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전봉석 2021. 7. 4. 05:36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 4:3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 102:27

 

 

다들 자기 관심에만 시선을 둔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어려움이나 슬픔에는 외면한다. 그러니 채 어려움이 이르기도 전에 시선을 돌려버린다. 시선을 거둔 곳에는 대체할 거짓 즐거움을 둔다. 위장하고 덧대어 어디까지가 거짓인지조차 분간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보이는 것도 보지 못한다. 같이 있으면서 누구도 믿지 않는다. 능력이 있고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이러한 경향이 강하다. 믿음이 결여된 사람들은 자신만 믿는다. 그러면서도 실은 스스로도 믿지 못한다. 이는 모두 인정하지 않은 작은 어려움으로부터 생겨난 불신이다. 오히려 슬픔을 슬픔으로 받아들일 때, 그것을 인정하고 더는 끌려 다니지 않는다. 이는 젖 뗀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긴 것 같이 평안함을 준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젖 뗀 아이라 하면 자기 의지로 엄마 품을 알고 그 안에 안겨 평온을 바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1).” 이는 마음이 교만하지 않고 눈이 오만하지 않음으로,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위해 애쓰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를 너무 높이 보지 않는 것, 곧 자기 힘을 의지하려 하는 유혹으로부터 이겨내는 것. 이들을 가리켜,

 

하나님이여 그들의 입에서 이를 꺾으소서

여호와여 젊은 사자의 어금니를 꺾어 내시며

그들이 급히 흐르는 물 같이 사라지게 하시며

겨누는 화살이 꺾임 같게 하시며

소멸하여 가는 달팽이 같게 하시며

만삭 되지 못하여 출생한 아이가

햇빛을 보지 못함 같게 하소서

 

 

하고 시인은 주께 아뢴다(시 58:6-8). 이는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겠다. 스스로 마음이 교만하고 눈이 오만하지 않도록, 스스로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일을 두고 씨름하지 않도록. 다만 나를 높이시고 낮추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것을,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75:7).”

 

역설적이게도 나의 염려증은 교만으로 인한 것임을 인정한다. 내가 어찌하려드는, 그럴 수 있다고 여기는 것에서 기인한다. 가령 누구 일로 나의 평온은 깨진다. 허울 좋게 안타까워하고 속상해하지만 이는 내가 어찌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는 자책으로 이는 마음이다. 그러면서도 상대는 나에게 털어놓고 나의 어려움으로 평정을 찾고 위로를 얻는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누구의 고백으로 저의 안에 수십만 개의 꿈이 깨져 있었다는 데 주목한다. 깨진 꿈은 마치 유리조각처럼 딛고 서는 발을 찌르고 손을 대고 마음을 두는 족족 찌른다. 나는 저들의 슬픔이나 어려움을 규정할 없다. 무엇 때문이야! 하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엄연한 사실 하나는, 오늘 말씀에서 찾는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것을 동원하시는 뜻은 오직 하나다.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시 102:27).” 나는 이 짧은 말씀 앞에서 한참을 머문다.

 

누구의 일로 내가 어려워하다 나의 어려움이 주께 주목하게 하는 일은 복되다. 가끔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어서 어떤 자격증을 딸까, 알아보기도 했다. 정식으로 돈을 받고 밥벌이로 삼을까 하고 말이다. 그 내역을 살펴보니 신대원에서 상담심리를 들었던 학점을 인정해주고, 조금만 더 보태면 소위 말하는 자격증을 딸 수 있겠다. 요즘은 또 ‘배움카드’라 해서 하려고만 하면 국가지원으로 무료로도 가능한가보다. 실은 몇 번을 뒤적이고 그 사이트를 저장도 해두었다. 그러면서도 풋, 하고 웃고 마는 까닭은 내 곁으로 두시는 나름은 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처럼 허우적거리는데 전혀 모르는 남을 것도 안 믿는 자들이면 저들을 어찌 감당하려고… 하는 마음이 늘 가로막는다. 이를 밥벌이로 사업구상을 하는 일도 옳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은 번번이 나의 그런 마음을 막으신다. 누가 종종 권하며 심지어 적극적으로 어디 소속 무슨 학회 어쩌고 하며 구체적으로 나를 드밀려고 할 때 나는 얼른 말씀을 상기한다. ‘마땅히 행할 그 이상의 일을 바라지 않는 것.’ 어쩌면 우리의 어려움은 감당하지 못할 그 이상의 일로 씨름하기 때문이다. 잘되면 우쭐하고 못 되면 낭패인 것을. 이 빤한 답을 두고 씨름한다는 게 어리석다.

