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전봉석 2021. 7. 7. 05:1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후 2:16-17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 105:19

 

 

우리는 단독으로 신앙을 이뤄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혼자 깨달음으로 득도하여 어느 경지에 이르는 종교도 아니다. 누구의 일로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저의 마음이 합하여 누구 일에 누구도 같이 하는, 함께 이루어 가는 한 몸의 지체다. 이에 서로 고백하고 서로 기도하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5-16).” 이것이 우리의 이상이다. 우리는 모든 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증인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이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때에 일어난다. 거기서 나는 선택을 해야 한다. 함께 할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 이쪽으로 행할 것인지 저쪽으로 갈 것인지.

 

예수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우리로 서로 합심하기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이는 우리에게 명하신 지상명령이다. 그때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8).” 곧 우리의 간구가 크다. 누구는 기도로, 누구는 작은 관여와 봉사로, 누구는 마음과 물질로 그 형편과 사정에 따라 합심한다. 나로 누구 일에 매개자가 되게 하심은 그러해서이다. 누구 일을 듣고 같이 나누어도 될 기도의 사람 몇에게 그와 같은 상황을 서로 이야기한다. 서로는 때로 누가 누군지 알지 못하면서도 듣고 합심하여 기도한다. 저를 위해 헌금을 보내기도 한다. 교회를 이뤄가는 일이란 참으로 기묘하였다. 그리하여,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2:1-2).

 

나의 죄가 어찌 가려지겠나? 나의 마음의 간사함을 어찌 다루어가겠나? 이는 막연한 연상이 아니다. 나의 죄를 숨기지 않을 때 가려지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그것으로 나는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한다. 나의 마음의 간사함은 실토함으로 주께 정죄함이 없다. 나의 고백은 주가 다 아시는 일로 용서를 구할 때 씻음 바가 됨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계속 고배하기를,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아, 그 답답증과 무력감은 현대사회의 늪이 되었다(3-4). 마치 과묵함을 덕으로 내세우며 자신의 허물과 죄를 묵과하게 한다. 그러할 때 내가 종일 신음한다. 내 뼈가 쇠한다. 오히려 나은 것 같고 편한 것 같은 침묵이 하나님 앞에서의 외면을 초래하는 것이다. 그러할 때 나의 진액이 여름 가뭄의 마름 같이 쩍쩍 갈라진다. 영혼은 푸석푸석하여 고비사막의 모래 같이 손에 쥐고 있으려 해도 한 줌도 잡지 못하고 빠져나간다. 꿈과 이상, 낭만과 행복은 빈 손 위에서 날아간다. 결국은 몸의 이상을 느끼고 마음의 병고를 깨닫고서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셀라)

(5-7).

 

이 시의 구조가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더는 상관도 않을 것처럼 마음을 거두었다 싶었는데 저로 하여금 내 마음으로 날아들게 하셨다. 신경이 쓰이고 주의 이름을 부르다, 누구에게도 알린다. 아이가 주일에 오게 되었고, 차를 운전하고 온다고 하니 같이 오면 어떨까? 하고 말하였다. 이는 단지 시간상으로도 이런저런 여건으로 못 오던 것이니 좋은 기회이지 않나? 하는 의도로 꺼낸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주를 바라며 하루하루 성실한 아이다. 기도하는 사람이라. 저 아이가 먼저 같이 태우고 올 수 있어요, 하고 말한 것도 기적이지만 그렇게 같이 온다면, 같이 오는 것으로 이미 충분한 사역이고 합력이고 합심이 될 거라 여겨졌다. 그리 설명하고 나는 저에게 기도하며 생각해보고 결정하라 여백을 두었다.

 

우리가 누구인가? 죄와 허물이 없는 자들인가? 아니다! 우리도 누구와 다를 게 없는,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다. 이것으로 우리의 영혼은 ‘여름 가뭄의 마름’을 경험한 바 있다. 이에 우리는,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를 떠올릴 수 있는 특권의 사람들이다.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하는 체험과 신앙고백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결코 독불장군이 아니다. 나 홀로 독야청청 사는 게 아니다. 그런 신앙의 소유자는 없다. 내가 아는 누구는 나로 신학을 단념하고 주의 길 가는 것에 자신의 경험을 동원하여 설득하고 반대하던 자이었다. 저도 목사의 아들로 이런저런 일로 뒤늦게 신학을 하여 목사가 되었으나 곧 환멸을 하며 스스로 강원도 어디 깊은 산속에 암자를 짓고 산다고 하였다. 나는 지금도 가끔 저를 생각한다. 머리가 지끈지끈할 때,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도망치고 싶을 때 저를 떠올린다. 그러나 저는 독(毒)이다. 저주다.

