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로마서 6:14-15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40:4
나의 죄가 얼마나 끔찍한가를 아는 만큼 주의 은혜가 귀하다. 내가 악함을 알기 전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했다. 오늘 본문은 이를 누누이 되풀이 하고 있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4-15).”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하고 바라고 느끼고 감사하는 만큼 나의 죄악됨을 한탄하게 된다. 나의 비애는 나의 죄를 가벼이 여기던 일이다. 나를 알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알 수 없고, 나의 허물을 조금 인정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조금 아는 정도이다. 감사가 메마르는 까닭은 별로 감사할 좋은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전히 나를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가증하고 한심하고 죄악덩어리로 살고 있는지를 알수록 그리스도의 사랑은 크고, 내게 베푸신 은혜는 엄청나다는 것을 안다.
이를 시편의 찬양으로 들어보면,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40:4).” 우리의 복은 주를 의지하는 것이다. 사람을 미더워하는 것은 그 안에 우상화된 미덕에 홀린 것과 같다. 이를 교리적으로 이해하면 칭의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로운 것은 의롭다 하시는 이의 의로움으로서의 의지 우리 자체의 의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시편은 호소한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시 40:11).” 주의 긍휼을 거두면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이 자신만 자기를 부끄러워할 줄을 모른다. 왜 시인은 낙심할까?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12).” 그러므로 나의 죄가 어떠한가를 알면 알수록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해결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나를 심각하게 여길 줄 아는 것은 죄의 심각성을 안다는 소리로 그 결말을 아는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주를 찾는 자는 다 주 안에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16).” 하게 하셔야 할 수 있는 게 기쁨이고 감사이고 평안이다. 누구를 위로하다보면 아무리 뭐라 해도 소용이 없다. 어떤 아이와 동성애에 대해 뭐라 말이 붙었을 때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는 것은 저거 몰라서가 아니라 들을 수가 없어서다. 죄에 대해, 구원에 대해서는 말로 어찌 설명한다고 해서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예전의 내가 그랬듯이 오늘의 누구도 어쩔 수 없다. 하려던 말을 멈추고 저를 주께 아뢰는 것은 주의 긍휼과 자비하심만이 ‘우리의 알지 못함’을 용서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명료하고 청아한 복음이다. 군더더기가 없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다. 영육간의 죽음뿐이다. 죽은 것을 어른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런 나를 주 안에서 살리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사다. 나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을 얻게 하셨다.
고로 죄에 대해 아는 것이 구원을 아는 일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1-2).” 죄에 대해 죽을 것인지 의에 대해 죽을 것인지를 확실히 해야 한다. 그게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소행을 살피면 자신이 받은 은혜도 데면데면할 따름인 것이다. 그저 그런 은혜는 없다. 사무쳐 눈물이 저절로 나오는 까닭은 내가 참 너무 어리석었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 나는 그 정도는 아니야, 할 죄는 없다. 어제는 주말 오전답게 고요하였고, 일찍 교회에 올라가 그와 같은 나를 돌아보며 울컥울컥하였다. 어쩜 그러고 살았나, 싶은 게 떠오르면 떠오르는 만큼 그런 나를 마다하지 않고 사랑하신 주의 사랑이 그야말로 감지덕지하다. 말 그대로 분에 넘친다. 매우 고맙게 여긴다. 감사하다는 말로는 갚을 길이 없다.
악은 그저 개념이 아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곧 주의 사랑은 행함으로 증명이 되는데, 이는 결코 인위적인 덕이 아니다. 봉사를 하네, 헌신을 하네,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네’ 하는 따위의 선행 정도가 아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 재갈을 물린다는 것은, 말을 부리기 위해 주둥이에 끼우는 나무나 쇠로 만든 도구다. 즉 알아서 하게 두는 자신보다 허망한 일은 없다. 재갈 물리지 않은 말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이 멋대로 굴기 일쑤다. 본디 순한 짐승이란 없다. 그럴 수밖에 없음으로 그럴 뿐이다. 나의 경건은 나로 내 혀에 재갈 물리고 마음을 옭아맬 때 경건하다. 아니면 헛것이다. 좋을 때야 누군들 순하지 않고 덕이 처벌처벌 넘쳐나지 않겠나?
