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 2:16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시편 52:8
내 의지로나 노력으로가 아니다. 주께서 이루신다.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9).” 하는 오늘 시편의 고백이 우리의 것이다. 곧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내가 저의 안에 저가 내 안에 계심을 확신하고 사는 자가 복이 있다. 이를 알면 알수록 내가 헛되이 수고하고 애쓰지 않는다. 오직 나에 대한 판단은 주께 있다.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사 49:4).” 고로 나도 나를 정죄하지 않음이 복이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가? 수시로 드는 남에 대한 판단이 있고, 그와 같은 비판으로 자신이 비판 받는 것을.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1-2).”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귀한 덕목이 아닐까? 누구를 헤아려 저를 위하고 동정할 줄 아는 마음이 스스로 자신이 받은 상급의 무게이기도 하다. 그러한 나를 두고 말씀은 되물으시는 것 같다. ‘언제나 네가 내게 오겠느냐?’ 이를 대조적으로 잘 나타내주는 말씀이 있다면,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5-6).” ‘참 과부의 외로움’과 ‘향락을 좋아하는 자’로 갈린다. 결국 나의 위로 나의 소망을 어디에 두고 살 것인가의 문제다.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시 71:5).”
은연중에 주를 바라고 구하고 의뢰하는 마음이 귀한 거였다.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처신을 하며 살다가도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이 내 의지로가 아니었다. 믿는 자로 사는 데 따른 내어맡김은 막연하고 무의미한 의존이 아니다. 맹목적이거나 무조건적인 반응도 아니다. 나는 종종 나의 병적인 예민함으로 고단하기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 가령 어제는 장모가 인천으로 와서 손가락과 무릎 진료와 처치를 받고 가셨다. 한데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교회가 세든 실내 공사가 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철거로 인한 소음과 분진이 말도 아니다. 그러니 점심시간에 겹쳐 아내는 수업을 해야 해서 집으로 모실 수는 없고, 교회로 오시게 하려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 동선을 다시 짜고 여러 모양을 생각하느라 혼자만 기진하였다. 그러는 나를 두고 아내는 왜 저러는가, 하는 뜨악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런 식이다. 누가 온다거나 어디를 가야 한다거나 할 때 나는 언제부턴가 섣불리 움직이지를 못한다. 무슨 일에 앞서 마치 내 안에 염려라는 경호처가 앞서 동선을 체크하고 모든 돌발 상황을 점검한다.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만 실제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의심’이라는 성에 ‘절망’이라는 사악한 거인이 수시로 우리 영혼을 볼모로 잡는 일로, 천성을 향해 가던 크리스천은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서처럼 그곳에 감금되어 꼼짝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벌어진다. 나는 이를 알고 이와 같은 나를 두고 주께 고하면서 이게 우리 안의 보편적인 습관, 오래된 본성이란 것을 알았다. 분명히 의심은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을 저해하고 주의 신실하심에 도전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요일 5:10).” 이를 없이 하는 게 믿음으로는 안 된다. 성령으로밖에 안 된다. 나의 믿음은 그렇게 믿을만한 게 못 된다. 성령으로 하게 되는 것, 이는 늘 나의 믿음보다 앞선다. 이는 내가 어둠일 때도, 죄의 종으로 살아갈 때도 나와 함께 하셨다. 물론 그때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앎으로 나의 염려는 도리어 나를 주 앞으로 이끈다. 모든 일에 신중하게 하고 사소함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주의 더하시는 은혜를 누구보다 예민하게 바라고 느끼게 한다. ‘참 과부의 외로움’이란 단지 그렇겠구나, 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온전히 주를 바란다고 하는 일은 내가 나를 어찌 정돈하고 주를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럴 수 없는 나를 본연의 나 그대로 주께 의탁하는 일이다. 이는 마치 달의 또 다른 표면 같다. 이때를 보고 있으면 저쪽을 볼 수 없다. 나의 배면에는 그리하여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밖에 없는 성령의 내주임재하심, 내 안에 역사하시는 손길이 늘 함께였다. ‘어둠이었던 나’의 시절에도 나는 세상을 좇고 이를 즐기려하는 본질적인 욕구로 눈이 가려지고 귀가 막혀 들리지 않던 주의 음성이 그때에도 계셨다. 돌아보면 어느 한 순간도 주께서 내 곁을 떠나신 적이 없다. 어제도 그렇게 마음을 쓰고 저렇게 신경을 쓰다 저녁에는 기진하여 드러눕기 무섭게 잠이 들었다. 나의 약함이 나로 신중하게 한다. 돌아보며 주의를 살피게 한다. 그 모든 배경에는 주의 선한 의도가 함께 하신다.