 

우리의 저주는 동료요, 나의 친구요, 가까운 친우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시 55:13).” 희한하지? 차라리 원수라면 늘 대적하고 경계하는 적이라면 숨기라도 하였을 텐데,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12).” 저는 같이 위로 받고 재미있게 의논하던 자가 아닌가?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14).” 이는 매우 무서운 이치다. 느닷없이 “사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임하여 산 채로 스올에 내려갈지어다 이는 악독이 그들의 거처에 있고 그들 가운데에 있음이로다(15).” 그렇게 나는 또 누구와 누구 이야기도 안다. 저들은 늘 같이 교회도 다니고 어울려 위로함을 받는 사이다. 그렇게 나란히 세상도 즐기고 하나님도 멀리하면서 서로의 우정을 생명보다 귀히 여긴다. 한때는 저들이 부러워 그 사이에 끼고 싶어 덩달아 어울리기도 하였었다. 한데 믿는다는 자들이 안 믿는 자들보다 더하니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밖에. 각자의 자책을 무마하는 것이 서로의 위로였다. 서로가 서로를 보며 괜찮다, 하고 위로함을 얻었다.

 

그러니 참, 이런 자도 있고 저런 자도 있고, 이러는 사이도 있고 저러는 사이도 있어 오늘 말씀은 기도하는 심정으로 나를 불러앉힌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2:16-17).” 주의 영원한 위로와 소망이 아니면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누구와 대화하는 일은 다소 인내가 필요하다. 마음 같지 않게 말이 느리고 첫 운을 떼는 데 있어 더듬거리기가 답답하다. 그러니 나도 모르게 툭툭, 말을 끊고 내 말을 앞세우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저는 또 자기 좋을 때 불쑥 연락을 한다. 조금 있다 다시 전화할게요, 하면 나는 그대로 기다리고 있는데 저는 결국 하루를 넘겨도 전화하지 않았다. 어떤 결정을 할 때는 그러려니 하고 마냥 기다려야지 채근한들 소용이 없다. 누구와는 아예 대화 자체가 어렵다. 그럴 때 주가 주시는 마음은 그러려니 하는 너그러움이다. 너그러움은 주의 마음이다. 주님의 마음으로가 아니면 나는 저들과 대화하다 복창이 터져 죽을 것 같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

 

이보다 더 강적은 막무가내로 자기 말만 하는 사람이다. 뭐라 하면 열 마디 백 마디로 응수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불안 때문인지 전혀 엉뚱한 말로 본말을 흐린다.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주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나는 저의 면상을 한 대 갈기던가, 쌍욕을 하고 뒤돌아서야 한다. 그때에 오늘 말씀이 나의 어깨를 툭, 치시며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9).”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은 여러 각도에서 새로운 스펙트럼을 짜듯 다양한 빛을 발산한다.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하고 오늘의 나와 사역을 감당하는 모든 이들을 나타내기도 한다. 곧 저의 이야기는 단지 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그때마다 파장이 다르고 굴절이 달라 분산하여 배열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와 같은 광선이 우리로 치료한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나도 누구에게 나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그치는 게 아니라 이러한 스펙트럼을 짜주어야 한다. 이는 결국 말씀으로다. 말씀으로 응할 때까지 말씀으로 단련하심이 우리로 하여금 다양한 광선, 가시광선인지 자외선인지 적외선인지 하는 따위가 발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치료의 광선으로 나타나게 한다. 그렇게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8-19).” 우리 주님이 걸어가신 길이며 오늘 우리가 마다하지 않고 걷고 있는 길이겠다. 날마다 하란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가라 하시는 땅으로 향해 나아가는 일이 우리의 하루의 일과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살후 2:1-2).”

 

하면 나는 혼자 할 수 없어 누구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함께 하자고 손을 내민다. 우리의 목적은 하나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3-14).” 이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