오늘 본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하고 되묻는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예전의 나는 죽고 새사람으로의 나로 사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3, 4).” 예전에 내가 죽었다 하는 것은 예전의 내가 즐기던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소리다. 나는 그것이 어떤 게 있을까? 턱을 괴로 가만히 적어보는 것도 유익하다. 더는 친구를 찾아 위로를 얻으려 같이 어울리며 세상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그때 즐기던 오락을 끊었다. 사람을 따르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적도 없지만 애써 동지도 없다. 이제 내 곁의 사람은 사람이 아닌 성도다. 서로 어찌 사는가, 무슨 일을 하고 어디서 얼마나 어쩌나저쩌고 하는 따위의 말에는 별로 흥미가 없다. 서로의 삶에서, 그 일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있다. 주께 향한 고백이 귀에 들어온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5).” 이는 예전의 친구 개념이 아니다. 우리가 서로 위하고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은 주의 은혜 때문이다. 내가 저의 이런저런 사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저와 함께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게 아닌 친구란 위선과 부족함과 자기 살 궁리로 혹시나, 하는 억지와 욕망과 허세뿐이다. 그래서 친구가 없는 거라 하면 괜찮다. 가령 누가 있는데 저는 주변의 모든 이의 대소사를 다 챙기며 다닌다. 그러니 이런저런 연계된 관계가 엉킨 실타래처럼 많다. 숱한 인친척은 물론 무슨 동문회에 회사 동기들까지… 나는 저가 믿는 자로 살면서 너무 많은 사람 관계에 대해 우려한다. 그러면 누구는 나의 결여된 사회성을 운운한다. 그러니 같은 곳을 바라볼 수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사람 관계, 별 거 없다. 오늘 시편은 그에 따른 억울함을 호소한다. “내 생명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는 다 수치와 낭패를 당하게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는 다 물러가 욕을 당하게 하소서(시 40:14).” 실제 저들은 늘 곁에서 같이 시작한 동료이고 동기들이다. 그런데 정작 “나를 향하여 하하 하하 하며 조소하는 자들이 자기 수치로 말미암아 놀라게 하소서(15).”
가령 나는 누구를 그리워한다. 함께 어울리던 시절을 떠올리면 눈물이 저절로 고일 정도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있다. 어떤 추억, 이를 부추기는 노래를 들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감정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거짓된지를 안다. 이를 바울의 설교에서 다시 정리하면,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그러니까! 그 옛 동무들과 나는 무얼 하고 즐거워하였던가? 그게 다 사람 사는 거지! 하는 순간 그리스도의 사랑은 퇴색한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그런 호사를 누리라는 게 아니다. 그러니 사람 참, 그렇더라! 하고 사람에 대해 깨달았다고 해서 저절로 끊거나 고쳐질 수 있는 게 아니다. 결국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이번에 오스카 조연상을 탄 여배우가 언젠가 인터뷰에서 자기 삶을 늘 애쓰는 삶으로 비유하는 소리를 들었다. 연기자로서뿐 아니라 한 여자로 사람으로 사는 저의 인생 자체가 애쓰는 인생이었다는 자찬이었다. 이는 크게 공감이 가고 귀감도 되는 소리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니까 하는 소리다.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8-9).” 사망이 더는 나를 주장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서 더는 애쓴다고 애써서 될 일이 아니라면 남은 것은 하나다. 주를 신뢰하고 주께 모두 의탁하는 것! 이와 상충하는 바가 애씀이다. 목사니까 애써야 하고 주의 자녀니까 내가 애써야 하는 게 있다면 그건 여전히 내 안에 두고 사는 덕행으로 나를 우상화하려는 거짓된 믿음이다. 나의 애씀은 그런 게 아니다. 물려진 재갈에 순응하는 일이다. 순응은 순종보다 격이 떨어지기는 하나 받아들임으로 복종시켜 순종에 이른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2-13).”
누가 로마서를 성경 속의 성경이라 표현한 것처럼 한 구절 한 구절이 참 깊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14권짜리 로마서 강해 전집을 사서 읽고 싶은데, 너무 비싸서 엄두를 내지 못하고 미루고 있다. 주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다. 율법을 옳다 하는 것은 내가 받은 은혜가 그것을 알면 알수록 참으로 크기 때문이다. 내가 죄인인 것과 주의 사랑하심은 정비례한다. 어제는 존 번연의 책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중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본질에 대한 지식’ 부분을 다시 읽으며 나의 나 된 것을 돌아보았다. 요즘은 다시 읽는 책읽기의 맛이 깊이가 있다. 이를 오늘 시편의 노래로 표현하면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40:4).” 그렇지! 내가 주를 의지하는 만큼 나도 믿음의 앞선 성도들처럼 묵상에 묵상을 더해 재갈 물려야 할 필요를 느낀다. 내가 얼마나 구제불능인가! 이를 아는 만큼씩 주의 사랑하심이 확장한다.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