그렇게… 우리의 묵상이란 일상을 배제하고는 불가능하다. 어제도 묵상하였던 말씀과 같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좀 더 내 이야기로 가져오면 나와 상관없는 말씀은 없고 나를 배제하는 주의 사랑과 하나님의 능력은 없다. 이는 공연한 나의 판단이 아니라 성경이 보증하시는 말씀의 약속이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22).” 그러니 왜 주께서 날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는가?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 나는 이제 확신하는 것은 나의 염려나 근심으로까지도 주를 바라고 의지하게 하시고, 그러는 순간에 주는 나를 위하시고 이를 주의 영광으로 삼으신다. 곧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무슨 메달을 따고 어떤 수상소감을 말할 때의 그 영광이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일은 그럴 수 없는 중에도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기 싫은 중에도 주를 바란다. 어제 오후에는 또 누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보내온 사진을 보니 뒤에서 추돌당한 것으로 병원에라도 좀 입원을 하여 치료를 받고 쉬었으면 하는데, 그럴 여건이 안 되었다. 친정 부모에 아이들 건사하는 일에 자신이 맡은 여러 강의에… 결국은 가까운 한의원을 찾아 결리고 뭉친 것만 다스리는 정도였다. 이래저래 저의 설상가상과 엎친 데 덮치는 일을 두고 나는 다만 속상하고 안타까울 따름인데, 그런 중에도 기도를 부탁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언제 제일 영화롭게 영광을 받으실까? 그럴 수 없는 중에 우리가 주를 바라고 주를 찾을 때이다. 나름의 판단과 기준으로 하나님을 뒤로 하고 스스로 나서서 무얼 하려고 할 때에는 ‘나의 주’는 외면당하시는 것이다. 하면 어찌할까? ‘그것까지도’ 주께 맡기는 일이겠다. “서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쪽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강물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사 59:19).” 우리는 이를 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처럼 급박한 상황일수록 우리는 주를 바란다. 그 와중에 사고현장 사진과 함께 기도를 부탁하는 문자 한 통이 그저 서로의 인간관계로 이루어지는 알림이 아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데 있어 중보란,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는 데 따른 확신으로밖에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하였으랴(시 124:1).” 그러니까 나는 나의 나 됨, 이 약하고 부족한 심약함으로 주를 더욱 바란다. 이런 저런 요인으로 어제는 안정제를 먹는 간격이 들쑥날쑥 했다. 불안으로 마음은 옥죄고 가슴은 벌렁거렸다. 남들이 보면 ‘별 것도 아닌 일’을 두고 나는 애면글면 속을 끓이며 생각이 많고 감정은 예민해진다. 이는 물론 부정적인 일이다. 한데 이와 같은 나의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주를 더욱 바란다. 누구에게 말하길, 이처럼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묵상을 하고 글을 쓰고 주 앞에 앉는 일에 필사적인 까닭은 나의 불안과 나의 염려가 나로 하여금 주를 더욱 사모하게 한다. 곧 ‘참 과부의 외로움’이 오히려 복이 될 수도 있다. 이 땅에서 다들 바라는 복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데, 실제 우리의 결핍이 우리로 결사적인 삶으로 이끌기도 하는 것과 같다. 성공담에 두루 나오는 말처럼, 어릴 때 가난이 성공의 밑거름이 되고, 당면한 어려움이 앞으로 곧장 나아가게도 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우리가 배워서 알게 된 깨달음으로가 아니라 주가 더하신 마음으로다. 곧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우리의 뿌리가 강가에 심겨진 나무였지, 우리의 수고가 강가를 끌어온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을 보고 안다. 물론 우리 안에는 두려움도 있지만 여유로움도 있다.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6-7).” 세상 그 어떤 악함으로도 우리를 이기지 못할 것을 말이다. 이는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5).” 그러므로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7).” 이 얼마나 귀하고 값지고 소중한 사실인가? 이를 앎은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10).”
그러므로 나는 나의 유별난 어려움(?)까지도 사랑한다. 주가 두시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는다. 이처럼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11).” 주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심이다. 이는 곧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