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전 3:13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시 101:2
무엇을 하든 열정이 필요하다. 열정은 열렬한 애정과 그 일에 최선을 다하며 열중하는 것을 말한다. 열정의 어원이 고난이다. 어려움과 역경이 우리로 하여금 그 일에 더욱 집중하게 한다. 이때 “오직 너는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그리하여 네가 눈으로 본 그 일을 잊어버리지 말라 네가 생존하는 날 동안에 그 일들이 네 마음에서 떠나지 않도록 조심하라 너는 그 일들을 네 아들들과 네 손자들에게 알게 하라(신 4:9).” 오늘을 살며 내일로 나아가는 데 있어 발목의 힘이 되어주는 말씀이다. 삼가 힘써야 하는 일,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아니하면 모든 게 허사다. 마음을 잃으면 어떤 결과도 기대하기가 어렵겠다.
보면 늘 나의 모습은 남의 기대에 부응하는 것이다. 이를 볼 때 주어지는 역할이지만 감당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해진 것이지만 만들어가야 하는 일이다. 가령 장모가 인천 병원으로 치료차 오셨다. 치료를 끝내고 집으로 모시고와 점심을 같이 먹었다. 그러면서 주일은 어찌 지내시는가 여쭈었다. 코로나 확진자가 늘면서 예배는 화상으로 보고 교회는 나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나는 벼르던 말을 꺼내었다. 평소 다니실 곳은 다 다니고 해야 할 일은 마다하지 않으면서 어찌 예배만 코로나로 주의하시는가? 이제 살아생전에 주일을 지키며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되시겠나? 평소에 그런 말을 하거나 뭐라 참견하는 것을 싫어하는 나로서 면전에서 그와 같이 말씀을 드린 것은 의외였다. 더욱 신기한 것은 손위처남이 오후에 모시러 와서는 이번 주일에 오겠다는 소릴 하였다니….
하루를 살고 또 누구와 어떤 일로 얽히고 엮이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지만 이는 주어지는 것이면서 동시에 감당하는 일이기도 하다. 즉 나는 그때 그 말을 했지만 안 할 수도 있었다. 나는 오늘 이 일에 열정을 가지고 감당할 수도 있지만 막연하게 이끌려갈 수도 있다. 아침 일찍 누가 무슨 일로 카톡을 주었다. 당면한 어려운 일을 알리고 답답함을 호소하듯 기도를 부탁하였다. 자, 이는 내게 주어지는 일이면서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할 때에 모든 지킬만한 것 가운데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되새기게 된다. 어떤 일 앞에서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나는 저의 이름과 사연을 간단하게 메모하고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었다. 나름의 적극적인 관여다. 곧 나의 하루는 정해진 것이면서 동시에 만들어가는 날이다. 그러든지 아니 그러든지 하루는 오고 간다. 그와 같은 하루에 나는 어쩔 것인가?
이를 위해 오늘 바울은 기도로 말씀을 진술하고 있다.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3).” 이 한 날의 수고는 오늘 하루 일로 족하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주신 한 날의 수고로 족하고 이에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내는가, 하는 것으로 주께 영광이 된다. 그야말로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겠으나 그저 사는 일과 주의 뜻에 합한 자로 살아드리는 일은 다르다. 앞서 내일을 운운할 필요는 없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그러하다면 한 날의 수고로 이미 족한 것이다.
말이 좀 우습지만 나는 자주 이를 묵상한다. 비가 잦은 날씨와 곧 장마를 앞두고 있으면서 내 몸은 벌써 천근만근이다. 몸의 일과 마음의 일이 어찌 서로 다르겠나만 때로는 일부러 분리시킨다. 아니면 자주 몸에 이끌려 마음은 저 혼자 힘들고, 마음 때문에도 몸은 더욱 만신창이가 된다. 온몸에 파스를 붙이고 혹시 몰라 진통제를 상비하고 다니면서, 누구 말마따나 몸뚱이 하나 건사하는 일이 고역이라. 그러니 내일은 어쩌나, 하고 염려를 앞서 끌어다 놓으면 난감할 따름이라. 나는 누구에게 말하기를 이 모두는 주어진 것이지만 동참하는 일이어야 한다. 즉 내 몸도 오늘의 처지도 주어진 것이라 하겠으나 이를 살고 감당하는 데 있어 ‘살아드리는’ 자세로가 필요하다. 의식하고 이처럼 앉아 말씀에부터 몸을 끌어다 앉히는 일에까지. 누구 일로 그저 듣고 넘기기보다 그 일에 관여함으로 내 일로 삼는 것에까지. 이 일을 다루시는 이와 함께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닐까?
