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50편 /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전봉석 2021. 4. 23. 13:53

210425 주일

 

시편 50편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들어가는 말

우리는 한 쪽만 본다. 이쪽에서 저쪽을 볼 수 없다. 다른 쪽을 보려면 누구의 말을 듣거나 어떤 도구에 의지해야 한다. 가령 거울을 통해 본다 해도 피사체는 뒤바뀐 상태를 보여준다. 상태에 따라 굴절되고 왜곡된다. 이를 악용해 ‘막말과 악담’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저들을 ‘프로보커터’라 한다. 도발자, 선동자란 뜻으로 해석된다. 시쳇말로 ‘관심 종자’다. ‘나쁜 관종’을 ‘어그로’라 한다. 어그로는 인터넷에서 자극적인 논란을 일으켜 의도적으로 관심을 받으려는 부류다. 막말과 도발로 밥벌이를 한다. 모 개인방송 유튜브는 매년 어마어마한 수입을 올린다. 그 대표로 있는 유듀버가 현직 대통령을 빨갱이라 선동하다 시민단체의 고발로 48시간 연행되어 수사를 받았다. 그 몇 시간에 수천만 원의 후원금이 쇄도하였다고 한다. 이쪽과 저쪽의 노림수는 그 경계에서 돈벌이를 하는 것이다. 상대를 ‘모두까기’하다, 돌연 ‘돌려까기’로 자신들을 지지하던 사람들도 씹어댄다. 그 사이의 반사이익을 노리는 것이다. 이런 ‘나쁜 관종’이 대중에게 먹힌다. 통쾌하기 때문이다(김내훈, <프로보커터>(서해문집) 참고).

 

이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선동은 그 뿌리다. 여러 종교가 생겨나고 그에 따른 분파가 갈려 하나를 지향하는 단체는 도태되거나 사멸한다. ‘세상은 요지경이다.’ 이 세상 권세 잡은 사탄은 이를 보란 듯 우리들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휘젓는다. ‘다 그래!’ 하면서 선동한다. 막말과 악담을 필두로 ‘나쁜 관종’을 지지하게 한다. 이는 우리 안의 ‘자기주장’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 말 그대로 다들 자기 잘난 맛에 산다.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것과 보고 싶은 쪽을 선호한다.

 

오늘 시편은 그런 우리를 불러 세운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엄과 지존하심을 전제로 입을 연다. 도대체 왜들 그러는지, 다음과 같이 주의 음성으로 소리 높인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시 50:21).” 하다못해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고, 장사하는 사람은 손님을 왕으로 모신다는데… 하물며! 그런 세상에서 우리의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고 자세를 고쳐준다. ‘주를 부르자.’ 하고 손짓한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15).”

 

시적 배경

이 시는 아삽의 시다. 아삽은 이스라엘의 삼대 악장 중 한 사람으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등용된 찬양자다(대상 6:39, 15:19, 16:5). 아삽의 시는 시편 50장과 함께 73-83장까지로 꽤 적잖은 시가 수록되었다. 삼대 악장으로 여두둔이 있다. 여두둔은 다윗이 등용한 레위 지파 므라리의 자손이다(대상 25:1-3, 대하 35:15). 저의 시편으로는 39, 62, 77장이 있다. 또 한 사람의 악장은 헤만이다. 저는 유다지파 마홀의 아들이다(대상 2:6). 저의 시편은 88장이 있다. 특히 헤만은 그의 아들 열네 명이 온전히 주의 성전에서 봉사하였다(25:4-6). 아삽과 여두둔과 헤만은 선견자라 하여 찬양 시를 지었으며 성전 일에 충실하였다.

 

1.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시 50:1-2).”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우리는 빛으로 느낀다. 세상의 이런저런 일련의 사건과 사고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와 살아계심을 발견한다. 어떤 일도 우연은 없다. “우리 하나님이 오사 잠잠하지 아니하시니 그 앞에는 삼키는 불이 있고 그 사방에는 광풍이 불리로다(3).”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은 없다. 여기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4-5).” 즉 오늘 시인은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백성, 주의 성도들에게 돌린다.

