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51편 /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
210502 주일
시편 51편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51:18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51:19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들어가는 말
인생은 고해(苦海)와 같다. 우리는 사는 데 따른 필연적인 고난을 겪는다. 이를 필연적이라 함은 예외가 없기 때문이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 죄 아래서 태어난 모든 생명의 숙명이다.
오늘 본문에 앞서 한 여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저는 가버나움 남쪽으로 하룻길 떨어진 골짜기에 있는 나인성의 과부다. 저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마저 죽었다. 장례행렬이 성을 빠져나갈 때, 예수님이 나인성으로 오고 계셨다. 주님은 저들 중에 슬피 우는 과부를 보셨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 7:13).” 여기서 ‘과부’란 모든 괴로움과 어려움을 총칭한다.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보셨다’는 언급은 40여 차례 나온다. 대부분이 고아나 과부, 장애인이나 가난하고 병들어 사회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을 향한 시선이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
그때 주님은 여인에게 “울지 말라.” 하시며 다가오신다. 그리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눅 7:14).” 주님은 늘 죽음을 잔다고 표현하셨다. 곧 이를 믿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없다. 오늘은 영생으로 이어지는 한 날이다. 우리의 죽음은 단지 돌아감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16).” 우리 죽음의 삯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값을 지불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우리의 슬픔은 슬픔으로 그칠 리 없다. 우리의 눈물이 눈물로 마를 일은 없다. 왜냐하면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11).” 이것이 믿는 자의 은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9).” 곧 우리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도 영원히 죽지 않는다.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 1:18).”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죽고 사는 문제에서 놓여났다. 주는 부활이시요, 생명이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울지 마라’ 하시며 위로하신다. 일찍이 다윗은 우리의 눈물을 소중히 다루었다. 곧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 56:8).” 이로써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 12:20).” 이를 바탕으로 오늘 시편은 진술한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상한 심령으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주는 영광을 받으신다.
시적배경
시편에 일곱 편의 참회시가 수록되었다(6, 32, 38, 39, 51, 130, 143편). 오늘 본문은 B. C. 991년, 다윗이 유부녀인 밧세바를 범하고 이를 은폐하려 남편 우리야를 죽게 한 후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하고 시치미 떼고 1년 남짓 살았던 때이다. 이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그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이를 배경으로 하여 시편 6편과 32편과 51편의 참회 기도를 지은 것이다. 6편은 하나님의 견책과 징계의 중함을 호소하고, 32편은 범죄 자체에 대한 고백과 회개에 따른 은총을 간증하며, 51편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죄의 근원과 본질을 진술한다. 이를 추정해보면 오늘 본문 51편이 먼저 쓰이고 다음이 6편과 32편이 쓰였을 것이다.
본문이해
1연(1-9절) 죄의 본성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행적을 아신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1).” 우리는 필히 죄책 가운데 산다. 죄는 사탄보다 악하다. 죄책은 주머니 속의 송곳 같다. 수시로 자신을 찌른다. 죄는 과거에 대해 속박하고, 현재에 대해 억압하며, 미래에 대해 불안을 조성한다. 주께서 우리 죄를 모두 담당하셨고 그에 따른 값을 먼저 다 지불하셨는데 어째서 그럴까?
첫째, 죄는 자꾸 숨긴다.
“자기의 계획을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의 일을 어두운 데에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사 29:15).” 곧 자기 안에 끌어안고 사는 은밀한 분노와 원망과 용서할 수 없는 복수심이 원인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렘 23:24).”
둘째, 주께 아뢰는 성도의 간구가 필연이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3).” 곧 우리의 죄성은 끝까지 스스로 짊어지려는 아집이다. 완고함이고 완악함이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크리스천처럼 분명히 천성을 향해 가면서도 자기가 짊어지고 가려 고집하는 게 죄다. 내려놓지 못하고 내어맡길 수가 없다. 이는 주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셋째, 이는 모두 회개하지 않는 이유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즉 우리 죄가 아무리 깊고 무겁고 씻을 수 없다 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 어떤 죄보다 넓고 깊고 높음으로 충만하시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이를 성경은 누누이 강조하신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 그런데 우리는 여러 이유를 들어 회개할 수 없는 핑계를 댄다.
오늘 시편의 핵심도 그것이다. 곧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시 51:2).” 회개는 주께 아뢰고, 성도의 교제로 이를 간증하며, 더는 그것에 얽매이지 않고, 비운 자리에 날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채우는 것이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3).” 이를 알았기에 다윗은 고백하고 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32:5).”
2연(10-12절), 성령의 신실하심이 구원의 기쁨을 회복한다.
다윗은 절규한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단번에 죄사함을 받고도 여전히 죄성을 안고 사는 까닭은 이 땅을 사는 동안에는 필연적인 것이다. 어릴 때 당했던 서러움과 젊을 때 지었던 죄의식과 앞날에 대한 불투명한 불안이 우리를 수시로 사로잡는다. 더는 우리가 예전의 나로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런데도 여전히 한을 품고 있거나 남들처럼 사는 게 생의 행복인 것처럼 여긴다면 이는 엄연히 성경을 거스르는 일이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런데 왜 안 될까? 성령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성령으로 사는 것보다 남들처럼 사는 데 더 목표를 두기 때문이다. 남부럽지 않은 삶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렇게 왕권을 이용하여 한 여인을 소유했고, 이를 죄로 여기기보다 당연한 듯 살려했다. 그런 그가 오늘 주께 간구한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 51:11).” 우리는 성령으로밖에는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다. 사회적 지위나 명예로 안 된다.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것 같지만 다들 사는 데 허덕이며, 이를 숨기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것뿐이다.
