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살전 1:2-4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시 99:9
귀찮고 성가시다가도 연락이 안 되고 답이 뚱하면 신경이 쓰인다. 대충 듣고 말던 말이 한참씩 그 의미를 더할 때도 있다. 누구 일로 이래저래 마음이 쓰이는 것은 우리의 맡은 바 역할이다. 오늘 말씀도 그리 읽힌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우리는 서로이면서 맡은 자이다. 누구로 인해 감사하고 기도한다. 또한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어찌 그 믿음을 지키며 살고 있는지, 행여 다른 데 마음이 기울지는 않았는지를 살피면서 그 소망의 인내가 여전하기를,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가 서로 통함이다(살전 1:2-4). 저들의 택하심을 아는 일은 같은 동류로서 주를 바람이겠다.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는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두셨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5).” 하여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16).” 영생은 하나님께 대한 갈망이다. 우리 영혼의 갈급함이 있다. 그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 영원은 우리의 선택을 유도한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두 알약 가운데 선택하게 한다. 하나는 평안히 쉬며 잠이 드는 것이고 하나는 도전하여 망가져가는 세계를 구원하는 일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때 우리 안의 영생은 이와 같이 우리로 가야 할 길을 알게 한다. 인생의 경로를 결정하는 단초가 된다. 즉 언젠가는 내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과 대면하여 함께 할 존재임을 일깨운다. 영생은 우리로 이상적인 자아를 바라게 한다. 곧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왜 더는 죄를 멀리하고자 할까? 자신의 죄 됨을 증오할까? 세상이 마냥 즐겁고 좋고 좋은 것 같으나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이 모든 결정은 영생으로 인한 것이었다. 여기서 사는 게 전부라면 굳이 뭘 그렇게 애쓰며 수고하고 선을 바라고 의를 구하며 살려 하겠나?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6).” 하여 우리는 참는다. 뿐만 아니라 싸운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6:12).” 영생은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를 앎으로 하나님을 바라게 된다. 이에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딛 1:2-3).”
영생을 내게 맡기셨다. 이 놀라운 증거는 누구로 인해 주의 이름을 부른다. 어떤 일에 성급히 나서지 않고 공연히 따르지 않는다. 세상을 경계할 줄 안다. 누구 말에 성경으로 다시 되새기게 된다. 그리하게 하심을 느끼는 것이다. 내가 하려들면 지칠 뿐이다. 속상하고 답답하다. 그저 모르는 척 멀리하고 싶기도 한다. 그런데 자꾸 신경이 쓰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할 때 일일이 답을 주고는 일은 피곤하다. 그래서 무심하다가도 연락이 없거나 돌아오는 답이 뚱하면 마음이 쓰인다. 이 마음은 영생을 품은 마음이다. 어째서일까?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 46:4).” 아, 주께서 나를 품으셨다. 주가 지으셨으니 주가 업으신다. 품고 구하신다. 책임지시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말씀으로 모든 의문이 풀리는 것 같다. 내가 왜 누구로 인해, 저의 말에 신경 쓰고 씨름하듯 마음이 어려운가 했더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곧 영생은 받았으니 이는 내가 이룬 게 아니었다. 온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다. 즉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1:11).” 오늘에 이 모든 이야기는 어쩌다 그리 되고, 그러다 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위하여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주가 오셨고, 나로 예수께로 이끄시며 마지막 날까지 살게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쓸데없는 논쟁으로 소모하지 않는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딤후 2:23).”
하면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24-26).” 우리가 왜 점점 더 온유하여 가는지를 알게 된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있는 것으로 족하고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 곧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설령 그것이 남들보다 못하고 저들이 우습게 여기며 한심하게 생각하는 일이라 해도, 그것으로 우리는 마음을 다스린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하나님을 본다는 것, 영생을 취함이었다.
설교원고를 작성하다, ‘현재의 나는 나의 선택의 결과이다.’ 하는 댄 알랜더의 말을 옮겨 적고 한참을 서성거려야 했다. 누구와의 사이가, 어떤 일에서, 무슨 결과가 실은 다 그렇지 않던가? 그와 같은 선택이 오늘 우리를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담의 선택으로 온 인류는 죄 가운데 놓였고, 그것으로 인하여 모두가 사는 일이 지옥 같을 뿐이다. 선택에 따른 결과는 예측할 수 없었으나 스스로 존재하면서 그 통제 밖의 삶으로 산다. 기도를 하고 안 하고, 해도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 하는지에 따라 우리 영혼의 상태는 달라진다. 이때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 그 마음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에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이를 알면 알수록 오늘의 이 모든 이야기가 어떤 것 하나도 사사로운 게 없다는 것을.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1).”
이와 같은 말씀을 따라가다 보면 덧붙일 말이 없다. 나의 감상이나 느낌은 한낱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벼울 따름이다. 애써 수고하며 무슨 일로 죽을 것처럼 힘에 겨워하다가도,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고 내가 품고 구하여 낼 것이다.’ 하시는 주의 말씀 앞에서 안도하게 되는 것이다(사 46:4). 그리하여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9).”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와 같은 단호하심에 안도한다. 더는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10).” 이 놀라운 은총 앞에서 나는 산다. 오늘의 이야기는 그리하여 중요하지만 그리 연연해하며 끌려갈 게 못 된다. 하여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그래서였다. 그래서 그럴 수 있던 것이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어째서 약속을 받고도 그에 따른 증거를 보지 못하면서도 소망 중에 살아갈 수 있었는지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히 11:39-40).” 성경이 성경으로 말씀하신다. 말씀이 말씀으로 증거가 된다. 우리 안에 두신 영생이 괜한 기대가 아닌 실체인 것을. 하여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시 99:9).” 다시 말해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알게 하신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오늘 바울도 이를 확증하고 증거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고 지치는 환난 중에도…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6).”
어째서인가? 이는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10).” 예수로이었다. 오늘을 살며 참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이 말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 고로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시 99:1, 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