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전봉석 2021. 4. 19. 06:05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사도행전 21:14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편 27:1

 

 

놓인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서로의 관점은 다르고, 가고자 하는 길은 다를 수 있다. 그럴 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행 21:14).” 하고 주께 맡김으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다. 누구에게 예수를 전할 때도 누가 믿고 안 믿고 하는 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이고 모든 상황에서 주의 뜻을 바람이 옳다. 그렇게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나의 남은 생은 오직 바라는 한 가지 일, 주의 집에 살면서 주의 아름다움을 바라며 주의 성전을 사모하는 것. ‘하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자신의 성향이나 기질에 너무 끌려 다니지 않는 것이다. 자기 노력으로 너무 애쓰지 않는다. 그러느라 주의 뜻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나 자신을 통해 다른 영혼에게 행사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이 훼방 받지 않도록 주의 한다.’

 

그러려니 해야지, 자신의 반응에 집중하면 스스로를 두둔하며 위하는 엉뚱한 연민에 사로잡힌다. 몸도 마음도 그러려니 둬야 한다. 어제 아침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아버지가 오시는 주일이라, 성찬예식을 준비하고 모처럼 컨디션도 좋았다. 한데 열 시가 다 돼 아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엄마가 진정제에 취해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아이를 달래고 순간 마음이 어려운가 싶더니 영락없었다. 설사를 하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속이 꼬이고 부글거리는 게 희한할 정도였다. 몸은 정신의 지배를 받고 정신은 감정의 영향 아래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연신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부모님이 오셔서 전후사정을 전하고 같이 안타까움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조금 진정이 되었다. 그렇듯 우리가 산다는 일에는 여러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언제 어디서 갑자기 생겨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럴 때 우리의 수단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뿐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마 7:7-8).” 그렇게 나의 성찬식은 직접적이었고 실제적이었다.

 

주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일은 산 자들의 땅에서 온전히 주만 바람이었다. 주로 사는 일이다. 오늘 시편의 한 구절이 그래서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시 27:13).” 얼마나 다양하고 다채로운 사건사고들이 득실거리는지. 한 가족의 일에서도 서로 다른 삶의 형태가 서로 뒤엉겨 맞물리듯 돌아가며 얽히고설키는 것이었으니,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14).” 가만히 ‘주의 뜻이 이루어지리다.’ 하고 모든 것을 맡겨두는 것이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은 분명하지만 그러한 안달까지도 내려놓는 것이다. 설사를 해대며 별의 별 생각과 염려로 시달리면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주를 바라는 것이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시 31:19).” 그리하여 나는 주의 영이 알게 하시고 함께 하게 하시는 그 이상의 것을 스스로 취하지 않는다. 곧 남의 어려움을 알게 하시는 정도 이상으로 짊어지려 할 때는 주의 뜻에 겸손하기보다는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려는 잘못을 저지르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그렇게 마음 쓰고 위하고 행하는 일에까지 주가 하신다. 다만 우리는 구할 뿐이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눅 18:41).” 그러실 수 있음을 알고 그러하기를 구하는 일에는 믿음이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42).” 그 구원은 눈을 뜨기 원하는, 단 지금의 간절함을 채우는 것 그 이상의 믿음을 내포한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43).” 단지 우리는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고 또한 구하는 길밖에.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시 13:6).” 이를 알기 전에 믿었고 믿기 전에 내 안에 두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었다. 이런저런 사정이야 면밀히 살피면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그래서 주를 더욱 바람이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인가?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그렇게 우리는 보았고 주를 따랐다.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눅 18:43).” 자꾸 이를 망각하는 까닭은 스스로에게 너무 열중하기 때문이다. 그 노력이나 수고가 가상하지만 하면 할수록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을 살면서 삶으로 느껴야 하는 일이면 이보다 더 고단한 인생도 없다. 기어이 살아서 살아보고 사는 일을 깨닫는 것이라면, “내가 웃음에 관하여 말하여 이르기를 그것은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에 대하여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였노라(전 2:2).” 누구보다 이를 다 누리며 산다고 산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닐 텐데, 저는 더하기를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3:1).” 주의 때를 알고 기다림이 복되었다.

