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전봉석 2021. 4. 29. 06:0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3:23-24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시편 37:3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로 주를 바라게 한다. 때론 나의 약함이 지겨울 때도 있지만 그것으로 주를 기뻐할 줄 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아니면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내 멋대로 살 수 있는 날들인 것만 같다. 누구 말처럼 돈만 있으면 여기가 천국이라. 누가 나의 가는 길을 막을 수 있겠나? 아주 잠시 그것도 일시적인 순간이면 지나가는 것을 그처럼 애틋하게 바라고 놓지 못하고들 산다. 그런 가운데 내 길을 여호와께 맡긴다고?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5-6).” 이를 바라고 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우리의 약함으로였다. 그런데 세상은 거꾸로 자신의 계획을 숨기려 한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그러는 시간이 일순간 그럴 수 있는 것도 같겠으나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사 29:15-16)” 그런데 그러고 사는 게 사람이지 않던가? 죄는 사탄보다 악하다. 우리 안의 죄성은 우리도 어찌 감당이 안 된다. 이를 통제하게 하는 것이 나의 약함이다. 이 지긋지긋한 몸의 연약함이고 마음의 불안이다. 걱정과 걱정, 염려와 염려가 끝이 없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 뒤로 숨길 수 없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면 할수록 나의 나 된 것을 은혜로 여긴다. 숨길 것도 감출 것도 없는 생활이 복이다. 어찌 그 누가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나? 하루에도 수골백번을 부정하고 원망하고 탐욕과 남을 시기하는 마음으로 시달리는 마당에…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인정하고 주를 바란다. 여기까지만 한다. 할 수 있는 동안에 한다. 나는 요즘 그런 마음으로 무장하고 선다. 어쩔 땐 너무 정신이 없다. 오전에 교회로 나가 설교원고를 정리하거나 묵상글을 읽을 수 있는 이른 시간이 가장 여유롭다. 곧 누구와 통화를 하거나 곧 친정에 다녀오는 아내를 마중하고 돌아오면 거실에 책상을 펴고 아이들 수업 준비를 돕는다. 설거지를 하고 밥을 차린다. 아내가 무릎 수술을 한 뒤 하나둘 늘어나는 게 많다. 저녁에는 거꾸로 책상을 접고 소독을 하고 걸레질을 하고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가정예배를 드리면 하루 일과가 후다닥 간다.

 

어제는 좀 먼 길로 산책을 하며 돌아왔다. 건강검진에서도 운동이 필요하다는 소견이 나왔는데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게 걷기뿐이다. 이걸 하면 저기가 문제고 저걸 하면 여기가 문제인 저질체력이라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것으로도 족하다. 이렇듯 나의 일상은 하찮고 사소한 일일뿐이지만 그것을 나에게 맡기신 것이라. 그리 여긴다. 이 몸도 주가 맡기신 것이고, 저 어려움도 주가 더하시는 것으로 나는 받는다. 하면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한 달란트든 반 달란트든 주신 바, 맡기신 이에 뜻을 따르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언제부턴가 나는 이 말씀을 늘 붙든다. 나의 부족함은 물론 죄악됨이 깊고 높고 넓다 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더 크고 위대하심을 믿는다. 이는 내 안에 이르신 주의 영으로 안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20-21).”

 

그러는 동안 나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은 주가 더 잘 아신다. 하면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시 85:7-8).”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의 어리석었던 날들을 증오한다. 죄는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대척을 이룬다. 이때 내가 주의 사랑을 알 수 있는 길은 나의 죄악됨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뿐이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51:2-3).”

 

어제는 시편 51편을 두고 설교원고를 작성하고 있는데 자못 나의 지난 날 어리석었던 일들이 스치고는 하였다. ‘이만하면 됐지 뭐?’ 하는 마음이 늘 나를 타협하게 하였고, ‘한 번 사는데 이것도 못 해보고 살면 어쩌나?’ 하는 어리석은 바람이 나로 자꾸 그릇 행하게 하였다. 그럴 때면 항상 같이 하는 동무가 있고 곁에 부추겨 응원하는 문화가 있었다. 지금도 저들 중 더러는 내가 이러는 게 마뜩찮아 ‘몹쓸 병’에 걸린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도 있다. 그럼에도 그것까지도 개의치 않는다. 왜? 죄는 늘 그렇게 우리 앞에 항상 있다. 죄는 사탄보다 악하고 사탄도 어쩌지 못하는 본질적인 악이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내가 좀 착해지고 선해져서가 아니다. 주는 본래 선하시다. 주의 선하심으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용서하신다. 다만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삼하 12:13).” 이처럼 자신의 죄를 인정할 때이다.

