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로마서 12:3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시편 46:10
며칠째 평소보다 더 일찍 눈을 떴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5).” 마음에 막힌 담이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서먹해지고 사람과의 일도 멋쩍어진다. 이번 주간은 처음으로 어제 두루 통화를 하였다. 남자 갱년기를 우습게 보다 한 코 먹은 셈이다. 새벽마다 깨우시고 일찍 나를 도우시는데 나는 시무룩하였다. 그러다 이를 발설하고 주 앞에서 가족들에게 ‘말해버림’으로써 한 풀 놓여난 것이다. 멋쩍고 어색한 일이지만 기도를 부탁하며 나의 상태를 가족들 앞에 고백하자 비로소 막힌 담이 허물어진 것 같았다. 먼저는 주위를 둘러 볼 마음이 다시 생겨났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이는 별 거 아닌 듯 하나 내가 맡은 일 중의 하나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16).”
워낙에 그러고 살아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겼다. 자잘하게 이고 지는 우울감이나 어떤 서러움은 늘 그러려니 하고 치부하던 것이라 새삼스럽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한데 그것이 일순간 좁아져 혈관이 막힌 것처럼 순환이 어렵게 되자, 내가 먼저 죽겠는 거라. 내 안의 ‘도엑’은 건재하였다. 언제든 밀고하고 나서서 도륙도 서슴지 않는 무서운 죄성이었다. 그럼에도 유익하였던 것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말씀 앞에 앉는 습관과 억지로라도(?) 설교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성경을 뒤적이고 단어를 찾고 고르고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일은 큰 도움이었다. 오늘도 이처럼 일찍 눈을 떴을 때, 뒤척이며 공연히 더 잠을 청하려 애쓰지 않고 말씀 앞으로 앉을 수 있는, 나의 오래된 습관은 감사하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 오늘 바울 사도의 첫 구절을 나는 그리 읽는다. 나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게 막연한 설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이와 같이 구체적이며 실질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말씀 앞으로 나오고, 글을 쓰고 생각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며 도우심을 더듬을 수 있다는 게 곧 드려지는 영적 예배 그 실제였다.
모처럼 누구와 통화를 하다 저의 이런저런 사연을 듣고 위로하고 함께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감정에 이끌리면 걷잡을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 일쑤다. 회사 일로 어쩌다 사람 관계가 꼬였는데 얼마 전부터 그 일로 힘들어하더니 엊그제는 술을 먹고 들어왔다며… ‘그럴 수 있지’ 하고 여길 수 있는 사사로움이 우리의 영적 예배를 거슬리게 한다. 그럴 수 있는 게 그래도 되는 일은 아니다. 곁에 있는 이들이 너무들 힘들어하는 세월이다. 듣다 울다 서러워하는 이에게 나의 깊은 한숨은 주의 이름만 부를 따름이다. 여하튼 이번 주간은 어제나 돼서 밀린 숙제를 하듯 한꺼번에 통화를 할 수 있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 남들처럼, 남들도 그렇다는 게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다. 우리는 엄연히 구별된 자였다.
분명한 의지를 주께 내어드려야 한다. 믿는 자로 여느 사람들과 같은 위로와 처신과 마음가짐으로는 드려질 영적 예배가 없다. 교회는 나가고 여러 활동은 원활하게 한다 해도, 이번에 새삼 느낀 일이지만 겉과 속은 다른 것이다. 멀쩡한 ‘도엑’이다. 누가 저의 속에 그와 같은 악이 존재할 줄 알았겠나? 설교원고를 작성하며 내가 도엑이고 언제든지 내가 ‘앗수르의 사람’과 다를 게 없는 죄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 다다랐다. 억하심정이라고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하는 것인지 본인도 모르면서 마음 속 깊이 도사리고 있던 어떤 감정에 의해 뒤집어지는 마음을 일컫는다. 내재된 억눌린 감정이다. 없을 수 없는 모든 사람의 숨은 ‘도엑’이다. 이렇듯 지나가고 말지, 또 연거푸 괴롭힐지는 알 수 없으나 먼저는 나의 됨됨이를 주께 고하고 이를 알려 기도를 부탁하는 일은 좋은 모색이다. 거기에 평소의 습관이 한 몫을 했다. 마음이 어쩌든지 정해진 시간과 동선을 따라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늘어지는 기분을 일으키는 힘이 된다. 특히 새벽에 이처럼 주 앞에 앉을 수 있는 습관은 참 좋은 훈련이기도 하다.
이러한 우리의 수고와 선택은 하나님께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 내가 스스로 하려는 데에는 어김없이 거슬리는 게 있다. 그때그때 기분 따라 또는 몸의 상태에 따라 변하는 게 사람이라, 싫든 좋든 해야 할 것을 행하는 게 좋은 일이었다. 무던하다는 것은 일찍이 믿음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된다. 아브라함은 어찌 가던 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보다 앞서 노아는 어떻게 방주 짓는 일을 그만두지 않을 수 있었을까? 무려 120년이다!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저는 그저 묵묵히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 할 수 있는 정도로는 곤란하다. 해야 하는 일을 행함은 다소 훈련된 습관에 따르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날은 몸도 마음도 컨디션이 좋을 때가 있고 어떨 때는 몸도 마음도 찌뿌듯하여 공연히 골난 사람처럼 뚱하니 기분이 가라앉을 때도 있다. 해가 맑고 바람이 선선할 때가 있고, 한낮에도 어둑하니 구름이 잔뜩 끼고 을씨년스런 날도 있듯이 그러면 그런 대로 저러면 저러는 대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평소 내가 즐겨 묵상하는 말씀이다.
