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전봉석 2021. 6. 21. 05:03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엡 5:1-2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

시편 89:5

 

 

예수님은 드러내어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하나님은 드러내어 영광의 나라와 그의 의를 나타내신다.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이 내 인생에 기록하신 어떤 이야기를 독해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남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인다.

 

이미 우리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에 쓰였다. 그 쓰신 이의 의중을 깨달아 알고 그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실제로 남은 이야기의 공동저자로 쓰임 받는 길이다. 분명한 것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심지어 못마땅해 한다. 자기 이야기에 만족스러운 사람은 없다. 그래서 다들 원저자에게 불만이 있다. ‘~하였더라면’ 하는 가정문으로 아쉬움을 갖는다. 그렇게 실제 자기 이야기에 불만이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그 마음에 모시기를 싫어한다. 내 이야기를 자기 마음대로 쓰신 이에 대한 불만이다. 그러니 어쩔 것인가? 내 맘 대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다시 살 수도 없으니, 그런데도 원저자만 원망하며 살다 말 것인가? 내가 내 이야기를 좋아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그래서 내 맘대로 살았다고 해서 과연 좀 후련하던가? 그건 또 맘에 들던가?

 

나는 요즘 댄 알렌더의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천천히 다시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다. 결국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다. 원저자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쓴 저자를 사랑하면 어째서 나의 이야기를 이렇게 썼는지, 내 인생이 왜 이 모양인지, 새롭게 읽히고 그 의미를 알게 되면서도 나를 사랑하게 되고 주를 사랑하게 된다. 곧 원저자를 사랑하면서부터 나를 사랑할 수 있다. 내 이야기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된다. 흔히들 다시 산다면… 하는 따위의 가정문을 내세우며 상상하곤 하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사람은 없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우리가 다른 점은 이를 이제 안다는 것이다. 이어서 오늘 말씀으로 보면,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 나의 이야기, 내 인생을 설계하시고 창조하시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성하신 이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알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이 좋고 믿음이 뛰어나다 해도 하나님이 인생의 다음 페이지를 쪽 대본처럼 먼저 보여주시지는 않는다. 대본을 받아보는 사람은 연기를 하는 것이지 실제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럴듯해도 최불암은 최불암이고 김혜자는 김혜자다. 둘 다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들에 대한 호평을 겸손하게 말하며 ‘작가가 그리 써준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곧 우리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이 써주신 삶을 산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본은 성경이다. 다윗과 바울과 요나와 예레미야의 삶이 내 이야기다. 우리는 누구도 자기 인생을 연기하는 연기자가 아니면서도 동시에 이미 다 쓰인 삶을 사는 것인데, 앞서도 말한 것처럼 아무리 마음에 안 들고 못마땅한 자기 이야기라 해도 작가의 의도나 목적을 알고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이에 그 영광에 우리도 동참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여호와여 주의 기이한 일을 하늘이 찬양할 것이요 주의 성실도 거룩한 자들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하리이다(시 89:5).” 다소 긴 오늘 시편의 말씀에서 나는 이 한 구절을 여러 번 되뇌며 묵상하였다. 주의 기이한 일, 그 가운데 나란 사람의 이 하찮고 보잘것없음에도 불구하고 귀히 다루시며 주인공으로 삼으신 것에 대하여 ‘하늘이 찬송할 것’처럼 나도 이제 찬송하기를 원한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어릴 때 아버지는 내게 늘 ‘하나님의 뜻’을 강조하며 ‘하나님이 너를 참 많이 사랑하신다. 귀히 쓰신다. 복되다.’ 하는 말씀을 하곤 했다. 그때는 그게 그저 듣기 좋은 위로나 부모로서 안쓰럽고 미안해서 하는 소리이겠거니 하고 여겼었다. 그러니 이제 잘 안다.

 

손명희는 의사의 부주의로 소뇌를 손상하여 태어나면서부터 제 몸을 가눌 수 없는 불구가 되었다. 이에 부친은 술로 모친은 병약한 몸으로 전신마비인 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였다. 저는 일어나 앉지도 못했고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도 못하면서 자랐다. 저는 자신을 그리 만든 부모와 하나님을 원망하였고 열여섯 살 되던 해에 극심한 절망 가운데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마 11:26).” 저에게 예수님의 기도가 자신의 이야기가 된 것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25).” 그러면서 또 한 구절의 말씀,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눅 10:23).” 그렇게 저는 ‘열리다’는 의미의 <에바다>라는 제목의 시를 지었다.

 

열어 주소서 열어 주소서

내 눈을 열어주소서

주님 바라볼 수 있도록.

열어 주소서 열어 주소서

내 귀를 열어주소서

주님 말씀 들을 수 있도록.

열어 주소서 열어 주소서

내 맘을 열어주소서

주님의 뜻 깨달을 수 있도록.

열어 주소서 열어 주소서

내 입을 열어주소서

주님 말씀 전할 수 있도록.

 

손명희는 사지를 뒤틀고 앉아 왼 손에 몽당연필을 쥐고 울먹이면서 자기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게 되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문득 다시 드는 생각은 우리에게는 얼마든지 하나님이 먼저 건네시는 쪽 대본이 있다. 연기자는 연기를 하지만 우리는 자기 이야기를 한다. 손명희의 이야기는 우리 손에 앞서 들려주시는 쪽 대본이다. 하박국 선지자의 찬양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싶다가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나의 이야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누가 뭐라든, 실제 내 자신이 어떠하든, 그것이 어떻든지… 하나님이 나를 누구보다 귀히 여기시고 엄청나게 사랑하고 계심을 알면 알수록,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 16:33).

 

이와 같은 말씀이 내 이야기 가운데 들어와 나의 이야기가 된다. 그러할 때,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20).” 이것이 나를 가리켜 하시는 말씀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면 오늘 시인의 고백이 결코 넋두리가 아닌 것을 알게 된다.

 

나의 때가 얼마나 짧은지 기억하소서

주께서 모든 사람을

어찌 그리 허무하게 창조하셨는지요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자기의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지리이까 (셀라)

(시 89:47-48).

 

저마다 다 사는 일이 다르고 그 이야기는 각자의 손금처럼 어떤 이야기도 같은 것이 없지만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이제는 하나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9).”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하나의 목표가 생긴다.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10).” 그렇게 우리는,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이는 곧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16, 17).”

 

오늘 하루도 새로 쓸 나의 이야기는 실제 하나님이 써두신 나의 이야기로 이제 나는 하나님과 공동저자로 산다. 그렇게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20-21).” 할 때에,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시 89:1).” 그리하여,

 

내가 또 그의 손을

바다 위에 놓으며

오른손을 강들 위에 놓으리니

그가 내게 부르기를

주는 나의 아버지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구원의 바위시라 하리로다

(25-2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