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13-14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시편 47:6-7
어쩔 수 없는 일에 있어서 나의 약함은 변명 같으면서도 위안이었다. 그래서 더욱 주의 뜻을 분별한다는 것은 말씀으로였다. 내게 더하시는 환경으로였고, 주의 지혜로 하는 것이다. 이는 마음에 임재하시는 성령으로다. 이를 어찌 알까?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 3:21).” 일련의 사건과 상황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총체적인 섭리, 곧 일하심이었다. 하면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아침 일찍 친구 부친의 부음(訃音)을 듣고 마음이 어려웠다. 가야 하는데, 가 봐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그럴 수 없는 여건으로 나를 쥐고 흔드는 것 같았다. 가까운 친구 한둘에게 알리고, 서로의 위로와 안타까움을 전하였다. 오늘날 코로나 상황이 만든 기이한 현상이기도 하겠으나 나의 그런저런 나 됨이 면구스러울 뿐이었다. 이에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더욱 쓸쓸하고 외로운 일이겠으나 어쩔 수 없음이 주는 숙연함이 있었다. 남은 이는 떠난 이를 그리워하며 슬퍼하나 나는 가끔 떠난 이의 홀가분함을 부러워하곤 한다. 주 앞에 들어가 평안을 누리는 일에 대해 묵상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에 대해 달리 슬퍼해야 할 필요가 있다.
궁극적으로 주의 말씀을 듣는 일이어서,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시 3:4).” 하는 다윗의 고백처럼 주의 성산에 이르는 일이다. 주의 사랑은 참으로 기이해서 슬픔 중에 기쁨을 혼란 중에 평안을 알리신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파하나이다(75:1).” 곧 이 땅의 삶으로 전부라면 이를 두고 떠나는 일에 대하여 애도하며 슬퍼하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우리에게는 그 이상의 기쁨이 있다. 혼연히 빛날 자유함이다.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룻 2:12).” 곧 우리가 주를 바라고 주께 의지한다는 것은, 어둠의 옷을 벗고 빛의 옷을 입는 일이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슬픔 중에 있을 친구에게 긴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떤 말보다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마음뿐이다. 행여 이 슬픔이 가시고 도로 세상일에 젖어 사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세상일에 젖어 산다는 것은 사는 데 급급하여 정작 죽음 너머의 일을 사모하는 데 게으른 것이니,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삼상 2:3).” 우리의 오늘은 여기가 아니다. 이 땅에서의 것이 전부가 아니다. 당한 슬픔과 외로움은 어찌 위로를 더할 수는 없겠으나 그것이 슬픔으로만 그칠 문제는 결코 아닐 거였다. 부디 주의 영이 함께 하심으로 위로와 평강이 또한 함께 하시기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6).” 우리가 산다는 게 다 그렇지 않던가? 떠나보내고 잃는 마음이야 슬픔이 우선하겠지만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7).” 우리의 마음은 주께로만 향한다. 그러하기를. 부디 그러하여서 남은 생은 더없이 주만 바라기를.
그 일에 두어 친구와 모처럼 통화를 하였고 그 와중에 이런저런 근황을 듣는데 다들 어찌 사는 이야기뿐이다. 한 친구의 길고 긴 이야기는 외줄타기처럼 위태로운 먹고 사는 문제였고, 그 일에 여념이 없다보니 한동안 끊었던 술과 나름의 신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듯하였다. 뭐라 이를까 하다 들을 때가 아닌 듯하여 그만두었다. 다들 사는 데 급급한 것이라. 누구의 죽음은 우리로 산다는 일에 대해 새삼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정작 무엇으로 사는지. 그래서 지혜자는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4).” 사는 일에 여념이 없는 것을 두고 죽음을 떠올리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2).” 곧 우리의 영생은 죽음 너머에 있다.
사는 데 따른 여전한 친구의 모습에서 나는 오히려 죽음을 애도하는 슬픈 소식을 전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저 또한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죄의 문제였으니 저도 어쩔 수 없어 이리 끌려 다니고 저리 끌려 다니는 일일 테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마음은 어려운데 어쩔 수 없는 심정은 마음뿐이라, 친구의 슬픔을 애도하되 이 일 후의 저의 믿음이 더욱 주를 바라는 데 소용되기를 기도하였다. 그리고 문득 비로소 하늘 문에 들어가신 이를 생각하였다.
그 영광의 나라에 이르러 앞서 간 믿음의 사람들과 마주하며 주의 영광을 보는 일은 어떨까? 더는 슬픔도 고통도 없는 나라에서 오로지 주의 영광으로만 차고 넘치는 기쁨으로 평안을 누리는 것에 대하여… 나는 가끔 누가 죽었다 하는 소릴 들을 때마다 그것이 부러울 때도 있다. 그렇게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6-7).” 오늘 우리가 더해지는 슬픔으로 배우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슬픔을 슬퍼하는 일에 있어서도 이와 같다. 오히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20).” 우리의 원수가 무엇인가? 결국은 산 자의 원수는 죽음이지 않은가? 한데 그 죽음을 슬픔으로만 받지 않고 온전히 주의 영광에 들어가는 기쁨으로 누릴 수 있다면.
이를 지금은 당장 슬픔에 젖어 어찌 감당이 안 되는 말이겠으나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 우리의 선은 오로지 주를 바람이다. 주의 영광을 그리며 그의 나라를 사모함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2).” 우리의 기쁨과 즐거움이 기다린다. 이 땅에서의 보람과 유익이 아니다. 하루에도 여러 사건사고 가운데 억울한 죽음을 호소하는 기사를 접하고는 하는데, 모든 죽음은 슬픔으로 두렵고 두려움으로 더욱 애착을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여기서 사는 일에는 이만하면 됐다. 누구의 슬픔을 두고 뭐라 이를 수 있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 믿는 자의 슬픔은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었다. 반드시 우리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신다. 우리의 삶은 주의 책에 기록된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 56:8).” 오늘을 사는 일은 내남없이 유리하는 일이다.
떠돌듯 흘러 다니며 이 일에 치이고 저 일에 고여, 오히려 나는 친구의 슬픔을 알리다 어느 친구를 슬퍼하였다. ‘도로아미타불’처럼 요 며칠 술에 절어 살 수밖에 없다는 저의 사는 고단함이 말이다. 듣다보면 어찌 평생을 그러고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것인지. 회사가 어디에 인수되고, 그 일로 자기 입지가 간당간당하여 ‘죽고 싶다’는 말로 지겨움을 호소하는데, 나는 그저 듣기만 하였다. 저도 이미 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는 저의 생에 대하여, 뭐라 말로 일러 주의 뜻을 전할 수 있을까? 부디 저의 귀에 주의 말씀이 들려지기를, 주의 살아계심과 우리의 죽음 너머의 생에 대하여 부디 지금의 간절함에 반에 반만 하여도 좋으련만…. 여기 사는 일에서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그러므로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11).” 코로나 정국을 겪으면서 생의 다급함을 여태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 빛의 옷을 입자.
살게 하시는 날 동안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13-14).” 다만 우리는 여기를 거쳐가는 사람들이지 여기서 머물 사람들이 아님을. 오늘 시편은,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시 47:5).” 주의 나팔 소리가 들리는가? 하고 되묻는 것 같다. 하면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6-7).” 우리의 할 일은 오직 주를 찬송하는 것뿐이다. 어떠하든지 오늘 너머의 생을 두고,
찬송하라
하나님을 찬송하라
찬송하라
우리 왕을 찬송하라
하나님은 온 땅의 왕이심이라
지혜의 시로 찬송할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