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시편 52편/ 우리가 도엑이다

전봉석 2021. 5. 7. 10:21

 

210509 주일

 

 

시편 52편

우리가 도엑이다

 

 

들어가는 말

성경의 모든 인물과 사건과 배경은 ‘하나님의 이야기’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役事)하심이다.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은 오늘에 이르러 우리에게도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배경과 나를 둘러 싼 인물들이 궁극적으로 동일하게 하나님의 이야기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 오늘 우리가 나눌 시편의 정황은 수천 년 전, 다윗의 이야기인데 도엑이라 하는 자의 술수로 하나님이 어떻게 저들로 역사(役事) 하셨는가를 진술한다. 이때 모든 이야기에는 슬픔이 있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의 눈물을 결코 허투루 버려지지 않게 ‘주의 병’에 담으시고, 우리의 이야기가 잊히지 않게 ‘주의 책’에 낱낱이 기록하신다. 이를 다윗은 “나의 유리함(외롭게 떠도는 것)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 56:8).” 하고 아뢰었다.

 

모든 사건 사고들은 ‘이김은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당장은 실패한 것 같고 낙오된 것 같으나, 우리에게는 두 가지 은혜가 있으니, ‘때를 따라 돕는 은혜(히 4:16)’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은혜(롬 8:28)’가 그것이다.

 

성경은 약속하기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곧 우리는 ‘우리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이야기를 본다. 곧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20:12).” 이에 우리의 모든 이야기는 심판대 앞에서 들려질 것이며, 이를 의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값없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지만 받으려는 의지가 없이는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우리는 다른 종교와 같이 피상적이거나 막연하지 않다. 더욱이 신을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며 깨달음으로 도달하는 신앙이 아니다. 어쩌면 무모하게, 믿음으로 받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지식과 이성으로 수긍하는 것이라면 믿음은 그 지식과 이해를 뛰어넘는 불가항력적인 무엇이다. 곧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바란다는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것인데 마치 그 실상을 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증거다. 증거라 함은 그와 같은 실상을 성경의 기록으로 믿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아파트 청약을 붓는데, 모델하우스를 보고 아직 공터 위에 아무 것도 없는 실상을 바란다. 그 ‘바라는 실상’은 서류로 작성되는 계약서뿐이다. 그럼에도 이미 얻은 줄로 알고 기쁨으로 저축을 하고 앞으로 들어가 살 것을 준비하며 누린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이미 받은 자들과 같이 살았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본문 이해

 

1. 우리는 ‘도엑’이다.

다윗을 둘러싼 여러 군상 가운데 ‘도엑’이란 인물이 있다. 당시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놉 땅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과 그의 문하생 여든다섯 명의 선지자생도들 무리에 숨어 있었다. 이를 도엑이 알고 사울이 죽이고자 찾고 있는 다윗을 밀고하였다. 사울은 저들을 모조리 죽이라 명한다. 그러나 군사들은 주의 선지자들을 죽이는 일에 주저한다. 그러자 도엑에 나서서 모두를 도륙한다(삼상 22:6-23).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무의식적으로 한 발을 뺀다. 자신은 그 정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느 양부모가 아이를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했다. 이 끔찍한 사건에 모두가 공분한다. 미얀마 군부가 양민들을 학살하는 사실이 국제사회에 전해진다. 우리는 혀를 끌끌 차면서 정작 묵인하고 방조한다. 이에 시편은 그러한 도엑을 지칭하며 ‘포악한 자’로 부른다. 그리고 외친다. ‘도엑’이 바로 너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죄인이다. 자신은 아닌 듯 딴청을 부려도 우리 안에 도엑은 버젓이 건재하다. 다윗은 ‘사울에게 핍박받는 시’를 여덟 편 실었다(7, 34, 51, 54, 56, 57, 59, 142). 그와 같은 악의 공통점은 첫째, 악한 계획이 있다는 것과 둘째, 혀로 그 악을 서로 꾀하며 셋째, 간사한 혀는 언제든 필요하면 남을 해치는 데 거침이 없다. 이를 이사야의 진술로 정리하면,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사 59:7-8).” 그럼에도 우리는 무방한가? 그리 여긴다면 저의 구체적인 경고 여덟 가지를 살펴보고 들어가겠다.

