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전봉석 2021. 6. 6. 05:51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9:10, 15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

시편 74:16-17

 

 

어떤 일로 마음이 어렵다가도 우리 구원을 위해 가장 불가능한 일을 행하신 이가 다른 무슨 일을 못하실까? 생각하면 마음이 두렵기도 하고 든든하기도 하다. 늘 같은 날의 반복이고 같은 시간 속을 맴도는 것 같아 그 날이 그 날 같고 그 타령이 그 타령인 것 같지만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곧 오늘의 나로 예전의 나를 돌아보며 앞으로의 나에게 소망을 갖게 하심은 이 모든 사실이 ‘미리 정하셨으니’ 어쩌다 우연한 내가 아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 이를 이루어 오신 이가 주시다. 나를 부르셨고 의롭다 하셨고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 오늘의 내가 아무리 무력하고 나약한 것 같아도 누가 감히 나를 대적하여 상대할 수 없음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 곧 그 아들까지도 아끼지 않고 나를 구원하신 일인데 이를 위하여 더 무엇을 못하실 것이 있겠나.

 

종종 내 안에 이는 갈등과 우울과 고통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잊지 못하게 한다. 또한 그런 어려움으로 인생의 덧없음도 안다. 나의 약함을 명심하게 하여 부족함을 아는 만큼 주를 더욱 바라게 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오게 한다. “그들이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호 5:15).” 그러므로 한 날의 이런저런 여파가 궁극적으로는 죄 때문인 것을 알고 주께 아뢰며 회개하는 심령으로 살게 한다. 그러므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좋다는 소린 아니다. 다만 그 유익을 알면 알수록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하신 말씀을 되새겨 주의 뜻에 온전하기를 바라게 하신다.

 

그럴 때 어려움은 마다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임으로 유익한 것이어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10).” 그럴 수 있는 힘조차 주가 더하시는 은총을 경험한다. 여러 어려움이 없는 사람이 있겠나? 토요일 오후, 나는 점점 나다니지 않으려고 하고 아내는 운전하고 나가고 싶어 하니 딸애와 같이 나가고 아들은 공부하러 교회로 가고, 혼자 있는 시간이 늘면서 이런저런 생각도 많은 것이었는데, 우울감이나 나른함으로 질식할 것 같다가도 이럴 수 있는 시간조차 호사인 것을 생각하였다. 특히 요즘 공사현장 한복판에서 하루를 보내다보니 밥벌이를 위해 갖은 일을 다 하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이 많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이가 굽실거리며 어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움직이는 모습에서 먹고 산다는 일의 엄연함을 보곤 한다.

 

그러므로 이 땅을 사는 동안 우리 안에 산 소망이 없다면 이 무슨 고역이고 사는 날이 온통 처절하기만 하겠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이 소망은 부활에 따른 것이다. 주의 부활하심과 강림이 없다면 우리의 사는 날이 이처럼 무력하게 끝나고 말 것이겠지만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이 우리에게는 있다. 이를 나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셨다는 소망이 부활 신앙이다. 그러므로 살아도 주를 위해 죽어도 주를 위해,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이를 가만히 묵상하고 있으면 오늘의 이런저런 나의 어려움이 때론 유익이라. 이것으로 때를 따라 돕는 주의 긍휼하심을 체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가령 나는 하는 게 미약할 따름인데 헌금과 기도로 교회를 후원하는 이들과 이런저런 공사를 하며 손익계산을 하면서도 교회와 예배를 나름 신경 쓰는 주인의 마음을 체험한다. 그런저런 계획으로 어차피 투자하는 일이면 우리 자리도 두 개 혹은 세 개로 쪼개 더 많은 이익을 바랄 수도 있었을 텐데… 누구는 지금 친정부모의 병치레로 한 달에 드는 비용이 가혹할 정도로 힘에 겨운 것을 아는데도 오히려 지난달부터 보내오는 헌금을 더욱 올려 넘치게 하고 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6-7).”

 

설마 저들이 무능한 나 같은 자를 보고 그러하겠나? 교회를 섬기는 마음으로 심음의 원리인 것이고, 나는 이를 지키며 주의 전을 맡아 떠나지 못하는 일이었으니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10).” 이는 주의 일하심이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5).” 이는 나의 일이다. 기도에는 감사로 채워지는 것이었다. 이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18).”

 

오늘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느끼고 깨닫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것은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함을 알기 때문이다. 이때에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시 74:16-17).” 하는 주께 향한 고백이 나를 붙드신다. 이는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히 13:6).” 가령 누구는 글방에서 교회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부터 한 달도 빠짐없이 적지 않은 금액을 연보한다. 이는 오늘 말씀에서처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9:8).”

