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1-2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
시편 71:14
작은 구멍으로 손이 하나 간신히 들어가게 하고 그 안에 바나나를 둔다. 원숭이는 손을 넣어 바나나를 잡고 손을 빼려하지만 바나나를 쥔 손을 펼 수 없다. 이와 같은 원숭이를 사냥하는 이야기는 가끔 누구와 이야기를 하다 떠올린다. 잡은 걸 아무리 놓으라고 해도 소용이 없다. 드는 생각은 답답한데 저 또한 마찬가지인가보다. 욥은 세상을 감옥 같다고 했다. “악인은 재난의 날을 위하여 남겨둔 바 되었고 진노의 날을 향하여 끌려가느니라(욥 21:30).” 이것이 빤히 보이는데, 저들도 다 알면서, 누구는 그 얼마의 손익을 따져보면 그냥 놓을 수가 없고, 누구는 오랜 습성을 따라 고칠 마음이 없고, 누구는 혹시나 하는 기대로… 손에 쥔 바나나가 다 문드러졌는데도 손을 펴지 못하는 것 같다. 모처럼 친구와 통화를 했다. 저는 도로 담배를 피우고, 교회와는 다시 멀어지고, 그저 사는 날을 두고 씨름하는 것들에 대해 나는 잠자코 있었다. 뭐라 한들. 다 아는 이야기라 여겨 더는 들으려 하지 않는다.
성경은 일러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옳다구나 하고 마귀는 때를 노린다. 우리는 이 육체라는 얇은 천막이 전부인데,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9).” 한 치 앞도 알 수 없으면서 에이, 설마! 하고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그러니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20-21).” 그러니 나는 종종 할 말을 접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런저런 나의 우려를 그저 병적인 소심함으로만 듣는다.
탐심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벧후 2:3).” 아무리 임박한 날에 대한 경고를 들려주어도 소용이 없다. 소돔과 고모라의 롯의 사위들 같이 농담으로나 듣고 만다.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창 19:14).”
더 말해 뭐할까. 저녁에 가정예배를 드리며 아내에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더는 얘기해도 소용이 없겠어! 하고 말하자, 그래도 포기하면 안 되지, 이런 성도도 있고 저런 성도도 있는 건데! 하며 핀잔을 주는 것이다. 그러게… 가끔 나는 아내가 툭, 던지는 말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엡 3:8-9).” 나 같은 자에게 하나님 속의 비밀을 드러내게 하신 것이 설교다. 설교와 대화는 다르고, 설교와 강의도 다르다. 설교는 선포다. 나도 모르지만 나는 전한다. 오늘 시편의 한 구절이 그렇게 들린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시 71;15).” 내가 어찌 주의 뜻과 그의 섭리를 다 측량할 수나 있겠나? 그럼에도 세우시면 전해야 하고, 전할 때는 주께서 말씀하시듯 해야 한다. 내 말이 아니다.
모처럼 통화한 친구와의 대화에서 저에게 다하지 못한 말의 아쉬움은, 앞서 점심 때 큰 맘 먹고 장모와 손위 처남 앞에서 ‘동대문 집’에 대해 목사로서 권고한 말의 무게만큼이나 크다. 전할 뿐이지 더는 어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사는 환자의 증상을 완화시키고 고통을 경감하는 정도에서 처치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를 알리고 이를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질병을 가리거나 무마하여 진통제만 쓴다면 오히려 더 고착화된 만성질환자로 만들뿐이다. 뭐라 정곡을 찔러 말하지 못했던 친구에게나 믿는 자로서 재산에 대한 태도를 말한 형님에게나… 나는 아무 것도 한 게 없고 할 수 있는 게 없어 여전히 답답한 마음뿐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하는 데 따른 우리의 감격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일까? 내남없이 손에 쥔 것을 놓으려 하지 않는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가끔은 나의 자세나 말, 생각이나 저에 대한 마음을 염려한다. 말씀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는 가령 아들에게 이런저런 하고 싶은 말을 꼭꼭 묻어두었다가 설교 때 말씀으로 전한다. 하나님께 맡기는 나의 가장 소극적이면서도 최선의 선택이다. 아니면 뭐라 한들? 듣기 싫어하는 것을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 이는 친구에게도 또는 자주 와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누구에게도 같다. 내가 해줄 말은 뻔하다. 손에 쥔 것을 놓지 않는 상태에서 아무리 뭐라 한들. 보면 다들 자신이 옳다. 늙으나 젊으나 들을 수 있는 게 은혜다. 오늘 말씀을 그리 받는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
먼저는 나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가 되었다. 누구를 권한다. 동시에 은혜를 헛되지 받지 말아야 한다. 권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권함을 받는다. 우리는 듣고 구원의 날에 도움을 받는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이다. 들어도 들리지 않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 데는 별 수 없다. ‘지금은 구원의 날이다.’ 이와 같은 말씀이 나에게 먼저 들려지고 누구에게 들려주는 말씀으로 읽힌다. 아무리 그래도 친구에게 이 말은 할 걸… 누구에게 저건 꼭 말했어야 하는데… 하고, 돌아서면 늘 되새김 속에서 나의 허술함을 깨닫는다. 지극히 작은 자 가운데 나 같은 자를 왜 주님은 지목하신 것일까? 아내의 말 중에 이런 성도도 있고 저런 성도도 있는데… 하는 소리가 내내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니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시 71:14).” 이는 내게 먼저 주의 소망을 갖게 하신 까닭으로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119:49).”