 

2. 이사야가 경고하는 여덟 가지의 ‘화 있을진저’

 

첫째, 우리 안의 끝도 없는 욕심에 관하여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을… 능력만 된다면 집을 여러 채 가지고, 땅을 더 많이 소유하고, 이를 자기 것이라 구획하여 높은 담장을 치고 외따롭고 호화롭게 살고 싶다!

 

둘째, 스스로 위로를 삼으려고 ‘독주’를 마시는 일에 대하여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1).” 술 한 잔이 주는 위로가 그럴듯하다. 맥주 한 잔에 피로를 씻고, 와인 한 병에 기분 좋은 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도를 넘어 모든 범죄의 기저에는 음주로 인한 원인이 있다. 어쩌다 그리 된 게 아니라, 더욱 자극적인 ‘독주’를 찾는 게 우리의 특성이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술주정뱅이의 고백처럼 술이 깨면 부끄러워서 더욱 독한 술을 찾는다.

 

셋째, 거짓이 거짓을 엮어 단단해지는 것에 대하여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 한 올 거짓은 없다. 거짓은 또 다른 거짓으로 엮인다. 가짜 뉴스가 그럴듯한 것은 막말과 악담이 자극적인 거짓과 거짓으로 씨실과 날실로 엮인 까닭이다. 어느새 거짓으로 줄을 꼬아 수레를 끌 정도다. 한 올의 거짓은 ‘그럴 수 있지!’ 하는 묵인으로 두 올 세 올 거듭되면서 어느새 진실보다 거짓은 더 합리적인 게 된다.

 

넷째, 악담과 뒷담이 동조하는 음해에 대하여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0).” 페미니즘이나 성소수자를 위한 지지와 갈등은 논리나 판단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서 오늘 날 우리 사회는 느닷없이 ‘너는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 최선이 아닌 차선을 최선으로 삼고, 차선은 차차선을 ‘괜찮다, 괜찮다’ 하면서 더는 죄를 죄로 판단하지 못하고 ‘틀린 것’을 ‘다른 것’으로 둔갑시켜 ‘네 잘못이 아니야!’ 위로하면서 ‘너는 아픈 거야!’ 하고 서로를 허용한다.

 

다섯째, 합리적인 선택에 매몰되는 사회에 대하여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엄연히 하나님의 적은 사탄이 아니다. 사탄은 죄에 빠진 가련한 천사일뿐이다. 죄는 사탄보다 악하다. 죄란,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것이다. 자신감이고 신념이다. 자기주도적인 선택이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지 않는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하는 사탄의 꾐에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언약을 파기했다. 그 결과 자기의 주인이 자신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이처럼 개인의 선택과 개인의 행복추구권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여섯째,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들에 대하여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2).” 술에 대한 언급은 앞서도 지적했듯이 단순히 지시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여기서 그 독주를 찾는 정도가 아니라, 잘 빚는 것으로 확대하면 자기만족과 자아도취에 빠진 것이다. ‘독주를 잘 빚는 자’란 자기애가 강하고 자존감이 높다. 현대사회에 걸맞는 인물이다. ‘몸짱’을 만들고, 환갑진갑이 지나도 이팔청춘을 외친다. 이에 바울은 역설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곧 우리는 겉사람으로 끌려다니는 사람들이 아니다. 새로워지는 속사람을 겸비하여 이를 주의하는 사람들이다. 새로워질 속사람이 있는 것이 성도이고 그리스도인이다.

 

일곱째, 목적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것에 대하여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10:2).” 부자가 되는 일은 일종의 파이싸움이다. 더 많이 가진 자가 더 많이 누린다. 아홉에서 하나를 채워 열이 되기까지 하나를 가진 자의 것도 빼앗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일러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잠 23:4).” 하지만 현실은 ‘불공평한 판결’도 ‘가난한 이의 권리’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면 얼마든지 착취하고 억압하여 독식한다.

 

여덟째,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에 대하여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5).” 우리가 우리 안에 ‘도엑’을 논하려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앗수르 사람’과 같이,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르는 모든 처사다. 우리 안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먹고 사는 데 급급하여 이를 위해서면 언제든 신앙도 팽개친다. 직장 상사의 지시가 강단에서 목사의 설교보다 우선하고, 조직의 관례와 관습이 하나님의 계명보다 무섭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당장 갚아야 하는 이자와 원리금 상환이 우선이다. 주일은 낭만적인 종교 활동이 되었다. 기호나 취향의 하나로 기독교면 족하다. 하나님의 분노는 와 닿지 않는다.