쓸데없는 생각에 시달리지 않는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한다. 이러든지 저러든지 하던 대로, 해야 할 일을 수행하는 것. 특히 이번 주간에 나는 어느 때보다 그 유익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억지로라도 설교원고를 작성하였다. 억지로라도 일찍 일어나 말씀 앞에 앉았고, 일찍 서둘러 교회로 올라갔다. 뭘 하든, 하는 것도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데도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 것. 노아를 견디게 한 것도 아브라함의 발길을 이끌고, 모세의 가야 하는 길에 함께 한 것도 모두다 저들이 가지고 있던 ‘마땅함’을 무던히 준행한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나는 친구를 찾지 않았고, 누구와 시시덕거리듯 객쩍은 말로 털어버리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유익한 것은 오롯이 주밖에 없게 한다. 회사 일로 또는 누구 때문에 어쩌다 그랬는지, 술을 먹고 들어왔어! 하는 우려 섞인 누구의 염려와 기도부탁에 나는 ‘나의 값’을 생각하였다. 우리는 허투루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20).” 나를 값 주고 사신 이가 계시다.
하다못해 직장 생활도 한 달에 얼마, 월급에 팔린 몸이라 정해진 시간과 지식과 몸을 팔아야 먹고 사는 주제인데, 하물며! 그러니 내가 내 것이라 여기는 것은 하나님이 내 안에 두시는 소원을 무시하는 일이 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회사 일도 그리 억지로라도 끌려 다니면서 하물며 주의 일을 감당하는 데 있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14).” 그럴 수 있는 길은 주께 고하고 내어맡김으로 가능하였다. 내가 어찌 해결하고 감당하려 할 때는 어쩜 그렇게 핑계거리와 변명이 끝도 없는지. 그게 다 ‘너 때문이었다.’ 누구 때문에, 무슨 일 때문에, 뭐 때문에 우리는 종종 옛 생활을 허용한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사도는 일침을 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하나님을 향한 헌신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이 나를 받으셨다는 것과 내 안에 거하신다는 확신으로밖에는 초과할 수 없는 나의 한계였다. 내 안에 늘 도사리는 억하심정은 ‘~ 때문에’ 하는 열등감과 ‘만약 ~했더라면’ 하는 자격지심이었다. 나는 이를 인정하고 공식화해버렸다. 안 그런 척 하고 살 때는 생각도 못한 일이다. 혹여 누가 그리 볼까봐 숨기면 숨겼지, 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것까지도 내 것이 아니라는 데 시선을 맞추는 것이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오히려 우리가 긴장해야 하는 일은 구원의 문제인데, 값싼 은혜 덕에 구원을 마치 헐값에 얻은 줄로 착각을 할 때가 있다. 이는 그리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사람 관계보다, 회사 일보다, 심지어 내 자신이 경각에 달린 목숨보다 더 중한 일이 구원이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함은 하루 동안의 영적 예배이었다. 곧 그럼에도 주 앞에서, 그런데도 주를 바라며, 그 와중에도 주와 함께… 앞선 믿음의 사람들의 무던함은 이를 기반으로 가능하였다. 할 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이는 권고가 아닌 명령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조언을 하지 않는다.
직접 나의 이름을 부르신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요 10:3).” 익명의 다수, 또는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14:26).” 이를 가르쳐 나로 알게 하시는 이가 있었으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 그럴 수 있는 자였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6-7).” 나는 종종 유치한 표현이지만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한다. 할 뿐이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 앉아 뭘 하지? 싶으면서도 한다. 이런 기분으로 무슨 설교원고를 쓴다는 말이지? 하면서도 그냥, 한다. 하게 하시는 이로 한다.
주를 따른다는 것은 때로, 그야말로 무모하다고 여겨지는 일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이 얼마나 황당한 말씀인가? 문자적으로 읽어버리면 이보다 못한 가르침이 어디 있겠나? 그래서 부모를 버리고 처자와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라고? 그 이상의 것,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게 제자의 길이었다. 제자와 성도, 평신도와 사역자 등으로 구분하거나 구별하는 데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신자이면 제자여야 하고 제자이면 사역자로 살아야 마땅하지 평신도가 어디 따로 있고, 사역자가 어디 따로 있겠나? 우리는 주 안에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함께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16).”
어찌됐든 한주간이 지나 다시 주말을 맞이하고 주일을 앞두었다. 세월은 속절없어서 어느 순간 문득 돌아서면 이만치 왔다. 나의 남은 생이 어떠할지, 다만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11).” 그러할 때,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12-13).” 그럴 수 있고, 그러해서 그럴 수 있는 일을 무던히 행함으로 가는 게 주의 길이었다. 그러므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8).” 그리고 오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 46:1).” 이와 같이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 앞에서 안도한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2-3).” 왜? 주는 나의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5).” 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