는 날 집을 짓는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에 나뭇가지를 물어가 버성겨 얼기설기 놓아두면, 집을 짓는 일은 수월할지 모르나 바람이 불면 금세 흩어져 쓸모가 없어진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 뒤뚱거리며 나뭇가지에 앉아 어렵게 지은 집일수록 태풍이 와도 끄떡하지 않는 둥지가 완성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4-25).” 우리의 하루하루를 이와 같다고 생각하면 어려움이나 어떤 힘겨움이 도리어 주를 바라게 하는 힘이 된다. 한데 술렁술렁,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26-27).” 그러니 한 날이 수고가 결코 그 날의 영화로 결판나는 게 아니었다.
이번에 보궐선거를 보면서도 나는 여당이 후보를 내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든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이를 받아들였어야 한다. 한데 그러지 못했고, 그 결과는 몰표로 패했다. 용기는 두려워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승복은 두려움을 안고도 받아내는 용기다. 새삼 이런 빤한 소릴 하는 까닭은 종종 나의 하루가 나로 사는 게 너무 힘들고 지겹기 때문이다. 3월에 개원한 종합병원이라 순서는 한산했고 그저 무난하게 따라 종합검진을 받으면 될 일이었다. 가기 전서부터 그곳에 있으면서도 나는 병적으로 불안하였다. 연신 화장실을 드나들었고 어떤 불안이 옥죄어 빨리 그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그러니 그때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주의 이름을 되뇔밖에. 위염이 있고 무슨 연휴로 조직검사를 하였다고 하고, 이런저런 설명과 당부를 듣고 교회로 돌아왔다. 맥이 풀리고 너무 힘들어 소파에 그대로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나의 저질체력과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정신력으로는 나로 사는 게 너무 힘들다. 그러한 내게 오늘의 말씀이라니!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시편 24:1, 7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새삼 나에게 필요한 용기를 생각한다. 무슨 힘으로 머리를 들까? 영광의 왕이 들어오시도록 내려져 닫혀있던 성문을 열어서 맞이해야 하는데… 들어 오르는 것은 상대적으로 가벼울 때다. 시소에서처럼 나보다 무거운 것이 저쪽에서 누르면 이쪽의 나는 들린다. 나는 비루하고 보잘것없어 연신 마음을 졸이며 주를 바라는 것이어서, 돌아와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의 연약함이 나로 하여금 더욱 간절하게 하였다. 다들 멀쩡하고 태연하게 치르는 것을 나는 몸도 마음도 기진하여 힘에 겨울 뿐이어서,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하시는 주의 음성이 간절하였다(사 38:5). 곧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 하시는 말씀이 더욱 간절하게 다가오는 것이 복이다. 다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에서도 나는 힘에 겨워 쩔쩔맨다. 그런데 또 놀라운 것은 그때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곧 저가 내 대신 지신 나의 질고를 생각한다. 나를 부요하게 하시려고 저는 가난하여지셨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나의 주님은 그러하셨고 나로 하여금 더욱 주만 바라게 하심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이 소소한 이야기가 가소로울 테지만 누구에게 계단은 천 길 낭떠러지와 같고 문 턱 하나가 오르지 못할 산보다 높은 법이다. 어쩌겠나? 받아들임이란 생긴 대로 산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를 인정하면서 어려운 현실을 어려운대로 마주하는 것이다. 아무리 베테랑 비행사도 이륙을 잘하는 것보다 착륙을 잘해야 하고, 산악인은 산을 오르는 일보다 하산 하는 일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합 2:3).” 우리는 종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자신은 괜찮을 거라 여기는 착각이 끝내 돌이킬 수 없는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4).”
조금 민망하지만 나는 속으로 계속 되뇌길, 주가 알아서 하십시오, 주가 알아서 하십시오, 하는 거였다. 실은 어차피 그럴 거여서 내가 뭘 어찌 한다고 해서 될 것도 없었다. 모든 나무는 가장 불안할 때 꽃을 피운다고 한다. 인생은 광야 같으나 광야에서 주의 손길은 더욱 섬세하셨다. 늘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돌보시고 함께 하셨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출 13:17).” 우리의 어려움은 주님의 배려다.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심인데,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18).” 아이러니하게도 이와 같은 어려움이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하였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 “내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로구나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오는구나(아 2:8).” 하나님은 내게 속히 임하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야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을지라(17).” 나로 지쳐 쓰러질 것 같을 때, 내가 스스로 애써 수고하여 이겨내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주가 함께 하실 것을, 마치 바람이 강하게 부는 날 까마귀는 집을 짓고 지혜로운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일처럼, 우리로 기다림을 통해 더욱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맞이하게 하신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40:1-4)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남들을 부러워하다 허망함을 경험한다. 저들은 스스로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사 14:14).” 그러는 저들을 끌어내리신다. 저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옵 1:4).” 곧 하나님 없는 자신감은 허사이고 자신의 허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명분은 남의 울분을 자아낼 뿐이다. 다만 주를 기다림이란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고 위하시고 귀히 삼으신 주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믿는 일이다. 이것이 설마 내 의지로 되겠나?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행 18:9).” 성령이 주도하신다. 때는 밤이다. 어려움이 겹겹인데 두려워하지 말고 말씀을 말하라 하신다. 덧붙여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10).” 현실은 어려움뿐이고 저를 대적하려는 사람들이 가득한 것 같은데, 성령은 우리로 그 너머를 보게 하신다.
이를 위해 아침마다 기다림을 연마한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4).” 누구보다 다윗의 믿음은 이와 같은 오랜 기다림으로 단련된 거였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27:13).” 그러므로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14).” 어떠한 결과로 응답하시든 그 너머의 더 좋은 세계가 있음을 믿는다. 그래서 숱한 믿음의 사람들도 무모할 정도로 믿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나는 늘 이 구절의 말씀 앞에서 함구한다. 기다림은 더 나은 내일이 아니라, 비로소 온전한 날을 기대함이다. 믿음으로밖에는 이를 지켜낼 수가 없다. 그렇게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 27:14).” 그래야 할 가치를 오늘 시편은 제시한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24:1).”
우리는 여호와의 것이다. 그러므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7).” 하고 되묻는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8).”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
(9-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