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전봉석 2021. 6. 17. 05:48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3-14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

시편 85:7

 

 

사는 게 사역이다. 소명의식이 없이는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없다. 부르심에 대한 확신은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 1:9).” 이는 온전히 주의 기쁘신 뜻대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5).” 우리가 이 땅에 살기도 전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4).” 모든 것이 이루어진 터 위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이와 같은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소명이고 소명감이 믿음으로다. 그럴 때 이를 확신하게 되는 자리는 공교롭게도 어려운 지경에서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는 자리는 우리가 곤고할 때이다. ‘본질상 진노의 자식’으로 이 땅에서 살던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계기는 온전히 주의 뜻을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인데, 그 마음은 안이하고 평안할 때가 아니라 어렵고 불편할 때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시험이 있어야 공부도 하고, 경기가 있어야 훈련도 한다. 이런 일이 내가 나를 돌아보는 일은 번거로운 일인데 하물며 누구의 일을 두고 저를 돌아보는 일에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 애써 마음을 쓰다 내가 지쳐 고단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저들에게 고마움의 결실을 맺기는 더더구나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소명의식, 목사로 교사로 신자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는 분명한 확신은 본의 아니게 전쟁터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그럴 때, 우리는 상황에 따라 운명이 바뀌는 게 아니다. 이미 정해진 길을 따라 상황은 돌출된다.

 

어제는 이래저래 마음이 어렵고 힘든 하루였다. 누가 무슨 일로 어려움을 겪는 것과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을 동시에 얹고 있었다. 할 때,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시 57:7).” 이와 같은 말씀을 여러 번 되뇜으로 새 힘을 얻는다. 예수님의 역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마 5:11-12).” 우리의 박해라 하면 스스로 느끼는 모멸감에서부터 실제 당하는 현실의 이런저런 옴짝달싹 못할 지경의 일들로 옥죈다.

 

가령 아내는 손위처남과 친정엄마의 권유로 어디 아파트를 분양 받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저들이 도와주겠다는 말에 힘을 얻어 나의 동의를 구하였다. 나로서야 마다할 일이 아니다. 생각 같으면 처가 덕을 좀 보는 것으로 이 얼마나 좋은 기횐가? 남들은 ‘영끌(영혼까지 끌어 모아 돈을 마련한다는 신조어)’로 아파트를 장만하고, 어디 신도시에 분양을 받으면 그와 동시에 ‘로또’에 맞은 것이라고들 하는데…. 그런데 나는 그와 같은 상황이 즐겁거나 기쁘지만은 않았다. 일찍이 주 앞에 부르심을 받을 때(나는 이를 ‘당할 때’로 표현하고 싶다. 앞서도 주의 부르심을 받을 때마다 나는 곁길로 빠졌고 그럴 때마다 십년씩 훅훅 지나갔던 터라, 이번에는 강제로 이끄시고 붙들려서, 당했다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 더는 내 의지로 집을 꾸리고 돈을 벌고 교회를 하네 마네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왜냐하면 그럴 때마다 그러는 동안 나의 기질은 안달복달 돈을 넘어서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해서이다. 또한 그때마다 하나님의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누구보다 생생하게 체험하며 살았다. 그래서 더는 내가 나서서 은행에 카드를 만드네, 어떤 대출로 무슨 손익계산을 통해 무엇으로 갈아타네, 하는 식의 궁리와 애씀을 중지했다. 그런데 지금 아내가 종용하는 것은 ‘특별 분양 영순위’의 기회로 나를 내세우고 싶어하고, 이를 손위처남은 백분 활용하여 모든 다 도와줄 테니 청약도 하고 분양권도 따라는 것인데….

 

