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25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
시편 38:17-18
상한 심령으로 주 앞에 설 때에 주는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도우심을 바랄 때 주는 영화로우심을 얻는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하신 주의 음성이 생생하다. 심령이 가난하다 함은 주의 위로와 주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는 자로 서는 것이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 어찌 하려 할 때는 알지 못했던 마음이 애통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그 위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으로 오직 주의 이름만으로 위로를 얻는다. 그러할 때 우리 영혼은 온유하여진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 억새고 질겨 그 고집과 아집을 꺾을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나는 주 앞에서 순한 양처럼 그의 품에 안긴다. 이는 내게 더하신 날, 그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이다.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시는 이도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울지 말라.’ 주께서 위로 하신다.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 주 없이 살 수 없는 영혼으로 오직 주의 위로와 그의 말씀으로만이 배부르다. 돈도 명예도 어떤 이상과 자기도취도 더는 바라지 않는다. 이와 같은 위로를 받아본 자는 위로하심대로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7).” 그야말로 내 코가 석 자나 빠진 판국에 누가 누구를 긍휼히 여길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상하게 그리 마음이 기울어 누구를 위해 애통하며 온유함으로 저의 사정을 주께 아뢴다. 이를 얻고자 하여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 행여 마음에 다른 것으로 분절로 들어찰까 하여 노심초사 주를 바란다. 왜냐하면 여전히 나의 속성에는 세상을 바라고 그리워하며 언제든지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들어차기 일쑤니, 나는 행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이 평화가 깨질까봐 두렵다. 하여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 하나님과 화평함으로 사람들과도 화평하고자 한다.
누구를 미워하고 적대시하면 누구보다 내 안에 평안이 없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 어떤 손해나 오해나 공연한 공격을 받아도 이를 맞대응하여 공격하지 않는 것은 의를 위하여서다. 주가 내 안에 이루신 의요, 나로 인하여 나의 가정과 나의 이웃과 나의 땅에 더하신 이 평화를 위하는 의다. 이에 믿는 게 어렵고 신앙으로 사는 게 힘에 겨울 때도,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11).” 우리는 이제 이 복을 사모할 줄 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2).” 나만이런가? 하고 유난을 떠는 것 같을 때 허다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하였음을 성경이 증언하신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저들도 우리와 다를 바 없었으니 이는 곧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2).” 우리는 한 길을 간다. 정해진 길에서는 이정표가 필요하지 않다. 어디로 갈지, 갈팡질팡하지 않는다.
그래서 감히 주께 아뢴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시 38:21-22).”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는 영광을 받으신다. 이는 곧 허물에 사함을 받고 나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심을 받는 자의 복이었다. 도대체 누가 자기 허물을 숨길 수 있을까?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19:12).” 숨겨 놓은 죄가 우리를 찌른다. 자기 계획을 주께 숨기고 있으면 고단할 따름이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사 29:15).” 이것이 곧 패역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우리는 그 무엇도 주 앞에서 감출 수 없음을 안다. 돌이켜 주를 멀리하고 살 때의 나를 부끄러워한다. 그것이 더는 죄책으로 나의 양심을 찌르지는 않는다. 믿는 자의 특권은 죄로부터의 자유다. 하지만 이를 경계한다. 두려워할 줄 안다. 가령 여전히 누구를 미워하며 살고 있을 때 나의 미움은 나를 찌를 뿐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주와 화목하지 못하다.
이러한 완고함이 죄가 주는 마음이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이는 마치 내가 뭘? 하고 골을 부르며 혼자 쀼루퉁해서 저녁도 굶고 문을 닫고 있는 아이와 같다. 다들 자신만 미워하는 것 같다. 누가 뭐라 하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자신만 억울한 것이다. 이는 누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 말이다. 나의 가장 큰 허물은 열등감이다. 자격지심으로 괜히 지레 남을 원망하다 주를 서러워한다. 다들 나만 미워하는 것 같다. 하나님까지도 말이다. 이 얼마나 유치하고 한심한 일인가 싶지만 너무 깊이 뿌리내리고 내 마음을 완고하게 한 것이라 깨고 깨도 여전히 단단한 돌덩어리 같다. 다른 더 좋은 수가 없을까? 오늘 말씀은 이를 일깨우신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이미 다 끝난 일이다. 그런데도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내 죄악을 아뢰고 내 죄를 슬퍼함이니이다(시 38:17-18).” 이 일이 어찌 됨인가?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우리는 어찌 할꼬? 하고 주 앞에서 괴로워할 줄 안다. 이것이 복이다. 누군들 아니 그러한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천하의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거뿐이다. 그러니 죽어라 하고 나름 한다고 하며 산다고 사는 이로서는 억울할밖에! 그래서 본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4-5).” 내가 왜 송구하고 죄송한데 감사할 것뿐인가를 이제 알겠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6-9).” 이게 오롯이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지 않던가?
