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 1:9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시 113:2-3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하시는 말씀이 퍼뜩 떠올랐다. 모처럼 친구와의 통화 중이었다. 이런저런 안부를 묻다가 실은, 하고 꺼낸 저의 말이 내내 마음에 남았던가보다. 여느 때보다 일찍 눈을 뜨고 이처럼 주 앞에 앉아 저를 생각한다.
늘 평생을 같은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하며 한 생을 사는 것 같다. 내가 아는 저는 소박하고 성실하며 꾸준하다. 저의 성실함이 때로는 나를 부끄럽게도 한다. 저에 비해 설렁거리며 사는 것 같은 나의 생활을 돌아보게도 한다. 실은, 낚시라도 가거나 한 번 찾아가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하며 말을 꺼낸 것은, 은혜에 대한 실감이다. 주일은 어찌 지내는지, 신앙생활은 잘하고 있는지를 종종 전화로나마 묻곤 하는데, 주일 저녁 7시. 화상으로든 모임으로든 같이 모이는 성경모임이 있는데 자신은 그 자리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했더니 한 주간 어찌 지냈는가, 그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어찌 함께 하셨는가, 하는 이야기를 서로가 자유롭게 나누는 자리가 된다. 이런저런 말을 나눌 때면 자신은 할 말이 없고 불편하기만 하다. 별로 그렇게 ‘감사로’ 와 닿지 않는 은혜에 대해 듣는 이야기도 억지스럽고 뭐라 말하자니 그럴만한 느낌이 없어서 말이다.
나는 저의 말에 피식, 웃으면서 어디 나무그늘에 가 앉았다. 주변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점심시간의 그 소란스런 분위기를 뒤로 하고, 나는 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종종 느끼는 일이지만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하고 감사한 일인지. 상대적으로 저는 이와 같은 사실에 별로 감흥이 없는 것이고 이를 감사로 여기기에는 ‘그저 그럴 수 있는 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었으니… 그 속에 더하시는 은혜가 아쉬웠다. 누구는 말씀을 전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고 주의 일을 담당하면서도 말씀에서 은혜를 얻지 못한다. 누구는 나름 교회 봉사와 헌신을 자처하면서도 그 일에 의미를 둘 뿐 ‘참 감사의 기쁨’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저마다의 보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 길을 묵묵히 간다. 그러면서도 그저 가야 하는 길이니까 가는 것이지 기쁨으로 그 길을 가지는 못하는 것이다. 덤덤한 일상의 소회다.
우리가 성령으로 이끌려 산다는 것이 생각처럼 늘 뜨겁고 신비롭고 감격스러운 날들로 매순간이 놀라운 것은 아니다. 때론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맨송맨송한 느낌으로 그리 산다. 그것으로 신앙을 다한다. 물론 그러는 중에도 주가 함께 하신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주는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함께 하신다. 평소에는 이에 대해 둔감하다. ‘그런 자리’에서 누가 주의 은혜에 대해 감격스러워하면 ‘어떤 소외감’이 들기도 한다. 재미도 없고 흥미도 없는 자신이 이상한 건지, 별 것도 아닌 일로 감격스러워하는 저들의 소회가 유난스러운 건지.
