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전봉석 2021. 4. 18. 06:06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사도행전 20:32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시편 26:12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서기까지,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사 40:3).” 이는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4).” 모나고 굴곡진 곳이 돋우고 낮아지고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는 일이다. 곧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5).” 산다는 게 한 줌 모래를 쥐고 흔드는 일과 같아서 누구의 생이 더 낫다 그르다 할 수 없겠다. 주의 길을 평탄하게 한다는 것은 주가 내 안에서 나로 하여금 하시고자 하는 일을 수월하게 하는 일이다. 주권을 넘기는 일로 주가 행하시도록 나의 모든 주장과 생각과 판단과 기준을 주께 넘기는 일, 이를 지혜자도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잠 4:26).”

 

이는 실제 내가 그리 행하는 노력인 줄 알았는데 그리 행하심 역시 주가 하시도록 내어드리는 일이었다.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잠 5:21).” 유독 뭐 그리 생이 복잡한 사람은 주의 영광을 아직 맛보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5).” 그야말로 나는 요즘 이 말씀에 꽂혔다. 주의 영광이 나타나실 때 어느 인생인들 온전할 수 있겠나? 한 줌 흙으로도 남겨질 게 없는 인생일 따름인데,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께 순종하려는 의지이겠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해 전하는 말씀 가운데서 나는 이를 묵상한다.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행 20:32).”

 

말씀에 부탁하는 일, 누구를 주께 아뢰고 주의 뜻을 대신 구하는 일이 도고기도였다. 중보기도와 같이 남을 위하여 저를 대신하는 기도이기도 하지만 그 의미는 미묘한 차이가 있겠다. 중보는 하나님과 저의 사이를 연결하듯 주께 말씀드리며 저를 알아주십사, 하는 기도라면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 5:14).” 그리하여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15).” 도고기도는 같은 의미이나 저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구하며 의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왜냐하면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1, 2).” 곧 저를 통하여 하나님이 행하시고자 하는 바를 바로 알고자 하는 것이다.

 

어제는 누구의 이런 사정과 누구의 저런 사정을 두고 마음이 어지러웠던 하루였다. 아내는 중학교 아이들 시험 때라 보충을 하는 바람에 토요일 오후에도 교회에 나와 있으며 누구 일로 마음을 쓰며 주 앞에 서성거려야 했다. 그 사정을 듣다보면 마음이 안쓰러워 내가 더 죽을 맛인데, 저를 향하신 주의 뜻이 무엇이고 주의 마음이 어떠하신지… 저의 사연을 마치 내 것처럼 여기며 주의 뜻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도고이고, 저에 대하여 마치 내가 아버지께 전화를 드려 설명하고 아뢰며 기도를 부탁드리는 일처럼 하나님께 아뢰어 고하는 것이 중보다. 굳이 나누자면 나의 이해는 그러했다. 기도를 분류하는 게 좀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굳이 따지면 믿음기도가 있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약 5:15).” 믿음으로 고하고 아뢰는 기도는 역사가 크다. 다음은 공동기도로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 2:42).” 먹고 마시고 사유함이 함께 하는 까닭은 서로가 기도를 위한 것이다. 또 하나 간구기도가 있는데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나의 필요와 모든 것을 구하고 아뢰는 개인기도다.

 

그러다 보면 감사기도가 있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시 93:2-3).” 찬양과 영광을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이겠고, 그럼 회개기도도 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51:4).” 주께 나의 은밀한 것까지 아뢰며 주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 것에 대해 아뢴다. 이는 토설이기도 하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69:5).” 회개는 죄를 인정하는 고함이고 토설은 이를 낱낱이 진술하는 기도다. 이 모두는 하나이면서 그때마다 다른 성질을 갖는 것 같다. 중보기도나 도고기도도 같은 맥락에서는 하나이지만 누구를 위해 기도할 때 주께 저의 사정을 아뢰며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대신 구하는 중보와 주께 저의 사정을 아뢰며 저를 향하신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차이가 있다. 이는 전적으로 내가 이해한 정리다. 어제 누구를 생각하며 주께 아뢰다, 하필 그때 지나치듯 읽던 어느 글에서 도고기도라는 표현이 나와서 새삼 그 의미를 궁금해 하다 구분하여 정리해본 것이다.