이를 알면 알수록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큰 사자나 젊은 사자가 자기의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릴 때에 그것을 치려고 여러 목자를 불러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소리로 말미암아 놀라지 아니할 것이요 그들의 떠듦으로 말미암아 굴복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와 같이 나 여호와가 강림하여 시온 산과 그 언덕에서 싸울 것이라(사 31:4).” 하나님은 결코 나를 포기하지 않으실 것처럼 나는 주를 더욱 바라며 이 한 날의 일로 집중하는 것,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것을 주목하는 일. 그 일을 그저 그러려니 하고 받는 게 아니라 젊은 사자가 자기 먹이를 움키고 으르렁거리며 절대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 이것이 열정이겠다. 하루하루를 이와 같이 주께 집중하면서 누구의 일로 또는 무슨 상황 앞에서, 이 일을 한 번은 장모에게 말씀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하고 벼르고 있었는데 받고 안 받고는 내 몫이 아니다.
가령 누구에게 글을 쓰라, 자기 이야기를 언어화한다는 것은 형상화하는 일로 자기 일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일렀다. 그러나 이를 받고 안 받고는 저의 일이다. 희한한 일은 하려고 하면 동시에 우리 마음속의 어떤 부정적인 습성도 동시에 같이 작동을 한다. 그래서는 이래서 자신이 없고 저래서 어려울 것 같고,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눅 14:18).” 참 이상하지? 변명은 조건반사처럼 우리 마음을 어느새 붙들고 놓지 않는다. 여러 해 동안 아이들을 상대하면서 보면 늘 그 아이가 그런다. 늦는 애가 항상 늦고 이런저런 이유가 있는 아이가 항상 이유를 대고 변명을 한다. 저들의 공통점은 그래서 뭐라 이르면 억울해한다. 나름은 할만큼 했다는 마음이 강하게 저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19).” 그러니 저마다 할 말이 있는 것이다. 그걸 두고 뭐라 하면 적대감이 먼저 인다.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20).” 그러니 어쩔 것인가? 보면 손에 익고 오래된 애착일수록 낡고 볼품이 없다. 다 해진 것을 버리지 못하게 하고 끌어안고 사는 것이다. 애착인형이니 애착이불이나 하는 걸 봐도, 장인은 손에 익은 연장으로 일을 연마하고 다스린다. 나는 그것이 말씀으로 묵상하는 것과 이를 글로 쓰는 일이었으면 좋겠다. 어제는 누구와 무슨 말 끝에 설교원도 쓸 때가 참 좋다고 하였다. 실제 그렇듯 집중을 하는 동안에는 공황도 잊는다. 불안도 근접하지 못한다.
그러하여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시 101:2).” 하는 오늘 시편의 말씀을 그렇게 적용한다. 나의 글쓰기는 읽는 자를 위한 게 아니라 쓰는 자를 위한 것이어서 어쩌면 누가 지적한 것처럼 ‘어렵다’는 말이 맞다. 그런데도 개의치 않는다. 소설가 박완서는 자신의 글이 독자에게 쉽게 읽히게 하려고 숱한 교정과 문장 다듬기로 시간을 연마했다. 이를 문학평론가 김치수는 칭찬의 의미로 저의 글은 읽기 쉽다, 하고 말하였다가 작가로부터 볼멘소리를 들었다.
본래 글은 읽는 자의 것이고 말은 듣는 자의 것이다. 이를 위해 요령도 필요하고 연마도 요구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버렸다. 누굴 위해 쓰거나 말하지 않으려 한다. 저의 영혼을 다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다만 확신하건대 나의 깨떡 같은 말이 어떠하든지 찰떡 같이 들리게 하시는 것도 주의 감동으로다. 누구는 나의 어설픈 권유에 선뜻 글쓰기를 감행하고 가깝지 않은 길이고 여의치 않은 환경인데도 일주일에 한 번 오겠다고 하였다. 저가 한다고 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누구는 공들여 권하고 마음을 더했어도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는 것을 보고 알았다. 내 일이 아니다. 내 일은 따로 있다. 이는 주가 하실 일이다. 나는 다만 주어진 날에 동참하되 열정적으로, 열중하는 것이다. 하긴 누가 예배에 나오고 안 나오고, 같이 하고 안 하고, 교회를 이뤄가는 것을 보면 이상할 정도로 나의 예상은 번번이 빗나갔다. 이 사람은 같이 할 거다, 여겼던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설마 이 사람이랴 했던 이가 끝까지 곁을 같이 한다. 보면 모든 만사가 다 그런 것 같다. 그러니 섣불리 판단하지도 나서지도 말아야 할 이유다. 주가 하신다.
나에게 주어지는 하루다. 다만 그 순간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일, 이를 오늘 바울의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듣는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갈 수 있게 하시오며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전 3:11-13).” 다만 원하고 바랄 뿐, 그리 행하실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곧 나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면서 나의 참여다. 내게 주어진 일이면서 맡은 일을 수행하는 열정으로다. 그때에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시 101:1).” 나는 오늘 시편의 말씀을 되새기다 사모한다.
곧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2).” 분명히 또 넘어지고 삐끗하고 쓰러지기 일쑤이겠으나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다 끊어지리로다(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