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전봉석 2021. 5. 7. 05:53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로마서 11:29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시편 45:6

 

 

모든 게 멀게만 느껴진다. 지난날이 한 뼘인데 잡힐 듯 잡히지를 않는다. 감정은 저 혼자 요동치고 마음은 덩달아 변덕스럽다. 흔히 남자들도 갱년기가 온다는데 그런가, 싶은 생각이다.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나를 싫어하는 것 같고 나 때문에 어려워하나 싶고 괜한 것으로 슬픔이 몰려들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은 술렁거린다. 되는 게 하나도 없고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 같다. 공연히 낚싯대를 팔아서… 서글퍼하다 혼자 후회하고 갑자기 누구 생각에 와락, 눈물이 글썽거리고는 한다. 가정예배를 드리기 전에 기도제목으로 잠시 가족들 앞에 고백하였다. 평소에도 감정기복이 심하고 변덕스러운 사람이라, 말하기가 민망하여 쉽지 않았다. 눈 딱 감고 주의 도우심을 구하는 심정으로 실토하였다. 그런 거 보면 요즘 부쩍 목사가 된 것이 내게 그저 은혜란 생각을 자주한다. 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오롯이 나의 영혼을 도우시려 이 자리에 두신 게 맞다. 여러 감정이 뒤섞였는데도 설교원고를 작성해야 하고,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구와 통화를 해 위로를 해야 한다. 그러면서 내가 위로를 얻는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그렇지.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이면 안도한다. 날 목사로 부르시고 후회하시면 어쩌나. 나 같은 것을 여기까지 돌보셨는데 그 행하신 은사를 후회하시면 어쩌나. 한데 나의 주님은 후회하지 않으신다. 주의 보좌와 그의 나라는 영원하시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시 45:6).” 나를 사랑하시는 이 사랑이 한결같다. 나는 그야말로 자격도 안 되지만 그 이상으로 위하시고 도우시는 삶이었다. 돌아보면 나는 후회뿐이라. 가족들 앞에 갱년기 운운하며 요즘 나의 기복을 잠시 고백하고 기도를 부탁할 때, 나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런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전달되기를 바랐다. 어찌보면 빙충맞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지만 내가 언제 이루고자 하여 이룬 것이었던가?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롬 11:6).” 은혜였다. 다른 이유가 없다. 은혜 아니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였다.

 

오히려 나의 젊은 날, 가족들에게 덕은커녕 고약하고 변덕스런 모습만 보였던 것 같은데 그런 나를 이처럼 위하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32).”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산 증인은 나다. 벌써 죽어 마땅했을 나 같은 자를 오늘에까지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니,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 복음이 전파되고 은혜가 전하여지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풍성하신 지혜와 지식만이 올곧다. 나는 어제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 ‘도엑’이 곧 나였다는 데 이질적이지 않았다. 자신을 도모하는 일에 남을 음해하고 그 손에 피를 묻히는 일에도 거침이 없었으니. 이는 우리 안의 ‘도엑스러움’이 공존하는 것을 이사야의 여덟 가지 ‘화 있을진저’ 경고를 들어 증명하였다.

 

첫째는 끝도 없는 욕심이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요즘 다들 그러고 사는 일에 대하여 새삼스러울 게 없는데 우리는 모두 ‘도엑답다.’ 둘째는 스스로 위로함을 얻으려는 데 따른 것으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1).” 이는 셍덱쥐베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어느 혹성의 술주정뱅이의 고백을 연상시킨다. 저가 늘 술에 취하는 것은 술에서 깨면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어서이다. 스스로의 위로가 우리를 ‘어른아이’로 살게 하거나 ‘아이어른’으로 살게 하는 기형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셋째는 거짓이 거짓으로 더욱 단단해져 한 올 실이 수레 줄이 되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위선은 아집으로 빚어진 거죽이고 아집은 쥐고 놓지 못하는 거짓의 어쩔 수 없는 수레 같다. 단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이 회를 거듭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두께의 단단한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한다. 네 번째는 악에 동조하는 일에 대해서,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으로부터 악을 틈타 더 큰 악을 부른다.

 

다섯 번째는 합리적인 문화가 주는 오류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저마다 자신이 옳다 하며 이를 위해 상대를 공격한다. 저들끼리 모여 진영이 갈리고 시선이 나뉜다. 처음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때부터 오늘까지 스스로 명철하다 여기며 사는 세상이 되었다. 여섯째는 자아도취에 관하여,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술에 취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를 스스로 만들어 빚는다. 모의하고 조작하고 거짓을 참으로, 위선을 본심인 것처럼 꾸며 산다. 꾸미고 가꾸는 게 직업으로 세분화되어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며 사는 사회가 되었다. 멋이 돈이고 유행이 부를 축적한다. 일곱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취하려 드는 성공에 대하여,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10:2).” 아홉을 가진 사람이 하나를 가진 사람의 것을 취하여 열을 채우려한다. 불공평한 게 가진 자의 것으로 독점되는 세상에서 이를 활용하지 못하는 게 무능한 것이다. 여덟째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다.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5).” 그 결과는 진노의 막대기와 그 손의 몽둥이밖에 없다. ‘앗수르 사람’으로 지칭되는 내 안의 억하심정이 ‘도엑’이다.