 

사는 날 동안 번번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그때마다 주의 관여와 역사하심이 우리를 더욱 당황스럽게 하지만… 그래서 100세에 아들을 보았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경우나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훗날에 애굽의 총리가 되는 일이나 난공불락일 것 같은 여리고 성을 돌다 함성을 지를 때 그 성이 무너지는 일이나 사자 굴에 던져졌으나 입을 쩍 벌린 채 꼼짝 못하는 사자를 보며 놀라워하였을 다니엘이나… 이와 같은 당황은 하나님의 살아계심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감사가 된다.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는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게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행 2:12).” 그렇게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예배 전에 긴장과 초조가 이어지던 때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이었겠나?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을 더해주소서, 하는 말만 연신 되풀이 하였고 아이는 ‘엄마 일이 잘 수습되어’ 서둘러 예배에 와서 성찬예식에 참여하였다.

 

기적과 표적은 다른 의미다. 기적은 신비로운 일로 어찌 이성적인 설명이나 이해가 어려운 역사다. 표적은 이에 그 증거가 되는 일이다. 다들 뭐라 해도 ‘내 입에는 홍시 맛이 나는 것’이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란 현세의 어떤 바람이 이루어지는 그 이상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 눈 먼 자가 눈을 뜬 것으로 족한 것이 아니고, 절름발이가 온전히 걷게 되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것으로 주를 바라고 찬양하는 것이 표적이 되는 삶이다. 이는 실제 당황스럽고 때론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풀무불에 던지기 위해 끌고 가던 병사들이 타죽고, 이내 풀무불에 던져져서는 머리털 하나도 끄슬림이 없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놀라움을 상상해본다. 우리 인생에 어떤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어떠하든, 내가 바라고 구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오직 주를 바람이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하는 단 하나의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

 

이에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그렇게 어제 나의 주일은 새삼스러웠고, 나의 약함이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라게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러는 동안 나의 어려움을 염려하시지만 어쩌겠나? 예수님만이 답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다른 길은 없고 다른 데는 이제 관심 없다. 어쩌겠나?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그런 나를 위하여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어제 나의 성찬식은 아이 덕분에 더욱 간절하였다. 나를 위하여 나와 똑같은 조건으로 이 땅에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나는 다만 주를 바랄 뿐이다. 그렇게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요즘은 부쩍 내가 주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다. 안 믿는 부모로 인해, 안 믿는 가정에서, 믿지 못하는 자로 사는 삶에 대하여 주변을 둘러보면…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말 2:8).” 이와 같은 말씀이 내게는 들리고 그 의미를 알게 하심이 기이할 따름이다. 이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의 기다림이란 참으로 고귀한 것임을 새삼 느낀다. 그 기다림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빚어가고 계시는 것이다. 누구는 그와 같은 기다림에 지쳐 쓰러지고 저버리고 제 갈 길로 가곤 하지만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시 40:1).” 가만히 돌아보면 어느 것 하나 나의 삶에 아닌 것이 없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죽어 마땅했을 나의 거스름이었는데도 오히려 나를 그와 같은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셨고, 오히려 나의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으로 견고하게 하셨다(2). 이는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의 공통된 고백이 아닐까? 그런 뒤의 놀라운 반전이라니!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눅 10:30).” 곧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29).” 그러하였다. 이를 성도는 찬송한다.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내가 나로 오늘을 사는 것은 더욱 주를 의지하게 하심이었다(시 40:3). 그렇게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4).” 더는 예전의 나를 원하지 않고 지난 날 오히려 나를 기다리시고 참고 찾아와 주신 주의 은혜에 몸 둘 바를 모를 뿐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의 간구는 오직 한 가지,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27:9).” 세상 그 무엇을 다 잃는 것보다 이는 더욱 더 간절하여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11).” 주께 아뢴다. 그렇게 나는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13).” 그러함으로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1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