그러니 이 모든 책임을 주께 떠넘기고 내어맡기는 것처럼 말씀을 준비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예배를 드린다. 이를 복되다 여기는 것은 그릇 행하였다가도 금세 주의 경고음을 들을 수 있어서이다. 거의 병적으로 메모를 하고 생각을 하고 이를 설교원고에 담아둔다. 설교원고와 설교는 엄연히 다르다. 어떤 날은 마음이 든든할 정도로 치밀하게 원고를 작성하고 섰는데 죽을 쓴 기분이다. 어떤 날은 자신이 없어 빌빌하였는데 흡족한 마음이다. 설교는 내게 두신 하나님 고유의 영역이다. 아니면 겨우 몇 명, 가족과 아픈 아이가 전부인데… 하는 자괴감에 빠진다.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이를 엄연히 멀리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속에 감추신 비밀의 경륜’을 알게 하신다.
참으로 별 거 아닌, 친구와의 통화를 오래 곱씹는 것도 또는 누구와 이런저런 말을 나눈 일도 하다못해 저의 표정이나 근황까지도… 주님은 내 안에 담아두시고 씨름하게 하신다. 곧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고후 6:3-8).” 하고 이르시는 오늘 말씀의 의미를 되새긴다.
그렇게 나는,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8-10).” 그러그러한 자로 주 앞에 서듯이 누구를 마주하고 어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이를 말씀으로 솎아서 주의 비밀의 경륜을 설교하는 사람으로 세우셨다는 것! 로이드 존스 목사의 말처럼 ‘설교는 교회 고유의 임무이고 설교자 고유의 의무이다.’ 내가 뭐 잘나서가 아니라, 저들보다 나은 게 있어서 아니다. 다만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14).” 저들의 하나님 없음이 우리로 덩달아 쓸려 다니게 한다. 친구의 요즘 상황이나 누구의 외골수적인 자기주장에 대해서도 저들 말에 나는 쑥맥처럼 뭐라 말 한 마디 못하고 주워듣다가 지쳤다.
더는 말해봐야 소용없겠어! 하는 나의 말에 아내의 일갈, 이런저런 성도가 있는 것이지! 하는, 흘겨 들을 수 없는 말이 저녁 내내 얹힌 것처럼 마음에 남았더니, 이것은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닌 것은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나는 다만 사신일 뿐이다. 전하여 말할 뿐이다. 통보하고 전달할 뿐이다. 선포다. 내 뜻이나 생각을 더하는 일이 아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19).” 이 귀한 사명과 사역에 대하여 내가 나의 감정으로 누구를 제하고 또는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는 저들보다 나은 사람처럼 행세할 수도 없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7).”
새삼 나의 역할을 다시금 생각하는 하루였다. 그리고 이 아침, 나는 다만 주의 뒤로 숨는다. “주는 내가 항상 피하여 숨을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심이니이다(시 71:3).” 내가 뭐라고! 저들보다 나은 게 뭐 있다고! 다만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5).” 고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더욱 찬송하리이다(15).” 이에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21, 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