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

전봉석 2021. 5. 30. 05:59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2:14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시편 67:7

 

 

누구를 마주한다는 일은 저의 지나온 시간과 품고 있는 마음과 함께 하는 모든 것들을 동시에 상대하는 일이다. 한 사람이 여기 있기까지 숱한 사연과 나름의 수고가 쌓였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누구를 좋아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을 굳이 구분한다. 좋아한다는 것은 지금만 그래도 될 일이면 사랑한다는 것은 지난 것과 앞으로의 것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좋아한다는 것은 뒤미처 싫어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싫어지는 것들도 사랑하며 견뎌내는 일이다. 그래서 이를 덧정이라 하며 ‘그에 딸린 것까지 사랑스럽게 여기는 마음’을 사랑은 포함한다. ‘좋다’와 ‘사랑한다’가 같은 의미로 쓰여 좋으면 사랑인 줄 아는데, 사랑은 자신도 다 감당하지 못하는 마음의 세계다. 종종 누구를 대할 때 특히 가족을 사랑하는 일에는 미움과 싫음까지도 감내하며 어찌하지 못하는 마음을 경험한다. 좋은 것과 싫은 것을 모두 다 품고 가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일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세계를 마주하는 것이기도 하다.

 

뜬금없지만 나는 요즘 주의 사랑이 참 어마무지하다는 생각을 한다. 곧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하나님의 충만하신 사랑이 나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이는 ‘은혜 위에 은혜’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전에도 묵상하며 표현한 것처럼 은혜는 마치 양날의 검 같다. 은혜이면 좋기만 한 줄 아는데 은혜로 인해 고통스럽기도 하다. 병에 들고 사업에 실패하고 나름의 인생이 꼬일 대로 꼬여버리는 경험도 한다. 이런 것을 두고 은혜라고 하면 고개가 갸우뚱하지만 은혜는 우리의 이해 이상의 세계다. 그렇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그런 은혜로 누구는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것 같은 날을 보낸다. 또는 잦은 경험으로 설교를 듣다보면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로 들려 여간 불편하고 듣기 싫은 게 아닐 수 없다. 우리 안의 적개심이 은혜로 인한 것일 수 있다. 곧 이를 반감으로 여겨 거스르는 마음이 드는 까닭은 여태껏 지켜온 것에 대한 위기감이기도 하다. 은혜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많다. 예수님은 더욱 호의적으로 다가가셨으나 저들, 특히 고향 사람들은 적의를 가지고 마주대했다.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눅 4:24).”

 

좋아한다는 것은 좋은 것만 좋으면 된다. 다른 더 좋은 게 있으면 그리로 마음이 쉽게 옮겨 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랑은 ‘그것까지도’ 덧정으로 품는다. 은혜란 의무가 아니다. 은혜의 세계에는 권리가 없다. 사랑은 조건이 따르지 않는다. 사랑과 은혜를 한데 놓은 것은 제약이 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다 알았다. 하나님은 언제든 원하면 원하시는 일을 이루신다. 예수님은 사렙 땅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내신 예를 들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눅 4:25-26).” 또 엘리사에게 그 많은 나병환자 가운데 이방 사람 나아만을 낫게 하신 일도 말씀하셨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27).” 어째서 악명 높은 이세벨의 통치하에 있는 우상과 잡신의 땅 시돈으로 것도 과부와 그의 아들을 구워하시려 엘리야를 보내셨는가를 묵상하는 일은 그 의미가 참 깊다.

 

나는 아이가 이 글을 읽지 않을 것을 안다. 어제 전화를 하며 그의 사정을 살피면서 앞서 말한 주의 은혜와 사랑에 대하여 잠깐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다. 느닷없고 뜬금없는 일이 사랑이다. 은혜는 때로 불가항력적이다. 마치 부모나 자식을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가족을 사랑하다 보면 어렴풋이 이와 같은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아내에게 건너들은 말이지만 형님은 아들에게 모진 말을 듣고 마음이 상했던 모양이다. 김치나 밑반찬을 자취하는 아들에게 가져갔는데, 녀석은 불쑥 찾아와 그러는 게 싫었던지 뭐라 했던 모양이다. 서운한 마음에 자식 다 소용없다며 자신도 더는 신경 안 쓸 것처럼 마음 상해하다 덜컥, 저압성 두통으로 녀석이 입원을 했던 것이니 바로 염려와 안타까움에 사로잡혀 발만 동동 구르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 얼마나 잔인하고 끊을 수 없는 일인가? 어찌 감히 좋아한다는 것으로 그 감정을 대신할 수 있겠나? 좋은 것은 싫은 것과 견주지만 사랑 앞에서는 미움도 소용이 없다. 용서 되지 않는 것은 없다. 용광로처럼 모든 감정을 녹여버리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나는 은혜를 같은 것으로 여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이 말씀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원하고 원치 않고의 문제도 아니다. 하다못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자식과 부모 사이도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을 누가 어찌 마다할 수 있겠나?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그럼에도 우리의 오해는 은혜에 대해 ‘좋은 것’으로만 치부하기 때문이다. 물론 좋을 때야 좋은 것이겠으나 싫을 때도 좋은 것이 은혜다.

