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고전 8:5-6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
시편 58:9
정말이지 오만가지 종교와 신들이 있는 모양이다. 듣다 좀 이상하다 싶으면 영락없다. 저들을,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시 58:9).” 한 가정의 일화가 사람의 생태계를 샘플로 보여주는 것 같다. 오늘 바울은 이를 경계하며,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5-6).” 하는 우리의 분명한 위치를 알게 한다. 곧 나를 사랑하심을 나로 알게 하신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계 3:9).”
모 프로에서 아기들을 일렬로 세워 앞에서 여러 엄마들이 각기 자기 아이를 불렀다. 아이는 어기적거리며 뒤뚱거려 걷거나 기어서 숱한 엄마들 사이에서 자기 엄마를 찾아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 안에서 이상하다 싶은 게 있고, 이거다 싶은 게 있다. 이와 같은 본능적인 감각은 주가 내 안에 거하심을 알게 한다.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싶다가 남녀호랑계교는 남묘호렌게쿄 즉 SGI(Soka Gakkai International)를 일컫는다는 것을 알고 찾아보았다. 창가학회라 하여 ‘우리 생명은 우주 대법 파룬궁을 만나려 한다.’ 이에 ‘행복을 빈다.’는 주술적의미로 남묘호렌게쿄를 암송한다. 나무(南無)를 외움으로 바람이 이루어진다고 여긴다. 이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귀의를 도모한다. 곧 부처의 생명을 열어 행복에 도달한다고 생각한다. 바라는 행복을 추구하는 데 있어 나름의 선행을 강조한다. 일본 승려 니치렌이 주창한 불법(佛法)으로(1928년) 인격가치 창조와 평화문화운동에 이바지 하여 세계평화를 실현하고자 한다.
다들 추구하는 종교적 삶이 가상하다. 사람의 연약함이 고스란히 비쳐진다. 나름들 강한 줄 알지만 그만큼 약한 게 사람이다. 하여 행복을 찾고 선을 도모하려는 자기 노력이 가상할 따름이다. 문득 우리 신앙으로 우리가 배부른 영혼인 것을 알 것 같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계 2:9).” 하긴 교회보다 여러 분파가 어디 있겠나? 여호와의 증인이니 남묘호렌게쿄가 드문드문 드러나는 데 반해 ‘신천지’가 코로나로 인해 된서리를 맞고부터 ‘하나님의 교회’가 우리 주변에서 은근히 세를 확장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거 보면 다들 참 극성이다.
내가 결혼 할 때만 해도 아무 개념이 없었다. 아니, 어떤 불의한 마음이 어릴 적 신앙에 반하여 나를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아내의 집안 내력이 다양해서 불상을 신전을 두고 신내림을 받은 무당이 살고 곁을 같이 하는 친척들 중에 여호와의 증인이나 남녀호랑계교가 있었으며 온갖 잡신을 섬기는 주변 사람들로 둘러 싸여 있었다. 그렇게 자란 사람을 만나 무심하게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한 것이기도 하니, 지금 같으면 이런 사실을 매우 심각하게 알았을 텐데 하릅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꼴이었다. 그때는 내가 참 무모하였고 주를 떠나 거역하며 살았던 때이다. 그럼에도 주는 나와 함께 하셨고 ‘나 같은 것’을 들어 그 가정을 바로 세우신 것이다. 그 와중에 손위 처남 형님은 입사한 회사의 간부가 믿는 사람이라, 억지 춘향으로 같이 모여 예배드리며 성경을 알아가는 신우회에 속하게 되면서 자신들이 뿌리내리고 살았던 곳이 엄청난 우상의 소굴이었음을 알고 물러나게 된다. 장모는 그때까지도 신내림을 자처하는 여동생 뒷바라지로 다시 되물림하듯 시달리다 이를 깨고 나오는데 아주 극적이었다. 형님과 우리가 양공작전을 펴서 이모님이 없는 날, 어머니를 모셔 나오는데 나는 망을 보고 섰고 아내가 들어가 친정엄마를 강제로 끌어내고, 그 순간 이모가 낌새를 알고 들이 닥치고, 그때 아내에게서 어떤 그런 힘이 났는지 결국은 막아서는 이모를 물리치고 장모를 이끌고 나왔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련하니, 참 오묘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그 현장에서 본 것 같다. 길길이 뛰던 이모님은 저주를 멈추고 더는 관여하지 않았고, 나는 아무 소리 없이 저를 뿌리치고 돌아섰다. 감히 뭐라 일컬을 말은 없으나,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오늘까지도 이런저런 인연의 실타래로 엉켜 있는 것을 보면서 참 질기다 싶은데, 이제 더는 흔들리지 않는다. 형님의 열심이 다소 위태로울 때도 있으나 주께서 붙드심을 안다.