이제 우리는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고로 우리는 나이 들고 늙는 일에 너무 연연해하지 않는다. 우리는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으로 감사하고 이를 즐거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3연(13-19절), 회개의 척도, 우리의 세 가지 서원
첫째, 아직 범죄 가운데 있는 자에게 주의 도를 알린다(13-14).
둘째, 날마다 주의 의를 찬양하며 산다(15).
셋째, 하루하루의 삶이 곧 주께 드려지는 예배가 된다(16-17).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설교하였다.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이는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어느 특정인을 두고 하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는 증거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자로 살아야 한다. 본이 돼야 하고, 그리 찬송해야 한다.
죄는 결코 사적인 영역의 문제가 아니다. 각자 알아서 할 일이 아니다. 성경은 이에 일갈하신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오늘 시편의 진술도 같은 의미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 51:12).” 그리스도인으로 산다고 하면서 자원하는 심령은커녕 권하고 이끌어도 마지못해 끌려오는 신자로 살려니까 여러 해를 믿고도 그 믿음이 성장하지 못한다. 성령이 더하시는 구원의 기쁨을 알지 못한다. 늘 사는 데 급급하여 그럴 겨를이 없다. 누가 물으면 ‘팔자 좋은 소리’로 치부하고는 그저 남들처럼 먹고 사는 문제로 하루의 전부를 소진한다. 나름 노후대책은 세우면서 사후대책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 안에 자원하는 심령이 없다면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이 활동을 멈춘 증거다. 성령은 결코 죄와 함께 거하실 수 없다. 성령을 소멸하는 일은 자신의 죄성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다. 이에 날마다 죄를 고백하고 주께 용서를 구하는 삶이 곧 주의 살아계심을 찬양하는 삶이다.
일찍이 지혜자는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곧 우리가 주께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 은혜다. 심령이 가난한 자요, 온유한 자요, 애통하는 자란 바로 주 앞에 자복하는 자로 사는 것이다. 오늘 시편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51:4).” 곧 주께 사함을 받고 주께 인정을 받는 것이 귀하다. 이는 남들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저들의 판단에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고로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5).”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이를 인정하고 작은 것에도 주께 감사하는 삶이 곧 우리가 날마다 드리는 예배다. 감사할 게 없다면 예배가 없는 삶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 호소하는 것이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시 51:6).” 다윗은 우리에게 이르기를 주께 통회하라는 것이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34:18).” 즉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 사느라 힘에 겨운 신세한탄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죄가 정결케 되기를 구하여야 한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 이는 오직 주의 보혈로만이 씻음을 받을 수 있다. 아니면 죄의 값을 그대로 물면서 살아야 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죽어라 하고 살다, 이내 죽음에 이를 뿐인 인생에서 우리가 받은 은혜는 그런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먼저는 죄를 회개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다면 오늘 시편에서 일컫는 세 가지 서원을 이행하는 것은 바로 참된 회개와 함께 찬양과 경배가 날마다 드려지는 약속이다.
세 가지 서원
첫째, 주의 도-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삶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시 51:13).”
둘째, 주의 의-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삶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14).”
셋째, 주를 찬양-하나님의 자랑이 되는 삶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15).”
나오는 말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11).” 언제나 다윗의 변증은 주께서 모두 이루신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언약은 무엇인가?
첫째, 때를 다라 돕는 은혜를 체험하며 산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실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이와 같은 은혜를 수시로 체험하지 못한다면 이는 어딘가 문제가 있는 성도다. 남들에게는 사소하고 보잘것없는 것이고, 우연한 일로 여기지겠지만 우리는 범사에 주를 인정함으로 매순간이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감사로 채워진다. 이러한 간증이 얼마나 되는지, 만일 적으면 적을수록 저의 신앙은 믿기는 믿는데 황량하기만 할 따름이다.
둘째,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는 믿음으로 누리고 실상은 보지 못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성숙해져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29).” 곧 우리로 그리스도의 장성하신 믿음의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는 성화구원의 여정이 바로 이것이다. 성경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그럼에도 믿음을 잃지 않고 소망 중에 그 믿음을 지켰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 그럼에도 저들이 흔들리지 않은 것은,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40).” 이를 확신하는 까닭은, 하나님은 선하시다. 어떠하든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다.
마지막으로 나오미라는 여인을 소개하며 오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다. 나오미의 이름의 뜻은 희락이다. 저가 살던 땅에 기근이 들었다. 그러자 남편을 따라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으로 갔다. 나름 궁여지책, 살려고 간 것이다. 그런데 일찍 남편은 죽고 그곳에서의 10년 세월동안 두 아들마저 죽었다. 남은 것은 나오미와 두 자부, 곧 세 과부들이었다. 나오미는 빈털터리가 되어 고국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것도 모압 땅에서 얻은 둘째 며느리, 이방 여인 룻이 전부였다. 참으로 기구한 팔자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 누가 저더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해줄 수 있겠나? 그런데 훗날 며느리 룻의 남편으로 보아스를 얻었다. 저들 사이에서 오벳을 낳았다. 저는 훗날 다윗의 증조부가 된다. 곧 나오미는 왕족을 잇는 혈통의 주역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구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다윗의 계통을 잇는 영광스런 존재가 되었다.
이처럼 우리의 이야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고,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오늘의 모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이다(시 30:11). 우리의 눈물은 결코 눈물로 그냥 마를 눈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눈물로 뿌린 씨앗은 반드시 기쁨으로 곡식 단을 거둘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126: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