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딤전 4:16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시 110:3
도로 누우면 잠들 것 같아 일찍 왔다면서 아이는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 한 영혼이 주께 나아오기까지 그야말로 온 우주적인 역사가 총동원된다. 아이의 병듦이 또는 나약함이 발판이 되어 숱한 우연과 우연들이 우연히 서로 얽힌 듯하다. 그와 같이 또 한 영혼이 예배를 미루고 주께 나아오는 것을 마다할 때에 그만한 사정과 어쩔 수 없음도 온 우주적으로 역사한다. 나는 이 일이 어찌 어우러져 한데 모이거나 흩어지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나에게 필요한 것은 연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나름은 얼마나 다른 생각들이 서로 충돌하는지. 저마다 그것은 또한 이유가 있다.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들과 같다. 기어이 우리는 주의 강권하심 앞에 두 손을 들기까지 고집을 꺾지 못한다. 자신도 안 된다. 이를 누구는 고집이라 하고 이를 누구는 신념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동틀어 죄라 하신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살아나기 전까지는 죽은 줄을 알지 못한다.
나는 동시에 누구를 생각하였고 저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주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가 하나님을 왜곡할 때 겪는 어려움의 단적인 어려움은 용서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용서받을 게 없다고 자부하기도 한다. 엄연히 마귀의 자식들도 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그러한 저들도 스스로는 광명한 천사라 여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몸에 밴 죄의 문제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우리가 본래 그러했었다는 것을,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그래서 나는 아이의 입에서 아멘,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은혜를 구한다. 어쩌다 또 변덕스럽게 한두 번 그리 교회로 오고 안 오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16).” 저는 아직 모른다 해도 성령이 이를 증언하시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17).” 이를 나는 저로 하여금 알게 해야 하는 것이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딤전 4:6).”
신앙을 이어가기 참 힘든 시절이 도래하고 있다. 이런저런 합리적인 이유가 발목을 잡는다. 시대적으로도 가치가 가치를 이상이 이상을 능가하고 있다. 받지 않는 이를 설득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오히려 안 믿고 안 다니기로 한 게 옳은 것이지 이 시국에 교회를 다니고 주를 영접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다. 나는 아이의 팔과 다리 여기저기에 새겨진 문신을 보여 저의 방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는 속죄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18, 32).” 세상이 권하는 일과 성경이 권하시는 일이 서로 충돌한다. 이에 오늘 말씀은 우리의 연단을 강조한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경건은 근신으로 가능하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근신은 자발적인 소외다. 세상으로부터의 거리두기다.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잠 2:11).” 우리 영혼으로 살 길을 알게 한다. 고등학교 때 가출하고 학교로 돌아갔을 때 3일 근신처분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등교와 동시에 학생부실로 따로 가서 혼자 책상에 앉아 반성문을 쓰고 공부를 하였다. 선생들은 돌아가면서 나를 감시하고 훈계하였다.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이다. 뉘우쳐 깨달아 돌아보라는 의미에서였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을 지키는 데 있어, “근신을 지키며 네 입술로 지식을 지키도록 하라(5:2).” 이는 매우 의지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수동적인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
경건은 절로 마음먹기 나름이 결코 아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약 1:26).” 입만 열면 변명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뿐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강조하는 게 아니겠나?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아이는 일찍 와서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내려가서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오겠다고 하였다. 이를 억지로 붙들지 않은 것은 저도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이다. 훗날 주께서 어찌 인도하셨는가를 알 때 그 은혜가 더욱 클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 53:10).”
