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전 16:14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시편 66:9
믿는 사람이 안 믿는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 좀 잘 됐으면 좋겠다. 또는 안 믿는 저들이 자신들의 그릇된 삶을 버젓이 망함으로 깨달았으면 좋겠다. 실은 악담과도 같은 이와 같은 마음이 고약함을 알면서도 누구 이야기를 듣다가 공연히 속상해서 주께 구하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
(시 66:10-12)
내가 들은 이는 평생을 사모로 남편 사역에 뒷바라지를 하였다. 뿐만 아이라 아들 하나 있는 것도 목사로 세워 저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학위를 따고 한인교회 부목으로 사역하는 데 있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젊을 때는 간호사로 일하다, 조산원을 크게 일궈 몇 군데로 확장하기도 하여 그것으로 주의 길 가는 남편과 아들의 거름이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파킨슨병이 찾아와서 일상을 모두 잃고 자기 몸 하나 가누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었는가 보다. 누구는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하며 입을 삐쭉거렸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뭐든 적당해야지? 안 그렇습니까, 목사님? 하고 이어지는 말은 더욱 가관이라 남편과 아들의 사역에 대해 무책임과 나태함으로 규정하는 듯하였다. 마치 저들은 흡혈귀처럼 아내와 어미의 골수를 다 빼먹었다는 투였다.
아… 아, 이런! 하는 나의 자조 섞인 소리가 수긍의 의미로 들리지는 않았을까? 저가 돌아가고 한참동안 나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러니 보란 듯 자신들은 자식들도 잘되고 스스로도 건강하여 이제 황혼의 남은 인생을 즐기는데 그 무슨 험한 꼴이라며 마치 싸잡아 믿는 사람들을 평가하는 단어로 ‘적당히’라는 말을 몇 번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렇듯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저들과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 ‘믿는 사람들의 행색’은 차이가 났다.
그래서 누구는 말하기를 믿는 사람들이 덕이 돼야 한다는 말을 끌어다 붙여 돈도 잘 벌어야 하고 건강도 해야 하고, 하는 일이나 그 분야에서 손색이 없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지론을 펼치기도 한다. 신학을 하면서 버젓이 학생들에게 그렇듯 말하는 목사이면서 교수들을 볼 때면 지당하신 말씀이나 듣기가 싫었다. 마치 저들의 가르침은 바리새인을 연상케 하였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눅 16:14-15).” 또는 어느 목사의 설교나 강해를 좋아했는데 저의 어느 책에서 ‘희락주의’를 강조하며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보란 듯 희락주의로 사는 데 따른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는 데 있어 왠지 마음이 불편하여 더는 그의 책을 읽지 않았던 적도 있다. 나의 이런 태도를 들추는 까닭은 결코 나의 생각이 옳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시 73:2-3).” 우리의 기준이 이 땅에서의 평가와 다를 게 없다면 아니 어느 정도 그런 시각으로 접근하며 나름의 행복추구권을 행세하려 든다면 자칫 스스로의 모순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누구는 종종 강조하기를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일하고, 돈 벌고, 하는 일에서 최고가 돼야 한다는 말을 잘한다. 곧 우리에게는 잘 살아야 하는 의무가 안 믿는 자들에게 빌미를 주고 책잡히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하는 소리라면 몇몇 믿는 사람을 빼고 많은 믿는 사람들이 교회에서, 주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다. 무슨 면목으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겠나?
그럴 때면 어제 바울의 고백이 되새김질 된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어제 소식을 들었던 저이의 사연에서도 그렇듯 남편과 아들 뒷바라지 하며 꽤 큰 규모로 산후조리원을 여러 개 운영할 때는 덕이 되고, 앞서 몹쓸 병에 걸려 운신을 제대로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면목 없고 염치없는, ‘그러게 적당히 하지…’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일이라면 우리의 희락이니 행복이니 하는 복의 기준도 결국은 세상의 잣대로 늘였다 줄였다 재단하는 꼴이 아니겠나? 상대적으로 따지면,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시 73:11).” 하는 저들이 뭘 해도 잘 되고 잘 풀린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12).” 심지어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4-5).” 정말이지 기죽어서 어디 이 땅에서 살 수 있겠나?