오후에는 병원엘 들러 전전주에 받은 건강검진 결과와 고혈압 약을 받아왔다. 나는 병원에 가면 오히려 더 혈압이 올라가고 늘 긴장한다. 새로 옮긴 병원의 젊은 의사는 사무적이었고 저의 간단한 설명과 대수롭지 않은 듯한 태도가 오히려 편안했다. 돌아와 설교원고를 다듬었고, 일찍 일어나 멀리까지 산책을 하며 걸었다. 걸으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고 누구와 누구를 생각하다, 산다는 게 참 별 거 아니라는 생각도 하였다. 슬픔이 우리를 억압하고 고통이 나를 강제하기 일쑤지만 그것으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었다.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시 88:2).” 마침 친구에게서 전화가 들어왔고, 죽음을 목전에 두고 사투를 벌이는 부친의 모습으로 안타까워하며 우는 친구에게 나는 뭐라 위로할 말을 삼켰다. 울지 말라, 하는 주의 음성이 저의 영혼에도 들려지기를 기도하였다. 사느라 사는 동안 우리가 번번이 놓치고는 하는 것이 주의 위로하심이 아니겠나? 당장에 ‘때를 따라 돕는 은혜’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데는 조바심만 나는 것이다.
설령 내 생애에 이를 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으나, 많은 믿음의 사람들도 그와 같은 회의와 갈등 가운데서도 굳건하게 붙든 것은 소망이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그럼에도 우리가 반드시 아는 것은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시다는 것이다. 어떠하든지 주는 선을 이루시고 의를 달성하신다는 것이다. 이에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이를 깨닫고,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욘 2:4).” 욥은 그 고통 중에서야 주를 바로 알았으며,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에 던져지면서도 이를 상기하였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나는 저들의 숨 가쁜 고백이 내 것이 되기를 위해 기도한다. 어떠하든지 주를 바라고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엄청난 복이었다. 나의 나 된 것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는 할 수 없으나 나로 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심을 안다. 내 안에 주의 은혜가 더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무는 곳이 나의 약함이었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둘러 안정제를 먹을 때마다 이를 되새긴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어떻게 그러한가?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전에는 무장하며 뒤로 숨기고 하나님께도 비밀로 하려던 나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이 도리어 주의 도우심을 구하고 바라는 힘이 되었다. 이를 자랑한다는 사도의 증언을 나는 알 것 같다. 나의 열등감의 원인으로 괜한 자격지심을 불러일으키던 것이 오히려 자랑이 된 것은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오늘의 눈물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저의 슬픔과 절절한 마음이 그저 지나는 시간에 흘러가지 않기를. 이에 일어나라, 하실 때 저의 죽어 있던 영혼이 온전히 주를 바라며 바로 서기를. 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생각하였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하는 오늘 사도의 증언에 귀를 기울인다(롬 4:13). 그러므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던 아브라함과 같이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21-22).” 고로 나의 의는 믿음뿐이다. 주를 신뢰하고 나의 모든 것을 내어맡김으로서만이 주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을. “주여 나의 모든 소원이 주 앞에 있사오며 나의 탄식이 주 앞에 감추이지 아니하나이다(시 38:9).” 그렇게 “내 심장이 뛰고 내 기력이 쇠하여 내 눈의 빛도 나를 떠났나이다” 또한 “내가 사랑하는 자와 내 친구들이 내 상처를 멀리하고 내 친척들도 멀리 섰나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내가 주를 바랐사오니 내 주 하나님이 내게 응답하시리이다(10, 11, 15).” 그러므로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21-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