 

결국은 모든 게 성령기도로 주가 하게 하시니까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굳이 또 성령기도라 하면,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고전 14:14-15).” 아뢰면서도 아뢰는 것을 알지 못하고 구하면서도 그 구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어서 기도 응답도 또한 내가 요구하는 청구서와는 다른 의미로 내 생을 주도하신다. 솔직히 나는 기도할게, 하고 늘 수시로 아뢴다. 목사가 되고 가장 흔하게 권면하고 또는 부탁을 듣는 것이 기도다. 기도할게, 힘내! 하는 말을 주로 잘 쓰는데 이 모든 기도는 실제 성령이 자꾸 생각나게 하시고 마음을 빼앗아 나도 어쩌지 못하는, 일종의 감정이입 같은 것이다. 자꾸 생각이 난다. 어제도 누구 이야기를 아버지께 설명 드리며(중보기도처럼) 기도를 부탁하는데, 옆에서 듣던 엄마가 네가 너무 신경 써서 속 끓이지 말고 너나 먼저 잘 챙겨! 하시는 거였다. 이때의 속 끓임이 성령이 갖는 주도권이다.

 

내가 누구 일로 안달을 하듯 마음을 쓰며 주께 아뢰는 것은 그리하게 하시는 성령의 일이다. 자꾸 마음이 밟히고 생각이 머문다. 가령 ‘아픈 아이’의 경우 하루라도 카톡이나 문자가 없으면 궁금해지고 덜컥, 걱정이 앞선다. 왜 내가 저 아이한테 그리 마음을 쓰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어쩔 땐 내 자식들한테도 이 만큼 신경을 쓰지 않는데, 하는 생각을 한다. 이것들이 통틀어 중보이고 간구이고 도고다. 그럴 때 우린 아멘, 한다. 아멘은 진정으로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는 동의다. 나는 누구보다 기도에 빚을 많이 진 사람이다. 내 곁에서 날 위해 기도하시는 이의 기도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있을 수 없었다고 단언한다. 가족이나 식구는 그렇다 쳐도 저이가 뭔데 날 위해 기도하나 싶을 정도로 때론 어색하고 낯선 이의 기도도 있다. 이를 역으로 생각하면 내가 스치며 누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가령 폐지를 줍는 어느 노인을 보고, 길을 건너는 임신한 아이엄마를 보고, 아침마다 마주치는 건물 청소하는 아줌마를 대할 때면 주님, 하고 저를 아뢴다. 곧 잊히고 말 관계이나 우리가 어디 가게에 들어가든 누구 앞에 서서 저와 마주쳐야 할 때도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며 저의 사정을 아뢴다. 알지도 못하면서 사정을 아뢰고 주의 긍휼하심을 빈다.

 

그 강도는 우리 자신이 받은 긍휼의 정도와 비례한다. 곧 나는 주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이 아니면 한 시도 살 수가 없다. 어제는 저녁에 샤워하면서 신발을 빨고 일어서는데 핑, 하고 어질증을 느낀 후 내내 어떤 불안에 휩싸여 저녁도 거른 채 먼저 들어가 누웠다. 길을 가다, 순간 무슨 일에 마음을 빼앗기고 어디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훅, 하고 이는 마음으로 불안과 초조가 엄습할 때… 그야말로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는 나의 하루 중에 어느 순간도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갑자기’ 그렇게 ‘순간’ 우리의 생은 어쩌면 이 모든 순간과 순간의 위태로운 연속으로 산다. 갑자기 헤롯이 벌레 먹혀 죽고, 갑자기 사울이 다메섹에서 뜨거운 빛과 예수의 음성을 듣고, 갑자기 베드로가 갇힌 옥문이 열리고, 그렇게 순간 모세는 지팡이로 홍해를 내려치자 물이 갈라지고… 갑자기 멀쩡하던 사람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역사하시는 주의 손에 이끌림이란! 참으로 두려운 일이면서 오로지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만을 구하고 바라게 한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기도란 끈질기게 주만 바랄 뿐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눅 18:1).” 그러다 포기하고 말 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누구 일로 마음을 쓰다 또는 생각이 기울어 주의 이름을 부르다, 한 시도 주의 이름이 아니면 살 수가 없다는 데서 새로웠다. 그리하여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시 26:12).” 오직 주께만 마음을 두고 살게 하시려고…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