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전봉석 2021. 6. 13. 05:39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갈 3:23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시편 81:6

 

 

믿음보다 기이한 현상은 없다. 믿어지지 않는 게 당연하지 믿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어쩌다 요즘은 아침마다 사장과 커피를 한 잔씩 하게 되고 저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게 하신다. 그러다보면 저의 태도나 세계관에서 나의 모습이었던 것을 발견한다. 예수를 알지 못하고 말씀을 받지 않으려 할 때의 가치관이 고스란히 저의 말을 통해 나의 모습이던 것을 보게 하신다. 어제는 뜬금없이 부인에 대한 답답함을 먼저 호소하다(아무래도 이런저런 일로 좀 다투었지 싶다), 이런저런 사업 이야기에까지 두루두루 말하는 것을 들어야 했다. 혼자 열심히 말하다가 좀 머쓱했는지, 목사님 제 이야기가 재미있으세요? 하고 멋쩍어하며 웃었다. 온통 저의 관심은 사람과 돈과 사업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가 말씀을 알지 못할 때, 믿음으로가 아니면 ‘사는 일’ 외에 달리 살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나? 어쩌다보니 두어 시간을 들어주는 일에 소모하였고, 덕분에 상주업체와 비상주업체와 저들을 관리하는 건물주의 법적인 절차에 대해서까지 알게 되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말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새삼 이 말씀의 의미가 현실적인 교재로 읽혀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그쪽에 서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 이쪽에 서서야 보이는 것과 같다. 믿음이 없으니 자기 살 궁리를 자기가 하느라 여념이 없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으니 ‘애굽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당연하겠다. 애굽은 세상의 가치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지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나니(사 31:1).” 그럴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저의 말이 지겹다기보다 아, 내가 저러고 살았겠구나! 하는 데서 여러 모양의 나를 마주하곤 하는 듯하여 “애굽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30:7).” 기생 라합의 기지는 자기 민족의 부패와 죄악을 알고 환멸을 느끼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듣거나 보고 바라던 바 믿음으로 여리고 성을 버리는 일이었다. 한데 믿는다하면서도 애굽의 도움을 바라는 자는 ‘가만히 앉은 라합’이 되는 꼴이다.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들의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펴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31:3).” 언제는 나는 저에게 이와 같은 주의 말씀을 전할 수 있을까? 듣다보니 저만 떠들어대는 일인데, 솔직히 저의 이야기가 뭐 재미있겠나? 막내동생뻘 되는 이의 이런저런 가치와 사고를 것도 나의 관심과 저의 관심이 전혀 다른 것인데 무슨 흥미가 있기는 하겠나? 때론 사명감으로 때론 예전의 나를 돌아보며 저의 영혼을 불쌍히 여김으로 마주대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에 나 역시 다를 바 없었다는 데 동의하는 것은,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 3:23).” 아니 그러했던가? 교회를 다니면서도 나름의 율법과 도덕으로 자신의 기준이 달랐고, 세상 사람들과 어울릴 때에도 나름의 윤리와 선을 추구하며 살았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시 81:6).” 오늘 시편의 말씀을 이어서 살펴보아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지 나의 의지나 노력으로가 아닌 것을 고백한다. 그때에는 로버트 M. 퍼시그의 <선을 찾는 늑대>로 살았다. 어느 대목에 ‘우리는 모든 것을 의식하고 기억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면 우리는 제대로 사고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는 모든 것들 가운데에서 무언가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을 한 후에 의식하는 것들은 본래의 의식과는 다르다. 선택의 과정이 이미 의식의 내용을 변질시킨 것이다(87p).’ 하는 내용을 기억한다.

 

오늘 말씀으로 다시 읽어보면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즉 우리가 기억하고, 느끼고, 깨닫고 그래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선택적인 것이다. 전부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에 따른 선택은 본래 목적과는 다른 의식 체계를 갖는다. 작가는 오토바이를 타고 여행하면서 삶의 의미를 성찰하는 내용으로 기억한다. ‘결국 나는 모터사이클을 분석하는 동시에 하나의 구조물을 쌓아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개념의 구조를 정식으로는 [체계]라고 부르며 고대에서부터 모든 서구지식의 기본구조가 되어 왔다(104p).’ 뜬금없이 이 책을 읽으면서 받았던 인상과 오늘의 말씀과 어제 누구와의 대화에서 나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곧 ‘발견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단순한 것이다. 그것은 단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세상에 내놓는 것일 뿐이다.’ 하는 저 작가의 말이 어제 주인 사장의 이야기를 듣다 지난 날 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뒤미처 알게 되는 부끄러움이라고 할까… “하나님이 애굽 땅을 치러 나아가시던 때에 요셉의 족속 중에 이를 증거로 세우셨도다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시 81:5-6).”

