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온전히 알리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전 13:12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편 63:3
저마다 상처가 있다. 말할 수 없는 설움과 상처와 열등감을 담아두지 않고 드러낼 때, 이를 글로 쓰거나 말로 하여 한 걸음 다가설 수만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를 자랑하는데 어째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안에 머무시는 것일까? 종종 알다가도 모를 것 같은, ‘이게 맞나?’ 싶은 것들에 대하여 회의하고 낙심하지 않고 주를 바라는 것은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믿는 일이다. 마뜩찮고 오히려 힘에 겨워 지치는데도,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하는 말씀으로 충분한.
그리하여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하는 계통의 신앙 고백은, “그가 나를 죽이시리니 내가 희망이 없노라 그러나 그의 앞에서 내 행위를 아뢰리라(욥 13:15).” 어떠하든지 주는 인자하시다.
지난 주일에 이어 시편 54편을 준비하려는데, 비탄에 빠진 다윗은 그런 한계를 통해서도 주를 바란다. 시편 54편은 35편과 같은 비탄 시에 속한다. 35편은 도망다니며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면 54편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그와 같은 한계에서 주의 구원을 호소하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시 54:1).” 주의 이름으로다. 주의 힘으로다. 내가 나서서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지 않는다.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네 가지의 숙명적인 문제점을 살펴보았다.
먼저는 죄의 문제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할 수 있을진대 할 수 없는, 행할 수 있으리라, 하시는 데도 할 수 없는.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잠 1:20-22).” 우리의 끝 간 데 없는 죄의 본성은 어찌 감당이 안 된다. 결국은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전 1: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7:13).” 죄란 모름지기 더는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악에 악을 더할 뿐이다. “그 장례를 마치매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니 그가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이 행한 그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삼히 11:27).” 천하의 다윗도 끊어버릴 수 없던 죄에 대하여,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5).”
다음으로는 사탄의 존재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그제나 지금이나 여전하여서 저의 일은 오직 하나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우리 안의 죄성을 건드리며 호시탐탐 우리 영혼을 노린다. 이를 잘 아시는 주님은 우리로 이를 감당하게 놓아두지 않으셨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후 5:5).” 그러므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요일 3:8).”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또 다른 하나는 죽음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이는 죄의 결과이고 사탄의 결말이기도 하다. 그때에는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4:13).” 고로 우리 안에 감추고 있는, 자신도 모두 잊고 지냈던 것이라 해도,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이보다 더 두려우면서 다행스러운 일이 또 있겠나? 그러므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30-31).”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이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당해낼 수 없는 것은 율법이다.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욥 9:2).” 다윗도 고백하기를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시 15:1).” 오늘 바울도 우리에게 일러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누구도 자신의 능력으로는 율법을 만족시킬 수 없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이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주는 우리의 사랑이시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이에 따른 고백이 우리로 새 힘을 얻게 한다.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시 144:6).”
들어앉아 있어서 좋은 점은 월요일부터 설교원고를 중심으로 개괄적으로 말씀을 준비하게 된다. 어제는 모처럼 날씨도 좋고 몸도 괜찮았다. 어디라도 훌쩍 떠날 수 있고 다녀오고 싶은 날이었다. 걸어서 오가는 길 위에 5월의 장미가 만개하였다. 그 곁을 지날 때면 어김없는 저의 모습에 배우는 게 많다. 나무는 그저 꿋꿋하니 자기 자리를 지킨다. 때가 되면 산 것들은 어김없이 자신들의 생명을 한껏 뻗어낸다.
누구와의 통화에서 아주 작은 일에도 감사가 넘쳐나는 것에 감사하였다. 아버지가 콧줄을 뺐다는 소식과 어려울 것이라 짐작했던 것으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선을 보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병원비도 어느 정도로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고, 거친 마음에 더는 용서가 없을 것이라 여겼던 이에게서 감사와 찬송이 나오고 있었다. 일련의 상황이 비극적인 줄 알았는데 그것으로 선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찬양하고 있었다. 우리 안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 가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를 감사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적이다. 날로 새로워지는 속사람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다.
개괄적으로 설교원고 본문을 준비하다, 우리가 이길 수 없는 네 가지 죄, 사탄, 죽음, 율법에 대하여 그것으로 오히려 주를 바라는 힘의 원동력을 바랄 수 있었다. 곧 우리의 해결점은 의외로 간단하였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우리로 은혜 위에 은혜로다, 하는 고백이 되게 하심을.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6).” 이것이 충만함이다. 이를 위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윤곽을 잡아가듯 말씀을 더듬었던 월요일, 누구의 소식에서도 새삼 주가 다 해결하심을 보게 되었다. 이에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 16:31).” 다른 수는 없다. 더 나은 길은 없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고로 오늘 우리의 어려움이 우리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한다. 이런저런 사연이 누군들 없겠나. 그 마음에 상처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자식을 키우는 데 있어 상처 없이 자식을 키우는 이가 어디 있겠으며, 본인도 부모노릇이 처음이니 상처를 받지 않고 자식을 키울 수 있는 이 또한 누가 있겠나? 사는 게 다 상처투성이인 세상살이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말씀은 이를 증거하시고 우리는 그와 같은 말씀으로 충만하여진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우리 안의 곪은 것과 괴사한 것을 도려내시고 새살이 돋게 하심이다. 누구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이를 가슴에 돌덩이처럼 껴안고 십 수 년을 씨름하다 비로소 내려놓게 되었다. 스스로는 할 수 없는 용서를 주께서는 하게 하신다. 비록 우리는 할 수 없으나 주가 하시는 일에 대하여,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빌 1:23-24).” 언제든 떠나게 될 세상에 미련을 두고 사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도 없겠다.
점심을 먹고 천천히 산보하며, 저녁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하였다. 천천히 걷는 나의 느린 길 위에는 빨간 꽃이 만개한 장미는 물론 빼곡한 양버즘나무들이 푸르렀다. 여의치 않아 멀리까지는 못 간다. 가까운 뒷산도 오르지 못한다. 그저 사람들이 인위로 조성해둔 아파트 단지 뒤편으로 숲길이 고작이다. 그럼에도 저들 나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푸름에 눈이 부시다. 돌을 가져가 둔덕을 만들고 흉내 내듯 꼬불꼬불 비틀어놓은 산책로에 불과하지만 나무들은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사람이 어찌하랴. 자신들의 생명의 주관자가 누구이신지, 저들은 마치 두 팔을 벌려 찬양하는 듯하였다. 이에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시 63:7).” 마치 소리 없이 나무와 풀과 새와 바람이 노래하는 것 같았다. 곧 지금은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전 13:9-10).” 하지만 이제 곧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12).”
그때에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시 63:2).” 이를 앎으로 주의 인자하심은 나의 생명보다도 귀하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3).” 하는 고백이 내 것이 된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