 

성경은 이르시기를 자기 자리를 바로 하는 게 중요하다.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잠 25:6-7).” 어차피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2).” 우리는 누구도 누구의 처지를 규정할 수 없고 하물며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 같이 왕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3).” 하여 오늘 말씀은 우리로 이처럼 미숙하게 두시는 것은 거룩하게 하려 하심이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하여 주님은 기도하셨다.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곧 우리로 거룩하게 하는 방법은 진리뿐이다. 진리란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 그러할 때,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3:21).”

 

이처럼 말씀을 따라가며 나의 나 된 것을 수긍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귀하다. 누구에게 얘기할 때 나의 모자람을 가감 없이 말해줄 수 있어 다행이다. 전에는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수치심이었다면 이제는 그것으로 주를 말하고 말씀으로 다가가 진리를 알게 할 수 있어서 말이다. 나의 나 된 것이 은혜라 하는 사도의 고백이 알 것 같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이것은 오늘에 이르러 나의 고백이 되게 하신다. 누구 말을 듣다 저에게 일러줄 수 있는 게 일반적이고 통계적인 수치에 의한 게 아니라 나의 환자됨과 연약함으로 가능한 것이어서 말이다.

 

가령 어제는 장모가 이번에 받아간 약물 부작용으로 모두 토하고 속이 뒤집어져 고생을 하신 모양이다. 달려갈 수는 없으니 아내는 몸이 달아서 어떡하면 되냐고 내게 물었고, 나는 집에 상비약으로 무엇이 있는가, 없으면 약국에 가서 무엇과 무엇을 사다 좀 드시라 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덜어서 가져다 드리기로 하였다. 또는 누가 무슨 염려로 속이 볶여 명치끝이 어떻게 아프고 복부 중 어디가 어떻다는 데서 무얼 먹어보라고 이르며 실제 먹고 있는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 의사는 지식적으로 의학적인 판단으로 처방을 한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모두가 개별적이어서 약물에 모두 동일한 효과를 얻지는 못한다. 그럴 때 임시처방이라 하나 속을 진정시키고 마음을 평안히 할 수 있는 것은 환자로 사는 내가 더 나을 때도 있다. 전문가적인 반박이 따를 소리지만 저들은 의사로 살지 환자로 사는 사람의 그때그때 처하는 현실을 알지 못한다. 정신과 상담도 보면 수치와 일반적인 경향, 저명한 학자의 견해, 그에 따른 연구 결과를 대입시켜 ‘그래보자는 것’이지 그게 정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저도 잘 안다.

 

할 때, 우리의 의뢰와 의지는 누구에게 향하는 게 합당하겠나?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시 102:28).” 오늘 본문은 일침을 가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끝으로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배웠으니 곧 너희가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살전 4:1).” 곧 우리의 어떠한 결정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이를 사도는 누누이 강조한다.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2).”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3).” 하고 이어지는 음란에 대한 경계를 주목하여야 한다. 한 마디로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6).” 음란의 근간은 형제를 해하는 일로 거룩을 저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다. 음란을 성적인 것으로만 국한 짓지 말고 좀 더 확장하면 남의 어려움이나 당면한 현실에 대해 마치 자신이 이를 규정하고 단정 지어 어떤 처방을 내리는 처사와 같다. 실은 나도 종종 이러한 유혹을 받는다. 누구 이야기를 듣고, ‘그러니 그렇지’ 하는 식의 마음은 옳지 않다. 누구도 남의 사정을 알 수 없다.

 

하나님만의 고유권한에 속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7-8).” 나는 그렇게 누구의 말을 듣고 저의 어려움을 같이 씨름하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12).” 곧 나를 향하신 주의 사랑과 긍휼하심으로다. 나는 누구에게 강요하지 않고 요구하지 않으며 그러는 대신 나의 어리석음과 끔찍했던 시행착오를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토설한다. 그것으로 부디 저는 먼 길을 돌아가지 않기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18).” 말씀이 나의 기틀이 되어 중심이 되고 기준이 되어주시기를. 하여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하게 하소서(시 102:1).” 다들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고 이를 토로할 때에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12).”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17).”

 

그리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때에 민족들과 나라들이 함께 모여 여호와를 섬기리로다(21-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