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로마서 5:5-6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편 39:7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주께 의지함으로 그것이 주의 영광이 됨을 알게 하신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요 17:14).” 이를 우리로 알고 그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신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 1:10).” 곧 우리로 우리 안에서 주의 역사하심을 놀라게 하신다. 가령 어제는 교회가 세든 주인이 건너와 곧 있을 공사에 대해, 자신의 사업에 대해, 이런저런 말끝에 5월에는 월세 20만원을 덜 내도록 하였다. 말이라도 전부 안 받고 싶지만 앞으로의 일정에 자신도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서… 하며 말끝을 흐렸다. 우리는 가만있는데 교회가 교회됨을 저들로 알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그저 되어지는 일의 기이함에 감사뿐이다.
안 믿는 이의 마음을 움직여 일하시는 것을 나는 수없이 보았다. 뜬금없이 누가 얼마의 학비를 보내겠다며 계좌번호를 물을 때의 당혹스러움부터, 그때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로 우리를 놀라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런가 하면 우리 안에 두시는 소망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줄 알게 하신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는 소망이 없이는 기다릴 수 없어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바라는 믿음으로만이 받을 수 있는 복음의 진수다. 이는 먼저 우리 안의 ‘하나님과 화평’의 증거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5:1).” 어떠하든지 나로 하나님과 척을 두게 하지 않는 믿음으로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함으로 환난도 즐거워하게 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 누군들 환난이 좋을 리 없으나 그럼에도 즐거워하는 것은 그것으로 우리는 인내를 배운다. 인내는 단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숱하게 반복되는 연마를 통해 몸에 배는 습득과 같다. 마치 연단으로 제련소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지 우리는 안다. 더욱 두드리고 패고 더욱 뜨거운 풀무에서 자신을 태웠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 찬물에 담가지면서 모양을 갖춰간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하는 러시아의 오스트롭스키의 혁명소설처럼 우리의 신앙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그와 같은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줄 앎으로 환난 중에서도 즐거워하는 것이다. 소망이 무언가?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을 다 알 수 없어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내재된 끝없는 바람과 실상을 붙들고 늘어져 놓지 않는 것이다. 이는 마치 먹잇감을 물고 사투를 벌이며 결코 빼앗기지 않으려는 사자와 같은 결의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저들의 필사적인 사투는 굶주림과 배고픔의 필연인 것처럼 언제나 나의 약함으로 나는 주의 이름을 붙들고 으르렁거리며 이를 빼앗기지 않으려 기를 쓴다. 가령 이번 주일에는 아이엄마가 올지 모르고 곧 있어 아이의조부가 거동이 어지간하면 함께 올 것이란 언질을 듣고부터 나의 연약함은 나를 못살게 군다. 두려움이 앞서고 불안이 인다. 물론 와야 오는 것이고 보내셔야 오는 것이겠으나 그러하면 또한 감당할 수 있는 힘도 더하실 것을 잘 알면서도… 이걸 아는 것과 몸으로나 마음으로 준비하는 일은 다르다. 그래서 설교 본문을 따로 준비한 것은 아닌데, 맞춤하니 주께서 예비하셨는가?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이에게 전하여주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며 원고 작성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속은 울렁거리고 마음은 두근거리며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친다. 괜한 긴장이 나를 풀무에 담갔다가 두들겨 패 찬물에 담그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 되는 것 같다. 전에 손위 처남과 장모가 오셔서 같이 예배를 드리면서도 한동안 겪었던 몸의 증상이다. 이는 굶주림과 배고픔이 사자들로 하여금 필사적이게 만든 것과 같다.