그러니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13-14).” 우리 믿는 자의 신세가 처량하고 한심하기 이를 데 없다. 어제도 누가 보란 듯 저의 이야기를 하며 물론 안 됐으니까 하는 소리였겠으나 이러쿵저러쿵 입을 삐쭉거리며 말을 해대는데 솔직히 너무 듣기 싫었다. 뭐라 할 수도 없고 뭐라 한들 받아들일 사람도 아니고 해서 신음하듯 나는 아, 아, 하는 안타까움만 토하고 말았으니….
나는 오늘 시편의 말씀을 되뇌다 울컥한다.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시 66:17).” 저들 말마따나 보잘것없고 하등에 쓸모도 없는 자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18-19).” 곧 나도 보란 듯 돈도 좀 있고 교회도 번듯하고 남들 앞에 내세울 어떤 위력도 좀 있어서, 이게 증거다! 하고 보여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위축이 드는 마음도 있었다. 괜히 송구하고 민망하여 나야말로 입이 댓 발 나와서는 잠시 동안 우울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20).” 이와 같은 기도가 나의 것이기를. 부디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51:17).” 이와 같은 말씀으로 저들 말을 털어낸다.
안 믿는 저들의 말이나 시선이야 그렇다 치고 믿는다는 이의 나름 자신의 실력과 의를 행세하는 데 있어 자부심을 갖는 것에 대하여, 굳이 예수님이 두 사람을 비교하며 예를 드신 상황을 묵상하였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눅 18:10).” 우리 인식이 바리새인에 대해 부정적인 이해가 자리 잡아서 그렇지, 당대에도 저만치 종교적이고 거룩하며 훌륭하게 자기 앞가림을 하며 하나님을 믿고 섬겼던 이가 어디 있겠나? 사회적으로도 위력이 있고 행색도 남루하지 않으며 그 지위와 위치가 번듯하였으니 그것으로 믿는 자로서 본이 되는 게 아니겠나? 그런데 왜 주님의 시선에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14).” 우리의 시선과 판단과는 거리가 있다.
누구의 말에 나는 토를 달지는 않았지만 늘 그의 생각을 들을 때면 위태롭기도 하다. 그래서 명색이 믿는 자로서 잘 살고, 잘되고, 자기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 게 중요하다는 것에는 어찌 동의해야 할지 나는 솔직히 모르겠다. 어느 목사의 ‘희락주의’에 대해서도 나는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것이 이 땅에서 그러자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고, 우리가 받은 은혜의 정도가 거기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상대적으로 더 많은 그럴 수 없는 통회하고 애통하는 사람들의 기도는 어쩌면 좋을까? 좋다, 그 대답이 옳다면 이제 살아라!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눅 10:29).” 하였을 때 예수님은 하필 사마리아인을 들어 이웃을 예로 드시고는 물으셨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 결국 중요한 것은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37).”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것이다.
다시 시인의 음성으로 들어보면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하고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5-17).” 우리는 이내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때에야 깨닫는 것이다. 이는 중의적으로 읽힌다. 죽음 너머 주의 앞에 섰을 때를 의미하기도 하고, 오늘 여기서 이처럼 말씀 앞에서, 주의 성소에서 얻는 해답으로였다.
오전에 누가 왔고 저의 뜬금없는 누구 소식이 마음이 어려웠다가 그 또한 오늘의 이야기로 전부가 아닐 것을 확신하였다. 개인적으로는 저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그럴 것이지만 나아가 그와 같은 소릴 하는 저들이나 이 땅의 평가에 대해서도, 엄연한 사실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곧 우리의 위로는 여기서 또는 어떤 현상이나 실체로 누가 대신 판가름하는 일이 아니다. 누구 말마따나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란 소릴 듣겠으나 우리 모두는 아직 선명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으로밖에는 우리 이해와 상식은 의미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이에 확신하는 바울은 평안을 구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하고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고전 16:23-24).” 우리가 주의 나라 가는 그 날까지,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시 66:2).” 당장의 어떤 상황이 결과는 아닐진대 “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 (셀라)(3-4).” 이에 분명한 사실은,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9).” 비록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10-12).”
이에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2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