누구의 이야기를 듣다 문득 떠올린 나의 날들 가운데 의외로 온갖 잡신에 에둘러 살았었던 것을 생각하였다. 어릴 때 시골집에 가면 변소며 문간에 귀신 밥이 놓여 있곤 하였다. 특히 어린 나이에 똥 싸는 똥통 곁에 숟가락이 꽂힌 잿더미 앞의 하얀 맨밥을 보면서 기이한 생각이 들고는 했었다. 무섭거나 겁나지는 않았다. 자라면서도 신앙은 개떡 같았어도 수많은 여자들이 서서 엄마야, 이리와! 엄마한테 와! 하고 손뼉을 치고 요란을 떨어도, 아기는 뭘 안다고 자기 엄마를 찾아가듯 나는 저들과 상관없다는 어떤 강한 믿음은 있었다. 이제 와 아는 일이지만, 그때마다 성령이 날 위해 간구하심이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러니 참 내가 얼마나 겁 없이 살았던가? 지금도 내 곁에는 가장 좋아하고 가까운 선생이 자칭 무신론자이나 다신론자로 모든 신을 두루 하나로 보며 살고 있고, 교회를 마치 자기 위안의 처소로 삼고 기도를 무슨 위로의 주술로 여기며 믿고 사는 친구들도 여럿 있다. 그럴 때면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27).” 하는 말씀에 의지한다.
하여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듯이 나 역시 들어앉아 하는 일이란 게 빛도 없이, 광야에 흩어지는 소리처럼 누구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다. 나는 늘 되새기지만 내 곁의 많은 기도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아찔하기 그지없다. 나의 결혼과 오늘까지의 함께 하심도 주의 은혜가 아니면 참 기괴한 쪽으로 흘러갔을 터인데… 그러니 어제도 누가 와 이런저런 말을 하며 오만 잡신을 마치 두루 섭렵한 도인처럼 통달한 듯 자신은 다 안다고 할 때 등골이 오싹하였다. 이는 저가 무서운 게 아니라 저의 멋모르고 지껄이는 말의 의미 때문이었다. 그래서도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가만히 주의 이름을 부르며 저의 눈을 보았다. 나도 그러했듯 뭐라 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간구가 힘이 있는 것은 성령이 도우시기 때문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엡 6:18).” 그러니 내가 위하고 바란다고 기도가 아니다. 나의 요구나 모양은 온갖 신을 찾는 사람들의 것과 다를 게 없다. 다들 행복하길 원한다. 행복하고 싶어서 신을 찾는다. 행복하면 됐다, 하고 여긴다. 전에 어느 아이 엄마가 그처럼 아이를 위해 애써 기도하며 새벽기도를 다니고 수시로 나에게 전화하여 아이를 위해 기도를 부탁하며 이런저런 어려움을 호소하곤 하였는데, 저 아이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실제 그들 서원을 찾아가 입교까지 하였는데도 이내 좋아하였던 것은 ‘아이가 맘 잡고 산다.’는 것과 ‘아이가 하는 일이 잘 풀려 모든 게 순조롭다.’는 것과 ‘지금처럼 행복했던 순간은 없었다.’는 게 저이의 변호였다. 그렇게들 예수를 알고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을 알고 섬기다, 이거 아니면 저거다 싶은 것이다.
기도 안에 마음이 들어 있는 정도로는 안 된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럽다. 왜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가?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그러니 우리의 마음은 악할 뿐이다. “그러나 네 두 눈과 마음은 탐욕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포악을 행하려 할 뿐이니라 (렘 22:17).”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새롭다.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시 58:9).” 그렇게들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 주는도다(2).” 한데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전 8:7).” 곧 이를 알게 하심은 어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본능적으로 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비로움이다. ‘이게 아닌데…’ 싶은 것들에 대하여! 바른 경계가 거기서 나온다.
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거리는 것은 행복을 추구하고, 나름의 안위와 평안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그야말로 영혼까지 끌어 모아 잘 살아보고 싶은 욕망이다. 그렇게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5).”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6).” 이를 앎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7).” 돈돈거리는 세상에서 정말 돈을 잘 벌고 사는 게 전부라면, 사탄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된다. 어쩌겠나? 세상 권세 잡은 자인데,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그러니 우리는, 안다.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 하리로다(시 58: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