 

누구의 이런저런 사연을 듣다 기구하기 짝이 없는 저의 인생 앞에서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았다. 어찌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랐을까, 싶고. 그런 환경에서도 참 잘 자랐구나, 하고 기특하게 여기다가도 이 모든 게 주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인 것을 안다. 그런데도 세상에서 잘되는 사람들은 대체로 하나님을 등지고 사탄과 짝을 이루어서다.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사 32:4).” 사람들은 혹, 하고 저는 스스로 우쭐하여 애써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필요치가 않다. 하나 “어리석은 자를 다시 존귀하다 부르지 아니하겠고 우둔한 자를 다시 존귀한 자라 말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은 것을 말하며 그 마음에 불의를 품어 간사를 행하며 패역한 말로 여호와를 거스르며 주린 자의 속을 비게 하며 목마른 자에게서 마실 것을 없어지게 함이며(5-6).” 당장은 저들이 옳다. 비혼이 제도권으로 용인되고 사실혼이 성립되며, 혼자 아이를 갖고 낳고 기르는 일에 추앙받는다. 성을 선택할 수 있고, 바꿀 수도 있고 이 모두는 자신들의 주권과 독립을 최우선으로 삼는 결과다.

 

그렇게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7-8).” 우리의 존귀는 상대적으로 주를 인정함에 있다. 이는 실패와 좌절도 주의 손길로 여긴다. '생긴 대로 산다'는 말은 진리다. 주신 이를 인정하면 말이다. 어려운 한 날의 고단함도 주의 무궁하신 사랑으로 삼는다. 이때 오늘 시편은 그럴 수 있는 우리의 자세를 일깨운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시 37:7).” 세상 저들 때문에 불평하거나 불안해할 거 없다. 이어서 바울의 설교를 들어봐도,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3:4).” 세상이 우리로 견주게 하는 까닭은 말씀을 판단하고 이기려 하기 때문이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안다.

 

나는 요즘 이런저런 사연과 되는 일에 대하여 놓아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를 신뢰하고 내어맡기는 것뿐이다. 그럴 수 없어하는 것으로 불안해하고 고통당한다. 이도 어쩔 수 없는 것은 그러는 동안에 주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깨닫는다. 나 같은 죄인을 어찌 이처럼 놓아두시고 여기까지 함께 하셨는가를, 죄가 깊게 여겨질수록 주의 사랑도 무궁하게 다가온다. 나도 나를 용서할 수 없겠는데 주는 나의 죄과를 기억하지 않고 계시었다. 바울은 이어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10-12).” 그게 나였고 여전히 나이다. 나야말로 나를 얼마나 감싸고 두둔하며 나서서 의롭다고 여겼던가?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18).” 내가 어찌 그러고 살았는가, 돌아볼 때면 오금이 다 저릴 뿐이다. 그런데 이제 깨달은 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20-21).” 그러므로 믿음뿐이다. 죽이시든 살리시든, 망하거나 흥하거나, 나의 한 날이 모두 주의 것임을.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26).” 나로 믿는 자를 세우신 것에 대해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자. 가만히 주신 자리에서 맡기신 한 날을 수행하며, 어떤 날은 어려워하면서 어떤 날은 다소 가벼움으로,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는 중에 이 모두는 주의 것이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27).” 이에 나는 더욱 주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1).” 율법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용서가 안 되는 죄인인 것을 깨닫고 이에 주의 긍휼하심으로 죄의 사망의 권세에서 놓여나 의를 구하며 산다. 누구의 사연을 듣고 어떤 일로 같이 마음을 쓰며 힘들어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께 의탁함이었다. 나의 약함이 나로 하여금 주의 도우심을 절실하게 구한다. 그리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시 37:3).” 오늘 시편의 말씀이 만고의 진리이고, 만사의 우선이다. 이걸 해서 뭐하나 싶은 것에도 주를 의뢰함이 나를 붙들어 세운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주의 성실하심을 먹을거리로 삼는다.

 

아, 참 귀하다. 나의 이상과 꿈이 아니다. 하루 더 나름의 보람과 만족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주로 기뻐하는 것.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4).” 어느새 내 마음의 소원은 오직 하나로 통일된다. 전에는 그 바라던 것이 세상에서 이리 잘되고 저리 누리며 남부럽지 않게 사는 모양이었다면,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27:4).” 부디 그리하여서 그러하였으면!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37:5-7)

 

그럴 거 없다. 저들 때문에 힘들 것도 불평할 것도 없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10).” 그들의 결과를 이제 우리는 안다. 이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23-24).” 그러므로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