 

그러니 얼마나 내적갈등이 심하던지. 이와 같은 설교원고를 작성하며 말씀 앞에 서야 하는데, 여전히 ‘도엑’으로 서는 나를 나는 어찌할 수 없어 신음하였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원망과 불평도 동시에 가지고 꿈틀거리는 것이다. 그러자니 내 속이 볶여 살 수가 있나? 아들이 뚱하니 말이 없는 것도, 딸애가 독립하고 싶어 하며 집을 지겨워하는 것 같이 여겨질 때도, 아내가 나를 성가셔하고 맡은 숙제처럼 여기는 것 같을 때도 내 안의 도엑은 나를 고발하며 나의 영혼을 도륙한다. 내가 나를 찌르고,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가족들을 대하면서도… 말씀을 준비해야 하고, 누구를 위로해야 하고, 특히 이번 주부터 교회가 세든 공간에 공사가 시작되는데 사장은 그 일로 굳이 자꾸 내게 보고하듯이 들락거리는 바람에, 저에게 보이는 나와 실제의 나는 괴리가 깊다. 들어주고 격려하고 위해서 기도하겠다, 하고 돌려보내고는 내 자신이 참으로 위선스러워서 주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나의 실체는 ‘도엑’인데 목사로 위로자로 누구를 대하고 섬겨야 하는 일이라니! 어제는 아이가 전화를 하는데 짜증스러워서 ‘거절’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그었다. 그래놓고는 또 마음이 좋지 않아서 곧 있어 문자를 하고 격려를 하다, 아 나의 이런 모순덩어리 삶을 어쩌면 좋을까 싶어 와락, 또 눈물이 솟구치기도 하였다. 내가 나를 건사하는 일이 도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곧 앗수르 사람이지 않던가?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시 52:2).” 말씀이 정곡으로 나를 찌르시면 나는 비명소리도 못 내고 주 앞에 고꾸라진다. 아,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64:3-4).”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다싶어 염치없지만 가정예배 때 모처럼 딸애까지 참석한 자리에서 ‘기도부탁’을 하였다. 말이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지, 나는 부끄럽고 민망하였다. 군더더기처럼 늘 그런 사람이라 새삼스럽지만… 하고 말을 떼며 ‘내가 갱년기인가 봐!’ 하고 요즘 이런저런 증상(?)을 말하고 ‘기도해줘!’ 하고 얼른 예배를 시작했다. 다들 멀뚱한 표정으로 또? 하는 시선인 것 같아 고개도 들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이른 새벽, 주 앞에 앉았을 때 터져 나오는 어떤 감동을 숨길 수가 없다. 그럴 수 있는, 그래도 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심이 은혜다. 두고두고 생각해도 내가 목사가 된 것은 날 위한 하나님의 처방이셨다! 그야말로 신의 한 수다. 뭐 어떤 대단한 일을 맡아 하고, 나라를 구하라고 주 앞에 세우신 게 아님을 안다. 오로지 날 위해,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목사라는 의복을 걸쳐 입히신 것은 꼼짝 못하게 하심인데,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롬 11:29).” 앗!

 

그러니 나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가! 이것이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6).” 그러니 참 뻔뻔하고 면구스럽기 짝이 없지만 그런 주제에도 부친의 일로 마음이 힘들 친구를 생각하고 주를 바란다. 아픈 아이의 객쩍은 말을 들어주고 응원한다. 안 믿는 사장의 이런저런 너스레를 받아내며 교회를 지킨다. 나는 종종 저가 왜 건너와서 저런 소릴 나에게 하나? 싶을 때 새삼 이곳이 주의 성전이고 하나님이 교회인 것을 되새긴다. 나 같은 게 뭐라고… 하는 자괴감이 들다가도 그런 나를 목사로 세우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에 새삼 감복할 따름이다. 자격은커녕 아무런 하는 일도 없는 주제인데… 아,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29).” 그러니 어찌 아니 감사한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32).” 그럼에도 나를 보호하시고 감싸주시며 내 편이 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은총에 대하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33).” 무엇으로 이를 갚을 수 있을까?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36).” 주 앞에 감사뿐이다.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20).”

 

두렵고 떨림으로 주를 사모함이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22).” 나로 주 안에 머물게 하시려고 하등에 쓸모도 자격도 없는 나를 이처럼 귀히 여기심이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29).” 이에 감사뿐.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지은 것을 말하리니 내 혀는 글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시 45:1).” 나의 남은 생이 주를 찬양하고 나의 혀로 그의 사랑을 증거하는 데만 사용되기를. 하면 “내가 왕의 이름을 만세에 기억하게 하리니 그러므로 만민이 왕을 영원히 찬송하리로다(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