 

아파서 입원해 있는, 특이한 병이라 누워 있으면 괜찮은데 앉거나 서기만 하면 머리가 깨질듯 아픈 병이라니… 그런 가운데 있는 아이에게 나는 불쑥 이번 기회에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기를 권하였다. 예전에 가졌던 그 순수하고 바라던 사랑을 다시 마주할 수 있기를. 나는 오늘 본문을 그리 읽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2:14).” 항상 이긴다는 것은 늘 씨름이 있다는 것이고,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이는 자주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곧 누구를 사랑하며 상대한다는 일은 실제 자신과의 싸움이 더 치열하다. 때론 미움도 생기고, 때론 싫고, 때론 도망치거나 버려두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게 드는 데도 이 모든 게 사랑이라는 용광로 속에서는 모두 녹아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15-16).”

 

억지시늉을 하는 게 아니라, 그리 마음이 애달픈 것이다. 아내는 종종 나더러 너무 애쓰지 말라고 하면서, 심지어는 왜 자꾸 자식들 눈치를 보냐고 핀잔을 하는데, 그게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은혜는 때로 우리를 화나게 한다. 은혜는 정말 싫을 때도 있다. 은혜로 힘에 겨워 지칠 때도 있다. 가령 예배를 드린다는 일이 매번 벅차게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의지한다는 게 마냥 즐겁기만 한 일은 아니다. 좋아서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다! 싫어도 자식인 것처럼, 이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두신 유일한 하나님의 성품이다. 세상에서 우리의 사랑도 이 모양인데 하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면 어떻겠나?

 

그러니 가장 복된 삶이란 은혜를 입술에 머금고 사는 일이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엡 4:12-13).” 우리로 직분을 주신 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일이었다. 어떨 땐 욱, 하고 올라와 다신 보기 싫고 더는 상대도 하지 않을 것처럼 모진 마음이 들다가도 ‘칼로 물 베기’란 말처럼 사랑은 그렇게 가르고 또 가른들 도로 형체도 없이 하나로 붙어버린다.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히 1:7).”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에 놓으셨든, 어떤 자로 삼으셨든, 그것으로 이미 충분하여 주의 쓰임에 합당하면 된다.

 

가끔은 소외감도 또는 자괴감도 들 정도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을 때도 있지만 이 또한 한데 묶여 주의 사랑으로 녹여버리신다. 그야말로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신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 9:7).” 고로 내가 하여 애쓰지 않아도 된다. 내 새끼니까, 가족이니까, 내 일이니까 하는 따위의 당위적인 마음은 금세 또 무너진다. 지겹고 곤고하기만 하다. 그러나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11:4-5).”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는 그 이상의 엄위와 엄존하심으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 23:5-6).” 우리가 무엇으로 서로 사랑할 것인가? 사랑도 감정의 하나가 되어 좋다, 싫다로 분류되는 순간 가짜다. 사랑에는 싫고 좋음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따를 뿐이다. 그래서 요즘은 은혜를 함부로 좋아하지도 또는 바라지도 않는다. 아니 이 또한 모순된 마음이다. 바라고 안 바라고의 문제가 아니다. 바라지 않으면 주지 않으신다는 해석은 인격적인 관계를 설명하거나 이해하려다 빠지는 함정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우리의 바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래 맞다. 하나님은 일방적이고 제멋대로시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인격적이란 의미를 마치 우리 감정 따위와 동등하게 놓고 취급하려니까 스스로 존중을 운운하다 망하기 십상이다. 그건 아직도 정신 못 차라고 자신을 뭐나 되는 줄 착각하는 ‘지독한 오해’ 또는 죄로 인한 것이다.

 

바울은 그래서 일갈한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은혜를 입술에 머금고 산다는 일은 말씀을 항상 오물거려야 하는 일이다. 아니면 금세 원망과 비난과 저주가 튀어나온다. 그 입을 틀어막지 않으면 자기 말에 자신이 데여 고통당한다. 그러므로 오늘도 시편으로 기도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 67:1-2).” 우리로 알게 하시기까지,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5).” 그러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