나의 사투는 나의 약함이다. 누가 그 소식을 알리며 내 처지를 아니까, 어떡해? 하고 염려 섞인 말을 더하는데 나도 모르게 불쑥, 뭘 어떡해? 신경안정제를 때려 먹고서라도 하면 되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할 만하니까 하게 하신다. 인생도 그러하지만 교회는 더욱이 그러그러하였다. 어제도 저이가 다녀가고 잠시 동안 풋, 하고 웃었다. 남들 같으면 나가라 하고 여기도 두 개 내지 세 칸을 더 들여 공사하는 길에 작은 평수의 소호사무실을 내면 더 수익이 날 텐데… 오히려 더 계시라, 나가지 마시라, 하며 공사로 폐를 끼치게 돼 미안하다며 월세까지 깎아주는 일이 벌어졌으니!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교회도 인생도, 내 이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로 사는 일이 아니었다. 어느 것 하나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다. 이에 우리로 소망하게 하신다. 곧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어찌 내게 이와 같은 사명과 위로와 ‘부은 바 되는 마음’을 주시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늘 반복하여 느끼는 일이지만 왜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시고 이처럼 귀히 여기시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이라니! 왜 나 같은 것에게? 그러니 오늘 시편의 함축된 한 어절의 고백이 내 것이 된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것이고, 한 팔이 있고 한 다리가 있으니 그것으로 딛고 걸으며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데까지 하면 된다. 나는 종종 이와 같이 주문을 외듯 처한 한 날을 감당한다. 보면 늘 우리의 본성은 흙탕물만 일구고 있지 않던가? “너희가 좋은 꼴을 먹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꼴을 발로 밟았느냐 너희가 맑은 물을 마시는 것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어찌하여 남은 물을 발로 더럽혔느냐?” 하고 주가 물으실 때 뜨끔하다, “나의 양은 너희 발로 밟은 것을 먹으며 너희 발로 더럽힌 것을 마시는도다 하셨느니라.” 하실 때에 안도한다(겔 34:18-19). 그것은 나와 나의 싸움이기도 하다. 머리로 알고 의지로 다짐하는 것과 달리 몸은 또 저 혼자 앞서서 염려하고 근심하느라 여러 증상을 내보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우리로 주를 더욱 신뢰하게 하시는가보다.
도저히 사랑 받을 수 없는, 자격이 안 되는 나를 마주하게 하신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그래서도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시는 것이었으니,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9:5).” 곧 나로 하여금 내가 하는 게 아닌 것을 알게 하시려고, 나의 어려움을 동원하신다. 뜬금없이 주인이 건너와 그런저런 설명을 해주는 것도 고마운데 마음으로 물질적으로나 그처럼 신경을 써준다는 게, 솔직히 날 보고 해줄 일인가? 저의 말처럼 스스로 수익을 내야 하는 장사꾼인데… 그러니 그를 움직이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하는 문제는 ‘그래도 할래?’ 하면서 ‘포기해도 돼!’ 하는 작은 속삭임과 같이 오는 것 같다. 이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데, 처음 글방에서 교회로 예배를 시작할 때 그때는 아내와 나 둘뿐이었다. 아이들이 우르르 왔다가도 어느 주일에는 한 명도 안 온다. 그럼 아내만 앉혀 두고 예배를 하다, 다 늦어서야 한 아이가 오면 그게 그렇게 반가워서, ‘다시 시작!’ 하고 열두 시가 다 돼, 다 끝나서 다시 예배를 시작하곤 하기를 수차례는 된다. 그러고 돌아올 때면 한심하기도 하고, 공연히 뿔딱지도 나고, 그러니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하는 마음이 치받아 올라오면서 속은 볶이는데…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게 은혜였다. 목사 안수를 받을 때도 논술에서 한 번 떨어지고, 인성검사에서 또 한 번 떨어지고, 그럴 때마다 면접은 보는데 그때 매번 같은 면접관으로 들어오시던 나이 지긋한 목사는 세 번째 때 물었다. 다음에 또 하실 겁니까? 그런데 나는 별로 고민할 게 없었다. 네! 왜냐하면 내겐 이제 남은 길이 없었다. 그래서 오히려 저들더러 나를 떨어뜨리는 것도 괜찮다고 위로(?)하였다. 그럼 나는 계속 응시할 뿐이다.
정해진 길, 가야 하는 길에는 이정표가 필요 없다. 다른 길을 알리는 이정표가 여럿 눈에 띈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저에게 그 고난이 없었다면 저런 고백이 나왔을까? 나는 가끔 이와 같은 막다른 골목을 사랑한다. 나이 들고, 병들고, 기력이 없고, 돈도 없고, 더는 의지할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때론 매우 홀가분하게 여긴다. 물론 좋다 나쁘다의 의미가 아니다. 길 위에서는 달려가는 것뿐이다. 이는 주가 우리에게 놓으신 주의 길이기도 하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러니 내가 뭐라고! 내가 뭘 했다고! 하는 따위의 말은 쓸모가 없다.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 그러니 이 놀라운 내 안의 즐거움이 세상 그 어떤 어려움과 고달픔과 역경도 아랑곳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 내가 나를 믿는다는 소리가 결코 아니다. 나야말로 나는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시 39:1).” 나로 나를 이기지 못하게 하셨음으로 나는 나 때문에도 주의 도우심만을 바란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5).” 그러하여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부디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12).” 나는 주께 아뢰고 구하고 의뢰할 뿐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