 

초등학교 앞을 지날 때, 정문 앞에서 아이들을 마중 온 엄마들을 보았다. 그때 엄마의 눈에는 오로지 한 아이만 보인다. 수많은 아이들 사이에서도 자기 아이에게만 시선을 둔다. 아이는 저만치서 엄마를 발견하고 실내화 주머니를 흔들며 뛰어온다. 엄마는 아이의 가방을 대신 지고, 한껏 허리를 숙여 이야기를 나누며 돌아간다. 마치 오늘 본문의 정황을 연상하게 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4)” 살피시고,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5)” 곁으로 모으시고, 이어 “내 배성아 들을지어다 내가 말하리라.” 하고 한껏 고개를 숙여 아이의 키와 보폭에 맞춰 말을 거는 엄마 같다. 그러다 어떤 위험이 감지되면 힘주어 자기 쪽으로 잡아끄시며, “나는 하나님 곧 네 하나님이라(7).” 하고 보호하신다. 우리의 상황을 돌보시며 뭐라 나무라기보다(8-13),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라고 하신다(14).

 

이에 따른 우리의 반응은 명징하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15).” 곧 엄마, 하고 외쳐 부르는 아이와 같이 우리는 어디서, 어떤 일이 생기면 엄마를 부르고 이른다. 우리가 주를 부를 때 주께서 우리를 악인들의 경계에서 멀찍이 돌려세우신다. 악인은 그렇지 않다. 저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1:4). 저들의 특징은 뚜렷하여 알면서도 부정하고 외면한다. 오늘 시인은 이를 지적하고 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50:16).” 몰라서 주를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뒤로 미뤄두는 까닭이다. 저들의 자세를 좀 더 살펴보자.

 

첫째, 말씀의 교훈을 싫어하고 이를 뒤로 던진다.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17).” 둘째, 악인은 더욱 악한 일에 몰두하며 저들끼리 동료가 된다. “도둑을 본즉 그와 연합하고 간음하는 자들과 동료가 되며(18).” 셋째, 저들에게 어쩌다 죄가 아니라, 다분히 의도적이다. “네 입을 악에게 내어 주고 네 혀로 거짓을 꾸미며(19).” 넷째, 스스로 옳다 여기며 형제를 비방한다.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머니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20).” 다섯째, 이에 점점 더 무뎌지는 까닭은 승승장구하는 것 같아서다. “네가 이 일을 행하여도 내가 잠잠하였더니 네가 나를 너와 같은 줄로 생각하였도다 그러나 내가 너를 책망하여 네 죄를 네 눈 앞에 낱낱이 드러내리라 하시는도다(21).” 여섯째, 어쩌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게 아니라, 이를 생각하지 않으려 작정하였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일곱째, 반드시 결과에 따른 심판이 따를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22).”

 

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22).”

 

실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면 이런 말씀을 별로 개의치 않는다. 저들에게는 들을 귀가 없다. 아이엄마의 눈에 자기아이의 모습만 보이고, 아이의 눈에 자기엄마의 모습만 보일뿐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판결하시려고

위 하늘과 아래 땅에 선포하여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셀라)(4-6).

 

다윗도 시편 1편에서,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4-5)” 하고 단정하였다. 그렇게 오늘 시편에서 아삽은 우리의 결국을 들려주고 있다. 이를 듣고 안다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50:5).” 하시는 말씀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우리는 안다! 곧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별로 갈망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산다면 이보다 서글픈 성도도 없다. 그런 자는 안 믿는 사람들과 같이 사람을 무서워하고 돈을 무서워하며 사는 것에 집착하고 죽는 일에 두려워한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까닭으로 저들은 현실에도 부주의하다. 진지하지 못하고 함부로 세상 문화를 따른다. 남들처럼 사는 게 목적이고,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게 인생의 소망이 된다. 이는 만유의 주, 천지의 주재이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다. 말씀을 저버려서 이에 따른 심각성을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하고 우리를 불러 세운다. 그리고 힘주어 “이제 이를 생각하라!” 하고 엄히 경고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22).” 곧 이와 같은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리는 자세는 성도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다. 이를 “하늘이 그의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셀라)(시 50:6).”