 

아, 이게 또 왜 서로 연결이 되었는가 했더니 사모로 살며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동기 여전도사의 여러 겹의 염려(아내로, 아이엄마로, 사역자로 겪는… 그러면서 돈 문제!)를 문자로 받고, 또 한 친구는 조카가 출감하고 나온 소식을 잠깐 언급하고 염려가 앞서는 일에 대하여 나의 생각이 같은 곳을 바라보게 하신 까닭이었겠다. 그런 우리에게 말씀은 일갈하신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 갈라디아 사람들이 오늘의 내 모습이 아니던가?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희생을 보고, 듣고 잘 알면서도 어찌 이를 모르는 사람들과 다를 게 없이 염려하고 근심하며 사느라 아등바등 진을 빼며 살고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대속 제물이 되어주셨다(히 9:11). 그래서 이제 더 우리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12).” 그리하신 십자가의 도를 알고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13).” 깨닫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14).” 느끼면서도 어찌 사는 일에서는 번번이 또 애굽을 기웃거리며 저들과 다를 게 없는 염려와 근심으로 살고 있는 것일까?

 

감사가 감사로 다가오지 못할 때 염려가 그 틈을 잠식해버린다. 감사하지요, 감사한데 사람으로 사는지라… 하면서 자신을 버려두는 그곳에서 잡초가 자라고 가시엉겅퀴가 받은 말씀의 은혜를 자라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 믿음으로 산다는 일보다 믿지 않음으로 사는 일이 훨씬 더 익숙한 가운데, 안 믿는 저에게 내가 무슨 말로 전도를 할 수 있겠나? 하고 한참을 떠들고 있는 저를 보며 주의 이름을 부를밖에. 나는 뭐 좀 다른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이와 같이 죽음과 심판에서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하신 이를 찬양한다. 고로 십자가의 능력은 나와 상관없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희생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어찌 나 같은 것을 구원하시고자 만유의 주 되시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죽으실 수 있었을까? 이를 찾고자 세계 각지를 돌며 <선을 찾는 늑대>로 살아간들 늑대는 늑대일 뿐, 그와 같은 수고와 애씀이 결국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온 땅의 백성과 제사장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칠십 년 동안 다섯째 달과 일곱째 달에 금식하고 애통하였거니와 그 금식이 나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한 것이냐?” 성경은 물으신다. “너희가 먹고 마실 때에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먹고 너희를 위하여 마시는 것이 아니냐(슥 7:5, 6).” 그러면서도 뭘 마치 하나님으로 인해 자신들이 희생이나 하는 것처럼 억울함을 호소하곤 하는 것인지! 엄연히 성경은 일러,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이는 자식을 키우는 일에서나 조카를 염려하는 일에서나 심지어 주의 일을 감당하는 일에서나 ‘무엇을 하든지’ 과연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있는가? 낙담이 오는 것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요3 1:5).”

 

다만 충일할 수 있다면. 충일함이란 ‘마음에 가득 차는 뿌듯한 느낌’으로 하는 일이다. 감사하면 감사한 것이지 감사는 하지만 염려가 있고, 감사는 한데 불만도 같이 하게 할 수 있겠나? 오늘 말씀은 다그치듯 야단치신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그러다 결국 세상 염려로 돌아서서 간 사람들이 내 곁에는 여럿이 있다. 기껏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다, 또는 사모로 살다 다른 이를 사랑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지만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게 우리의 한계다.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4).” 그러니 오늘을 사는 우리의 힘이 자신의 기준으론가 믿음으론가?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5).” 이 물음을 던지며 바울은 우리로 상기시킨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17).”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 이후의 일이다. 주님은 언급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막 12:24).” 이를 바울은 정립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믿음으로밖에는 이겨낼 재간이 없다. 아무리 세상이 어떻고 안 믿는 자들이 어떻다 해도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갈 3:22).”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시 81: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