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10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시편 44:8
우리는 늘 낯선 길을 간다. 모든 게 처음이다. 그야말로 ‘어쩌다 어른’이 되었다. 어릴 때는 어려서 어려움을 겪다 나이 들어서는 나이 든 자로 사는 일에 처음이라,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수 3:4).” 우리가 주를 의지하는 데는 몇 발짝 앞서 걷는 자의 발자취를 따름이다. 저의 가는 길이 이정표가 되듯이 나의 가는 길도 내 뒤에 따라오는 이의 흔적이 된다.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아 1:8).” 때론 목자 되신 이의 발길을 좇기 어렵다. 그럴 때 곁을 나란히 걷는 이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할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엡 3:20).” 무한 의지를 하는 것이다. 이는 때로 무모한 씨름 같을 때가 있다. 그럼에도 우리로 시작하게 하신 일을 끝까지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된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히 3:14).”
이 길이 맞나? 싶을 때 내 곁을 같이 걷는 이와 나란히 함으로 그 길을 가늠하기도 한다. 그러할 때 누구도 없이 혼자 걷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는데 그때도 결코 혼자가 아니다. 마치 동방에서부터 길을 인도하는 빛처럼 주께서 내 곁을 비추신다. 그렇게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주를 향하여 가는 길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히 11:33-34). 눈부신 오월의 푸르른 날에 나는 조금 서글펐고 어디든 가고 싶은 마음으로도 공연히 울적하기도 하였다. 그런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나의 약함이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바라게 하였다. 나의 서글픔이 주를 바라며 나를 돌아보게 하였다.
인생은 덧없음에 대하여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6-7).” 그러니 나의 의지의 문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란 주신 바, 있는 날에 감사와 최선의 날들로 사는 것이다. 믿음은 엄연한 선물로 값없이 주시는 것이지만 주신 바, 이를 받아들임으로 나의 의지가 동참한 것이다. 감정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의지는 가능하다. 믿음은 통제 불능의 지극히 수동적인 이끌림이 아니다. 믿기로 하여야 하고, 이를 위해 시간을 내고 마음을 두고 장소를 구별하며 마음을 정하고 뜻을 같이 하는 일은 의지의 문제로 나의 동참이다.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히 13:21).” 행하게 하시는 이가 우리 안에서 행하시기를 원한다.
어제는 리처드 백스터의 <참된 목자>(CH북스)를 읽고 오후에는 가만히 집에 있었다. 어디라도 가고 싶다는 마음과 그럴 수 없는 여건과 싸우다가 그것까지도 내 몫으로 두고 씨름할 게 없다는 생각에 그만두었다. 여타 종교는 깨달음으로이고 우리 기독교는 이끄심으로다. 둘 다 의지로 자신의 선택에 달렸다. 득도를 하듯 어느 경지에 올라 구도자로 사는 종교인이 있고, 증거 없고 뚜렷한 실상도 없지만 바라는 중에 거하는 보이지 않는 증거의 삶으로도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인정한다. 이는 내 안의 억눌린 마음까지도 주의 것으로 두고 주께 의뢰한다. 그러할 때, 때를 따라 돕는 은혜의 손길이 있고,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럴 때면 때에 맞는 말이 있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 15:23).” 그럴 때 가장 서글픈 게 무엇이겠나?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25).” 하는 지혜자의 말처럼 은혜를 입은 자이나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수준 낮은 은혜에 머물러 자신의 상태에 대한 오해가 생겨나고, 부패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복음의 영광을 가리며, 그럼에도 자기 자아를 죽일 마음을 조금도 먹지 못하는 무리에게는 위험이 노출된다. 무엇보다 하나님으로 얻는 기쁨이 줄어간다. 지혜의 맛을 상실함으로 말씀을 사모하기를 더디게 한다. 섬김은 사라지고, 모든 일에서 주께 영광 돌리는 데 인색하다. 어제는 마치 이런 나를 돌아보는 기회였다고 할까? 여러 갈래의 마음이 저들끼리 서로 갈려 분절되었으나 나는 가만히 있어 그러는 나 역시 내버려두었다. 요즘은 가끔 유체이탈 같이 그러는 나의 극성까지도 내버려둔다. 누구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듯이 나 역시 나의 마음 같지가 않다. 그러니 그것까지도 주께 의뢰하는 것이다.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벧전 3:2).” 늘 당하고도 모른다. 감정은 수시로 나대는 데 이를 일일이 거론하고 참견하여 건사할 수는 없다. 내버려둠이란 그것까지도 내 것이 아닌 것으로 주께 맡기는 일, 이와 같은 의지로 나는 가만히 있었다.
무던함이란 이런저런 생각에 시달리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러면서도 맡은 바, 맡기신 이의 뜻을 따라 사는 일이다. 달갑지 않고 때론 서러운 일이 된다 해도,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두려워 할 줄 아는 것은 이를 주관하시는 이에 대한 존중이고 저를 의뢰함이다. 나는 오늘 말씀을 그리 받는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믿음이 우선인데 눈에 안 보이고 증명할 수도 없는 믿음은 입으로 시인함으로 증거된다. 하여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시 44:8).” 자랑은 곧 감사의 찬양이다.
찬양은 이를 종일 자랑함이다. 흔히 입만 열면 저가 하는 말의 실체다. 이를 시인은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6).” 내 능력,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의지하지 않는다. 그것이 활로 칼로 나를 증명하는 것이겠으나 이것들이 나를 구원할 수 없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7).” 곧 우리 주만이 오늘의 나를 감당하신다. 즉 나를 책임지시고 보살피신다. 그러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오늘 바울의 증거는 명료하다. 우리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하심이 곧 구원의 증거다. 어려우면 어려워서 즐거우면 즐거워서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4-15).” 이 모든 서로 상관관계가 있어 어느 것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3).” 공연히 애쓰지 않는다. 주시는 대로 주신 이의 뜻을 구하며 산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8).” 말씀으로다. 문득 어떤 기억이 그리움으로 나를 몸서리치게 할 때도 있지만 감정은 감정대로 내버려둠으로써 나를 이겨나간다. 그렇게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9).” 나의 한 날에서 이러한 말씀으로 주의 뜻을 구한다.
이는 곧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 이와 같은 증명이 늘 나의 삶을 주도하시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 나로 들어 믿게 하신 이가 또한 이 믿음으로 살게도 하실 것임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시 44:5).” 그러할 때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