누구 일로 또는 어떤 마음으로 힘에 겨워하다가도 그러는 동안 내가 더욱 주를 바라게 되는 것을 본다. 싫은데 마다하지 않고 못하겠다면서 외면하지 않는 까닭은 주가 더하실 은혜를 앎이다. 때로는 ‘억지로라도’ 물론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으면 더더욱 좋은 일이겠으나 ‘어쩔 수 없이’ 주 앞에 끌려나오는 것도 은혜이다. 그러할 때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
나는 이제 누가 오고 안 오고, 같이 하고 안 하고, 하는 일에는 연연해하지 않는다. 내가 애쓴다고 될 일이 아니다. 다만 마음에 두시는 소원에 집중한다. 주가 더하시는 ‘착한 일’ 말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처럼 누구를 내 마음에 들어오게 하실 때, 저의 숱한 사연과 그로 인한 나의 불편함에 이르기까지 주가 맡으신다. 그리 여긴다. 나는 감당할 수 없음을 굳이 감추지 않고 때로는 저이 앞에서 빌빌거리는 모습도 그대로 보인다. 나도 같은 사람이라. 아니 저보다 더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이란 것을 인정한다. 그런 나에게 이와 같은 일을 맡기셨으니 그 일을 감당하실 이는 주님이시다. 나는 때로 단도직입적으로 그리 고백한다. 행여 저가 나를 자신보다 나은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할 때에 내가 명심하는 것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이를 오늘 말씀으로 다시 묵상하면 감사함으로 받을 따름이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 4-5).” 그러므로 고통도 유익이라는 말씀,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시 44:8).” 때로는 나의 어려움이 나로 하여금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내가 가진 불안과 연약함과 나약함으로 주께로만 의뢰하게 한다. 내가 어찌 좀 하려하던 것들로부터 놓여난다. 나는 저 아이를 어쩔 수 없다. 누구의 이런저런 사연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데서 종일 주의 이름을 자랑한다. 주께 아뢰기를, 주께로 가까이 나아오기를, 내가 권할 유일한 말이었다. 나의 경험도 나의 어떤 지식으로도 저를 어찌할 수 없다는 데 가끔은 안도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이 얼마나 위대하고 감사하고 복된 소식인가. 이를 위해 내가 좀 뭘 해야 한다할 때 그 속죄의 값을 우리는 감당할 수 없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25-26).” 고로 저를 믿기만 하면 된다. 이보다 더 쉬운 구원이 어디 있겠나? 나는 믿는 자로 사는 게 안 믿는 자로 사는 일보다 훨씬 쉽다. 규칙적으로 생활하다보면 그것이 주는 유익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나는 언제부턴가 ‘이제 뭐 하지?’, ‘오늘은 어디 갈까?’ 하는 따위로 고민하지 않는다. 규칙이란 늘 하던 걸 하면 될 일이다. 나는 단순하여 믿음이란 이와 같아서 누가 어떻고 무엇이 어떻고 하는 것들에 별로 휩쓸리지 않는다. 이단이 어쩌고 사이비종파가 어쩌고 하는 일에도 실은 아무 관심도 없다. 다만 누구를 대하느라 이를 알뿐이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막 13:21).” 시대가 어수선하다. 코로나가 심상치 않다. 사람들의 감정이 극에 달했다. 저마다의 수고로 진이 빠졌다. 그럴 때 진리에 회의가 밀려오곤 하는데, 믿음이 굳건하다는 것은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그저 저들의 추구와 가치가 가소로울 따름이다. 친구는 결국 코로나로 교회를 멀어지고 나름이 자구책이 늘었다. ‘온라인 예배’가 사람으로 방심하게 한다. 사탄은 이를 틈 타 기회를 얻는다. 그러니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라(23).” 그러려면 어째야 할까?
오늘 본문은 이를 서두에 밝힌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안 믿는 자들은 차치하고 믿는다는 자들의 파선이 늘고 있다. 하여 우리로서는 연단이 필요하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 그래서 나는 누구의 어려움을 접할 때 때로는 조금 더 저이가 힘들었으면 좋겠다. 얼른 그 일이 해결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와 같은 어려움으로 주를 바라고 더욱 주의 곁에 머물 수 있다면, 얼른 그 문제가 해결되어 언제 또 그랬냐는 듯 옛생활로 돌아가는 것보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8).” 우리의 생이 이 땅으로 전부이겠나?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9).” 다들 안다. 알면서 나름의 사후생을 꿈꿀 따름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진리가 무엇인가?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나는 한 게 없다. 내 안에 영생이 있을 뿐이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오늘도 말씀 앞에서,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딤전 4:10).” 곧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11).”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다. 그러므로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13).” 이는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16).”
그러므로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이를 나는 목격할 것이다. 그게 나였고 너였음을. 곧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4).” 이에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