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20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편 70:4
그 어떤 가치보다 귀하고 소중한 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이다. 이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잠 1:23).” 이를 가능하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심을.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겔 33:11).” 할 때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이에 하나님과 반목하는 이유는 인생 때문이고 돈 때문이다. 나름 든든히 섰다고 여기지만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시 39:5).” 그저 좀 잘 살았다고 한들 한 뼘 길이만큼의 일생에서,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사 2:22).” 보면 이를 받고 들을 수 있는 마음은 성령으로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 같다. 다들 살 날 만 계수하고 죽을 날은 염두에 두기를 싫어하는 듯도 하다. 그러니 잠시 허무함을 잊기 위해 환각과 소비와 문화나 낭만을 꿈꾼다. 이때 시편은 큰 소리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그러니 이를 훼방하는 것이 하나 더 있는데 재물을 쌓는 데 혈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6)”
이게 참 허무하기 짝이 없는데도 다들 알면서도 놓지를 못한다. 영원할 줄 아나 곧 시들하여 들의 풀과 같고 꽃과 같을 뿐인,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말씀이 외치는 소리에 귀가 먹먹할 따름이다. 우리의 영생은 주가 주신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 이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 또 있을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하고 주님이 물으신다. 이에 오늘 바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의 것’인 사실을 일깨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를 바로 붙들고 산다면 고난이 유익을 더하는 것도 알겠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10:22).” 종종 외면당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가까웠던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을 느낄 때 저들이 추구하는 세상과 내게 바라는 세계가 다른 것을 알게 된다. 이에 베드로는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 1:7).”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을 알게 한다. 때론 몸서리치게 외로워하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시 55:6).” 하여 숨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7).” 그렇게 본향을 그리워하다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8).” 그렇듯 바랄 수 있는 곳이 있음을 안도한다. 이를 오늘 바울의 목소리로 들으면,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8-9).”
가끔은 이를 묵상하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 4:8).” 내가 어디 있든지 주가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3).”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는 것으로 나에게 두시는 복이 참으로 귀한 것을 깨닫는다. 솔직히 요즘은 자주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못 쉴 것처럼 뻐근하다. 이것이 심리적인 것인지 내과적인 것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안정제를 먹으며 달래는데 왜 그러지? 하고 그 이유를 찾다보면 끝이 없다. 정말이지 아무런 염려나 근심의 원인이 없는데도 내 맘 같지 않을 때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라. 같은 동선을 따라 하루를 보내며 요즘은 기회가 되면 산보를 한다. 접한 일들을 생각하고 아들을 마음에 두다 누구 일로 신경을 쓰다 훌훌 털어내듯 가만히 걷는다. 느린 걸음을 따라 여기서 저기, 이만큼이나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그러게! 진실로 허사뿐이라.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시 39:5).”
여전히 추구하고 바라는 것이 세상적인 것을 알면서도 이처럼 말씀 앞에 가만히 나를 놓아두게 된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롬 8:17).” 곧 무엇이 오늘 나에게 있어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한 고난’인가?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어쩌면 나는 멀쩡한데 나는 멀쩡한 게 아니어서, 병든 영혼의 외침은 아닐는지. 아이가 퇴원은 했는지, 그러고 보니 오늘 누구하고는 카톡도 한 번 주고받지 않은 것을 생각하다, 멀찍이 안면이 있는 노인이 시선을 허공에 두고 앉은 것을 보고 일부러 뒤로 돌아가면서… 하다못해 생각도 이처럼 몸과 다르게 저 혼자 분주하기만 한 것이다. 하물며 주를 바라는 영혼의 일일까?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지점 어디에서 답보 상태를 보이며 그것으로 질식을 호소하는 것은 아닐까? 가만히 오늘 시편의 기도를 읊조린다.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70:4).” 하나님과 화목하다는 증거로는 나로 하여금 주를 찾게 하심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더 한 걸음 나아가게 하시는.
부지런히 설거지를 하고 가정예배를 드린다. 아들놈이 먼저 앉아 기다리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그래도 같이 예배를 드릴 때 찬송을 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할 때 듣는 목소리로 족하다. 보면 나도 참, 어려서부터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그럴까봐 먼저 떠나고 버리고 등을 지곤 하였는데, 나의 이 고질적인 방기와 외면이 나로 두렵기 때문이었다. 실은 언제부턴가 나를 분석하지 않으려고 한다. 누구 일을 두고 저에 대해 그처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 다 거기서 거기라, 누가 더 낫고 말고가 어디 있던가? 그러면서도 걷다보면 생각은 저 혼자 엉기고 서로 연관도 없는 마음과 생각이 뒤섞여 들숨 날숨이 거칠게 꼬인다. 이에 오늘의 어려움이 오히려 감사할 것은,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히 12:7-8).” 우리 안에 어떤 어려움이 없다면 그래서 하나님을 부를 기회를 잃는 게 된다. ‘다 그렇지 뭐’ 하는 순간 연기처럼 흩어진다.
결코 다 그렇지 않다. 내가 요즘 집중하게 되는 것은 내가 왜 이러지?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으로 누굴 생각하고 저를 생각하다 주를 바라게 되는 일이다. 가령, 조금 설익은 표현인데 나는 아이가 너무 일찍 완치가 되고 퇴원을 하는 것 같아 다행이라 할 때마다 아쉬움도 같이 따른다. 얼마 정도 어려움이 더했으면 잃어버린 주를 찾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아무에게도 겉으로는 말할 수 없는 어떤 마음이 있었다. 그런 시각으로 오늘에 두시는 나의 어려움이 어렵다가도 주를 바라는 통로가 된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고루하여 말하기도 민망한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에서부터 늘 죄의식이 따르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나는 이처럼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고 짊어지고 가는 짐의 무게로 엉뚱한 데서 화풀이를 하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성내에서 강포와 분쟁을 보았사오니 주여 그들을 멸하소서 그들의 혀를 잘라 버리소서(시 55:9).” 내 속이 그러하지 않던가?
그래서도 말씀은 일깨우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사 56:1).” 구원이 가까웠다는 증거는 나로 나의 의롭지 못한 것을 자주 대면하게 하는 증상으로 나타난다. 아무리 세상 그 모든 게 잘 풀리는 것 같다 해도 “악인들은 풀 같이 자라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라(시 92:7).” 하나님 없는 흥왕은 멸망뿐이다. 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 안에 쌓아둔 은밀한 죄를 두고 이르시는 말씀 같다. 결국 인생은 믿을 게 못 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더는 그게 아니라고 자부하는 만큼 또한 세상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같이 내 안에 뒤엉겨 있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오늘 말씀은 우리로 주목하게 하신다. 무던히 주만 바라게 하시려고,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20).” 나는 오늘 말씀을 되뇌며 새로 허락하신 한 날에 말씀 앞에 앉았다. 인생 의지하지 말자. 돈을 사랑하지 말자. 특히 돈이란 모으면 모을수록 마음이 빼앗기게 되어 있다. 돈은 늘 내 것이라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곧이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2).”
곧 “하나님이여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70:1).” 인생에 빠져 인생을 살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