 

본문이해

 

우리의 ‘도엑스러운’ 아니 ‘앗수르 사람’과 다를 게 없는 죄의 속성을 다루고자 하여 이사야의 경고를 들었다. 이를 통해 오늘 시편이 제시하는 우리의 속성을 들여다봐야 한다. 오늘 시편은 두 단락으로 나누었다. 1연은 1절에서 5절로, ‘도엑의 밀고’를 조명하고, 2연은 6절에서 9절로 ‘도엑의 멸망’을 다룬다

 

1연(1-5절), 도엑의 밀고: 악한 계획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한 경고.

“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시 52:1).”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포학한 자’는 자신을 괜찮다고 여기는 특성이 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하고 성경이 지적하는데도, 어느 재벌의 엄청난 기부나 어떤 종교지도자의 선행과 의로움으로 선을 도모한다. 그러나 우리의 특성은 앞서도 언급했듯이 언제든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다. 무죄한 피를 흘려서라도 자신의 생각을 옳다고 여긴다. 굳이 평강의 길을 원하지 않고, 정의를 외치지만 자신은 늘 예외로 둔다. 굽은 길이면 어떤가?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면 어떠한 편법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세상이 그렇다 해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자랑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시 103:17).” 이에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 곧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만이 답이다.

 

한데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시 52:2).” 우리는 기꺼이 욕설과 비난과 악담과 거짓말을 밥벌이로 삼는다. 이를 위해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64:3-4).” 돈이 출세고, 돈만 있으면 없던 교양도 생긴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혀를 금하고 그런 일에 관심을 끊는다.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 3:10-11).” 세 치 혀를 간수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다.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시 52:3-4).” 그러니 어쩐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믿음으로 사는 일이 급선무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 1:15).” 죄는 죄를 부르고 악은 악을 더한다. 거짓은 거짓을 더해 그 수레를 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은, “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셀라)(시 52:5).” 이를 두려운 마음으로 들을 수 있는 귀가 복이 있다. 그날이 온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2-3).”

 

2연(6-9절), 도엑의 멸망: 악인의 궁극적인 멸망과 의인의 형통함에 대한 노래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시 52:6-7).” 우리는 저들의 결말을 안다. 오늘 날 벌어지는 일련의 문화나 흥망성쇠의 결정이 누구에게 있는지 안다. 이를 알면 알수록 우리 안에도 이와 다를 바 없는 ‘도엑’이 도사리고 있고, ‘앗수르 사람’과 같은 본성이 내재함을 괴로워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이에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곧 우리는 ‘주의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라. 그 뿌리가 마르지 않고 형통함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이를 앎으로 더욱 사모한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시 52:9).”

 

오늘 다윗은 이 끔찍한 ‘도엑의 도발’로 괴로워하다 주의 선하심을 바라는 것이다. 이에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37:9).” 곧 우리의 믿음은 오직 하나뿐이다. 우리 자신이 ‘도엑’이다. ‘앗수르 사람’과 같이 우리 안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자신으로 인하여 우리는 피곤하다. 이에 우리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를 듣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받아들임으로 얻을 것인지, 미루거나 외면함으로 세상에서의 출세와 성공에 우선할 것인지…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주께 모두 내어맡김이다. 어떠하든 주만 바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이 모습 이대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이로써 주가 기뻐하신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나오는 말

 

두렵고 떨림으로 주를 사모함이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준엄하심을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준엄하심이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머물러 있으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자, 이제 어쩔 것인가? 내 안의 ‘도엑’으로 살 것인가? 남들 다 그러고 사는 세상에서 우리도 ‘앗수르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 것에 무덤덤해질 것인가?

 

오늘 시편은 들을 수 있는 우리에게 이른다.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시 52:6-7).” 곧 이 땅의 결말을 아는 것이다. 비록 세상은 그러하다 해도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8).” 이를 앞서 노래하기를,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 1:1-3). 고로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기를,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52: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