이는 우선 <영적인 침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책 제목처럼 우리 영혼이 무덤덤하다는 것은 분명히 침체됐거나 막힌 담이 있어 둔감하거나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다. 이는 마치 사랑하는 사이를 생각하면 된다. 누가 묻지 않아도 자꾸 사랑하는 사람을 얘기하고 싶다. 그와 있었던 별 거 아닌 일도 요란하게 설명하면서 자랑하고 싶다. 보여주고 싶고 같이 하는 모습을 드러내고 싶다. 그렇듯 누가 주의 은혜를 그처럼 민감하게 느낄 때 이를 구경꾼처럼 남의 이야기 듣는 것처럼 같이 한다는 일은 고역이다. 여기서 우린 현세의 기쁨과 함께 내세의 기쁨도 짐작할 수 있다. 천국이란 하나님으로만 좋고 좋은 곳인데, 우리의 찬송이란 그야말로 자랑이다. 입만 열면 어찌 함께 하셨고, 무슨 일을 어떻게 관여하여 주관하셨는지를 말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친구의 덤덤함은 저의 성격이기도 하겠으나 한 번도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뜨거웠던 적이 없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오히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믿을 것 같지 않던 친구가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예배에 참여하며 교회 모임을 같이 한다는 게 감격스럽다. 저가 먼저 단 얼마라도 후원헌금을 보내겠다며 매월 적은 금액이지만 일정하게 우리 교회로 보내오는 것에서도 놀라움을 느낀다. 설마 저가 돈도 못 버는 친구를 불쌍히 여겨서 그러겠나? 저 자신은 몰라도 저의 안의 영이 교회를 섬김이다. 하나님의 일을 인정함이다. 나는 저로 감격하고 주의 살아계심이 기이하게 역사하심을 보는데 정작 저는 자신에게 더하시는 주의 은혜에 둔감한 것이다. 그저 그러려니, 그럴 수 있는, 그렇지 뭐! 하는 식으로밖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크게 와 닿지가 않는다.
나는 그 답답함에 대하여 안다. 언제부턴가 나는 주의 은혜를 잃었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주의 은혜가 함께 하셨음을 이제는 확신한다. 그때 나의 관심은 예수가 아니었다. 교회는 다니고 형식적으로나마 교회 행사에 참여하기는 하면서도 ‘그런 감격’에는 둔감했다. 그래서 누가 울고불고 하며 자신의 은혜에 감격스러워 두 손을 들고 찬양하고, 너무 민감하게 굴면 거리를 두고 피하기도 했었다. 그런 거 보면 한 번도 아버지 집을 나간 적이 없는 첫째 아들의 무심함 같다. 집 나갔던 둘째가 돌아와 저를 맡이하며 잃었던 아들을 얻은 기쁨에 잔치를 베푸시는 아버지의 감격에 참여할 수 없었다. 저는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기쁨의 근원이 말라 있었다. 늘 아버지 일을 하고 아버지 집에서 아버지 곁을 떠난 적이 없는 것 같지만 같이 하지도 못한 것이다. 이에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31).” 하는 ‘저의 것’에 대해 저는 뒤늦게 감격하고 감사할 수 있었을까? 더불어 아버지의 기쁨,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32).” 그 기쁨에 참여하며 같이 집 안으로 들어갔을까?
나는 늘 저의 뒷이야기를 궁금해 한다. 아버지를 떠나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나 늘 아버지 집에 있었으면서 한 번도 아버지의 집에 대한 감격을 누리지 못했던 맏아들이나… 우리의 영적 침체는 어떤 식으로든 풀어내야 한다. 나는 친구에게 이를 어찌 길게 설명할 수 없었다. 점심을 먹고 잠깐 짧은 여유 시간에 통화를 한 것이라,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저가 오늘 나의 이 묵상글을 읽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저의 이야기 속에 하나님의 이야기를, 나의 이야기 가운데 하나님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얼마나 함부로 살았던가? 나는 그러했다. 나는 우리의 지난날을 돌아보면 오늘의 은총이 감격스럽다. 저와 내가 ‘이런 내용의 말’을 나눌 수 있다는 것으로도 엄청난 기적이고 축복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오늘 다시 전화를 넣어 조만간 만나야겠다. 성도의 만남은 주를 모시는 자리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통화를 하다 시간에 쫓기듯 전화를 끊으면서, 우리가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놀랍지 않나? 하고 묻는 나의 말을 저는 오후에 잠시라도 새겨보았을까? 몇몇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양분되어 누구와의 통화는 즐겁고 누구와의 통화는 불편하다. 누구에게는 기회만 되면 돌아보아 어찌 지내는가, 저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누구와는 그게 불가능하다. 어떤 이야기가 나오면 벌써 그만 말하고 싶어진다. 실제 하루가 멀다 하고 붙어 지내던 사이에서 더는 서로의 관심이 전혀 다른 게 되어서이다. 나는 저의 관심이나 지론에 흥미가 없다. 저는 나의 말에 관심이 없다. 그러니 서로 통화를 하고도 나중에 다시 또 그 이야기를 해도 서로가 모른다. 듣고 마는 것이다. 한데 누구와는 말이 재밌다. 단순히 흥미의 차원이 아니다. 공통된 취미 때문도 아니다.