 

솔직히 나는 언제나 돌보심으로 살았다. 더욱이 선명한 것은 신학을 하거나 목회를 하는 데 있어 들어가는 모든 부대비용을 주께서 그때마다 돕는 손길을 통해 이루어오고 계심을 확신한다. 처음 신학과를 편입할 때 공부도 공부지만 학비나 그에 따른 돈이 가장 걸림이었다. 애 둘에 아등바등 사는 일로 목줄이 꾀어 끌려 다니기 일쑤인 내게 난데없는 손길을 보내셨다. 몇 번을 생각해도 기이하기만 한 것은 저와 나는 그럴 사이가 아니다. 어쩌다 어느 동호회에서 만난 이모님쯤 되는 아주머니였다. 이런저런 내 글을 읽고 하나님이 어떤 감동을 주셨는지 알 수 없으나 거짓말처럼 저는 집요하게 나를 종용하여 신학을 다시 공부하게 하였다. 그 전에 나는 저의 호의를 거절하느라 그럴 형편이 아닌 것을, 당장 교회 건축으로 부채에 시달리며 자신들 의료비도 몇 년째 밀린 부모 핑계를 대며 것도 감당할 능력이 안 된다고 할 때 저는 먼저 그것부터 해결하라며 목돈을 주었다. 그때의 황당함에 대해서는 어찌 설명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모름지기 우린 마음으로나 그러지 실제 돈 문제 앞에서는 아무나 그럴 수 없다.

 

당시 3백만 원이면 큰돈인데 우선 부모님 밀린 의료비부터 해결하라고 것도 강제로 떠밀듯 쑤셔 넣어 받은 뒤로 신학 학부를 네 학기 하는 동안 일체의 학비와 경비는 물론 대학원까지도 그럴 거였는데, 그 금액을 모두 따지면 수천만 원이다. 신대원 한 학기를 하고 못하겠다고 하자 그 뒤로 연락이 끊겼고, 십년 세월이 훌쩍 흘러가버렸다. 그것이 97학번의 일이고, 09학번에 다시 신대원을 하게 된 것이니 그러는 동안 주의 강권하심과 성도의 연보는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하였다. 신대원 3년, 6학기 동안 내 스스로 학기마다 학비를 충당한 적이 없었으니까! 이 또한 금액으로는 수천만 원이다. 글방에서 교회로 그곳에서 예배가 이루어지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감당하는 데 있어 한 번도 임대료를 밀리거나 늦게 낸 적이 없었으니…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곧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9-10).” 나는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새삼스럽다.

 

늘 한심하기 짝이 없는 걸음으로 느려터진 행보이고 실제 하는 것도 없는 사람으로 교회만 지킬 뿐 뭐 하나 변변한 게 없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일이었으니… 누구의 사정을 잘 아는데, 저가 2009년 12월, 우리가 처음 글방에서 예배를 시작한 때부터 오늘까지 넘치는 손길로 섬겨오는 연보에 대하여, 그것도 지금에 이런저런 상황으로 자기 앞가림에 그만 두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데…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5).” 이는 결코 내가 어때서가 아니고, 여느 큰 교회의 넉넉한 손길에서는 감히 느낄 수 없는,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11).” 어찌 그 모든 게 쓰고 남아서이겠나? 다른 것보다 우선하는 저들의 손길이 오늘의 나로 교회에 붙들어놓은 것이었으니, 아 “이 봉사의 직무가 성도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할 뿐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말미암아 넘쳤느니라(12).”

 

그래서 나는 종종 나의 못난 점으로 씨름하다가도 이와 같은 실제의 손길을 경험함으로,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 그들이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를 사모하느니라(13-14).” 오늘을 살아가며 나보다 더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주의 손길을 체험하고 저들의 섬김으로 수혜를 입고 사는 이가 또 있을까?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는 것인데, 나로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복종하게 하는 것이 성령으로는 물론 저들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였다. 그야말로 나는 인생 그 자체가 수혜자로 사는 셈이다. 하면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15).”

 

유난히 오늘 말씀으로 감사할 것들 뿐이다. 그래서 더욱 이 아침에는 시편의 진술이 가슴을 더 먹먹하게 하신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주께서 빛과 해를 마련하셨으며 주께서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주께서 여름과 겨울을 만드셨나이다(시 74:16-17).” 부디 저들 섬기는 손길들 위에 주의 은혜가 차고 넘치는 역사가 날마다 체험되어지기를. 아울러 내세에서 뿐 아니라 이 땅에서 백 배의 결실로 은혜 위에 은혜로 갚아주시기를. 나는 아무 능력이 없어서 갚을 길 없어 주의 이름을 부른다.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후 9: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