얼마 전에도 그 일로 아내와 약간의 다툼이 있었고 내 뜻을 바로 전했다. 그런데 어제 또 저들은 이런저런 현실을 논하고 다시 내게 권하는 것이라, 나는 새삼 우리가 가는 길에 대한 소명감의 확신을 되새겨야 했다. 돈과 여자가 길을 막는다. 목사들 열에 아홉은 돈과 여자로 맥없이 무너지고, 하나 더 보태면 자신이 어찌 감당하려하는 자긍심으로 복음 아닌 것에 매진하다 탈선한다. 여럿 그런 이를 보았고 저들의 공통점은 속된 말로 눈이 뒤집혀 아무 것도 보지 못하였다. 곁에서 누가 뭐라 하면 총구를 겨누기 일쑤다. 자신이 옳은 것이다. 나는 내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란 걸 잘 안다. 제어가 안 된다. 머리로는 알겠는데 몸이 먼저 달려간다. 그러는 것을 숱하게 보았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게 주의 뜻이겠거니 하고 감사하고 받으면 되지? 하는 아내의 말에 나는 어지러웠다. 그게 스스로 되었던가?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그래서 나는 오늘 내게 두신 장애와 불안과 가난을 복으로 여긴다. 비로소 감사도 한다. 이것으로 허튼 데 기웃거리지 않는다. 나는 큰일에 쓰임 받는 큰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 사명을 감당하는 게 아니다. 언감생심 그런 마음은 꿈도 꿀 수 없는 위인이다. 나는 누구보다 나를 믿지 않는다. 나의 허물과 부끄러움, 그 이상의 것도 다 까발려져 드러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조롱거리가 되고 비난의 대상이 된다 해도 이 진리를 더는 벗어나고 싶지 않다. 댄 알렌더는 사명자를 ‘절름발이의 발걸음’으로 야곱을 들어 비유하였다. 나야말로 전혀 쓸모없는 것인데 이처럼 말씀으로 붙드시고 한 영혼을 마주하게 하신다. 누가 내게 어떤 일을 가지고 전화를 한다. 그냥 내가 친구여서 그런저런 부끄러운 가정사를, 개인의 아픔을, 말할 수 없던 비밀을 말하는 것이겠나? 나는 목사다. 내 뒤에 하나님이 계심을 저들은 안다. 기도를 부탁하고, 같이 염려하며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는 게 내가 어떤 자격증을 가져서가 아니다. 저의 마음에 주를 경외하는 마음이 있으니까, 지금 당장 자기 코가 석 자인데도 후원헌금을 올려서 보낸다. 이래저래 섬기는 마음을 다한다. 나를 높이자는 것이겠나? 그리 여겼다가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이번 교회 공사에서도 생판 모르는, 상관도 없는 주인이 교회로 세든 우리 교회를 온전히 보전하려 애썼다. 나는 저를 위해, 그 사업을 위해 주께 기도한다. 이는 내가 어찌 행하는 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리 하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함이고, 그리 마음으로 받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함이다. 어제 아내에게도 그런 바를 다시금 강조하였다. 우리가 가는 길이 일반인 또는 평신도(그리 나누는 것이 이해를 돕는다면)의 길과 어찌 같겠나? 저들은 기회가 왔을 때 투자도 하고 그런 여력으로 부자도 되고 그것으로 주를 섬기게 하려 하심일 것이고… 우리의 소명은 교회를 중심으로 말씀을 가지고 상한 심령을 마주하는 일로, 돈도 안 되고 설령 잃는 게 더 많다 해도 기꺼이 주의 이름으로 이 길을 걸어가는 특수성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아내에게 일러 같은 곳을 바라보지 못하고 같은 것을 바라지 못하면 우리가 어찌 이 길을 같이 가겠으며, 가는 내내 서로가 어찌 불편해서 기쁨이 되겠나? 하고 당부하였다. 가정예배를 마치고 둘이 잠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단호히 내 뜻을 전했는데… 모르겠다. 나는 늘 내가 자신 있어서 뭐 좀 잘났다고 이 일을 감당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나야말로 꼴불견인 것을 나도 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어려움이 우리로 깨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8).” 가뜩이나 누구 일로, 누가 처한 상황에 마음이 같이 동요하면서 심장이 뛰고 마음이 어려워 평소보다 안정제를 구겨 먹으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하찮은 사람인데, 누구보다 아내를 설득하고 이해시켜 주의 길 가는 우리의 사명을 알게 하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닌가보다. 요즘은 저녁이 되면 온몸이 녹초가 되어 누웠다 하면 잠이 든다. 그렇게 내가 나를 주 앞에 내어놓고 주를 마주하는 자리는 역설적이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으로다. 내가 내 삶을 얼마나 자주 엉망으로 망치며 살았는지, 살고는 하는지, 서로의 관계를 깨곤 하는지, 이를 알면 알수록 나는 누구보다 자격도 자질도 안 된다는 것을 고백한다. 이때 말씀의 역설은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10).”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하는 확신을 더한다. 언제 우리가 어려움 없이 주의 이름을 부른 적이 있었던가? 곤고하고 지쳐 쓰러질 때 외에는 주를 그처럼 바라고 구한 적이 있었던가?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시 85:7).” 이상한 일이면서도 축복의 놀라운 역설은 고통의 때다. 친구의 애타는 마음은 조카의 일로 씨름하다, 아버지의 장례와 어머니의 건강으로다 염려 위에 염려를 더할 때 기도를 하게 되고 말씀으로 더 가까이 하게 되는 것을 본다. 누가 기도를 부탁할 때 좋을 때야 나 같은 게 안중에나 있겠나? 이런저런 말을 듣게 하시고 저들의 어려움에 같이 동조하고 주의 마음으로 감정이 이입되게 하심으로 나도 죽겠는데 한 짐 더 얹어두는 무거운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때,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롬 13:12).”

 

주가 아니시면 하루를 더 산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말씀으로가 아니면 뭔들 누리고 산다고 만족함이 있겠나? 더는 그런데 기웃거리지 말자. 마음을 빼앗겨 끌려 다니지 말자. 나는 내 영혼에 두고 다짐을 하듯 이른다.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굽어보도다(시 85:10-11).” 고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엡 1:7).” 하면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9-10).” 철학적으로 들리겠지만 왜 사나? 왜 하루를 더 살고자 하나?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 언제 누구의 운명 앞에서 저와 마지막 성경구절로 함께 읽으며 저의 영혼을 주의 손에 맡기고 돌아설 때가 생각난다. 나에게는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은혜를 주셨는데, 이를 누리며 사는 소명자로 우리를 부르심이다.

 

하여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23).” 주의 뜻을 바로 알자.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주소서(시 85: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