여기서 잠깐 오늘의 말씀을 빗대어 묵상해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딤후 1:9).” 이와 같은 말씀이 나의 친구에게는 어찌 들릴지. 부디 나에게 보이는 것이 저에게도 들려지기를. 내가 듣는 말씀이 저에게도 보여지기를. 이는 우리가 누릴 영생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가령 우리가 같이 천국에 갔다고 하자. 저도 하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였고, 나도 구주로 믿고 영접하여서다. 한데 그 천국에서의 누림이 서로 다른 것이다. 나는 감격스러워 더 많이, 더 깊이, 더욱 친밀하게 누리고 나누며 주를 찬양하는데 누구는 덤덤하니 싫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좋지도 않다. 과연 천국에서 그럴 수 있나 모르겠지만, 이를 나는 영적인 차등, 실력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예를 더하면, 천국은 마치 좋고 좋은 것으로 공평하게 더하신 곳이다. 음, 최고급 벤츠 승용차를 모두 한 대씩 주셨다고 가정하자. 이를 개발하고 운전하며 그 실력을 전수하신 이는 예수시다. 누구는 이 땅에서 그에 맞는 면허증을 땄다.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아주 가끔은 그와 같은 감격을 누리기도 한다. 여기가 천국이다, 싶을 정도로 감격에 겨워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세상 풍파와 여러 근심에 밀려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해도… 그런 저는 천국에 이르러 직접 그 차를 운전하며 천국 방방곡곡 아브라함 댁에도 가고 다윗의 영광스런 잔치에도 참여한다. 이를 즐기고 만끽할 수 있다. 한데 누구는 자기 집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를 어르고 만지며 즐거워할 줄은 알아도 이를 누릴 수가 없다. 저는 이 땅에서 그것을 운전할 수 있는 실력을 쌓지 못했다. 그렇다고 슬프기야 하겠나? 좋고 좋은 것을 거저 다 받은 것인데, 그 즐거움의 차등이 서로 다른 것이다.
이를 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하는 놀라운 진리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그저 종교의 하나로, 이 땅을 살아가면서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위로를 얻는 정도에서 ‘종교 하나쯤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기쁨으로는 어찌 주체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하고 다급하게 물을 수 있다(요 6:28).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29).” 저들에게 이 말은 막연하고 의아할 뿐이다. 뭔가 표징을 구한다.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표적과 기적을 앞에 두고도 저들은 이를 요구하는 것이다(30).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2-33).”
그 일 후에 저들은 과연 ‘하나님의 떡’을 먹을 수 있었을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6:51).” 이와 같은 말씀이 막힘은 당장의 관심이 어디에 투자한 주식 때문이다. 집을 더 늘려야 하고 곧 정년퇴직인데 노후생활을 대비해야 하는 일이 우선이다. 돈을 벌어야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이 가련하고 숭고하기까지 한 숙명 앞에 우리는 굴복한다. 뜬구름 잡듯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을 먹기에는, 아직 여유가 없다. 그러느라 자신의 영혼이 침체된 것을 심각하게 여기지 못한다. 이는 나의 친구 이야기만이 아니다. 늘 번번이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내 이야기이고, 내 곁에 사역을 감당하는 나의 동기 누구의 이야기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한 번도 뜨거웠던 적이 없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어쩌면 저들의 소망은 이 땅에서의 평안으로 그친다. 잘 먹고 잘 사는 '모세의 떡'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에 오늘 시편은 간곡하기까지 하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시 113:2-3).” 하시는 말씀 앞에 과연 오늘도 가슴 절절하여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주의 은혜를 갈급하는지. 바울은 이를 상기시키며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이보다 더 좋고 귀한 은총이 어디 있겠나?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7-8).” 한 날의 삶이 때로는 힘에 겨울 때,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12).” 이와 같은 고백이 날마다 새롭게 우리를 붙드시기를.
하여서,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시 113:1).” 왜?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4).” 하는 뜨거운 고백이 늘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은혜로 우리 일상이 되어지기를.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6-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