 

3. 아삽의 시에서 얻는 교훈

 

1) 심판자 하나님이 우리를 증인으로 소집하신다(1-6절). 성경은 일러 우리가 그와 같음을 알게 하신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전 10:10-11).” 즉 증인된 삶을 다하지 못하면 허사다. 아삽은 이를,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시 50:2).” 하고 우리의 본문을 일깨운다. 우리는 시온이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고전 3:17). 우리는 증인으로 세워지는 삶이다.

 

2) 형식적인 제물이 아닌 진정한 감사를 원하신다(7-15). 우리가 드리는 유일한 예배는 감사다. 우리의 감사는 환난 날에 주를 부르는 것이다. 다급할 때 사람의 본심이 나온다. 멀쩡할 때야 누군들 거룩하지 않겠나? 환난 날에 주를 부른다는 것은,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4-15).” 하나님이 나를 건지시게 하는 기회가 되고, 이로써 우리가 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이다. 감사로 예배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들 때 주를 부르는 일이다! 이에 우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3) 위선적인 신앙을 걸러내신다(16-21). 오늘의 환난이 우리로 온전히 주를 바라는지 알게 한다. 늙음을 준비하고 병듦을 대비하는 것은 어디 좋은 보험이나 도움을 청할 인맥이 아니다. 고통은 우리로 단순하고 또렷하게 한다. 무엇을, 누구를 바랄 것인가?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이를 증명하는 것이 환난 날에 주를 부르는 것이다.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4:2).”

 

4)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보다 비극적인 일은 없다(22-23). 우리가 호흡을 멈추면 죽는 것처럼 범사에 주를 인정하고, 날마다 주를 부르는 일이 우리 성도들의 숨이다. 이는 오래 참고 기다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사 30:18).” 우리를 지금까지 기다리시는 주님처럼 우리도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내어맡김으로 신뢰함으로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하고 성경은 덧붙인다.

 

나오는 말

지혜의 찬송을 들을 귀 있음에 감사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고로 우리는 징계를 두려워할 줄 앎으로 징계와 상관없는 자이고, 영원한 형벌을 무서워할 줄 앎으로 영벌에서 벗어난 자이다. 이를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앎으로, 우리는 더욱 진실 되게 기도한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욘 2:4).” 설령 쫓겨난다 해도, 또는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하는 내어맡김이 믿음의 증거다.

 

저는 누구이신가? 아삽은 오늘 시편 첫 구절에서 정의하였다. 저는 “전능하신 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다(시 50:1). 저가 우리를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4-6).” 곧 오늘 일련의 이런저런 상황이나 우리 앞에 환난은 어쩌다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과 똑같이 탄식하고 절규한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시 13:1-2).” 예외가 없는 환난과 고충 앞에서 우리가 취할 행동을 아삽은 노래한다. “말씀하사 해 돋는 데서부터 지는 데까지 세상을 부르셨도다.” 이를 우리로 알게 하시려고, “온전히 아름다운 시온에서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도다(시 50:1-2).”

 

시온을 알고 사모하는 우리들이 주의 자녀인 것을. 이에 우리는 환난 날에 주를 부른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15).” 곧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 곁에 함께 동행하게 하신 여러 믿음의 사람들을 서로 격려하며, “이르시되 나의 성도들을 내 앞에 모으라 그들은 제사로 나와 언약한 이들이니라 하시도다(5).” 비로소 우리는 그럴 수 없는 중에도 그러할 수 있는,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