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딛 1:15-16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시 117:2
그야말로 새로운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예배가 강행되면서 화상의 통한 서로의 만남은 제한된다. 가령 위에는 와이셔츠 밑에는 반바지, 화면 뒤로는 이부자리가 너저분한데 화면 속의 그 모습만 정갈하다. 그나마 양방향이어서 이 정도지, 녹화나 이쪽의 일방적인 송출일 때는 더욱 가관이라. 누구는 침대 위에 그대로 누워서 예배를 ‘보는’ 경우도 있고 녹화일 때는 중간에 끊었다가 나중에 생각나면 다시 보기도 한다는데 그것도 끝까지 보면 또 다행이라고 하니. 예배는 ‘본다’, ‘한다’의 표현보다 ‘드린다’는 것이 옳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찾으신다 할 때의 느낌이 그만큼 희소하기 때문이겠다.
그러니 남에게 ‘보여지는 나’의 자리가 아닌 다음에는 스스로 몸가짐을 바로 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다. 어쩔 수 없이 우리도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면서 함께 하지 못했던 이들도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데서는 긍정적인 면이겠으나 왠지 나는 마뜩치가 않았다.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이 약함에는 의지나 정직도 바르게 지킬 여력이 없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마주하시는 게 외모로는 아니겠으나 행함이 그 마음을 나타낸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딘 1:16).” 하면 마음으로가 아니다. 바울의 절규는 그런 게 아닐까?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롬 7:15).” 그러니 우리 예수님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막 14:38).” 우리의 안 되는 부족한 점을 두고 경계하게 하셨다.
어쩔 수 없는 시국이다. 서로의 거리두기는 단지 물리적인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어서 자신이 마음과도 다투어야 하는 일이다. 아이들의 경우도 열에 아홉은 게으르고 늘어져 자신의 나태함을 주체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는 강제하는 무엇이 필요하다.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별 수 없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고전 3:3).” 우리의 두꺼운 암막커튼은 ‘다들 그래, 남들 다 그러고 살아’ 하는 정도의 무게이겠다. 예수님의 젖동생 야고보의 증언이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 2:14).” 이와 같은 강성은 자신의 부끄러움이 내재된 것이었다. 저는 예수님과 함께 자랐고 늘 같이 하여서 저의 구주되심을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죽으심과 부활로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다.
주일 아침, ‘아픈 아이’와는 두어 차례 예행연습을 해보았다. 생각보다 아이는 능숙하게 다루었고 바르게 잘 따라주었다. ‘다른 아이’도 안 믿는 가족들과의 공간에서 그렇게라도 예배에 참여하는 의지가 기특하였다. 손위처남과 장모도 함께 드릴 수 있는 예배였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건강하지 못한 관계에서 형성된 아픈 기억들을 한두 가지씩은 자기고 산다. 이를 주체하지 못할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심한 왜곡이 일어난다. 앞서 두 아이를 언급한 까닭은 선입견이 없다. 누구보다 아픔을 겉으로까지 지니고 사는 경우인데 ‘하나님에 대해 안다’는 선입견이 적다. 순순히 따르고 자신들의 판단으로 선을 긋거나 규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누구에게는 ‘뭘 꼭 그렇게까지…’ 하는 자기 판단이 우선된다. 또는 반대의 경우 누구는 의무감으로라도 ‘~은 해야 한다’는 당위에 시달린다. 어느 것이 더 문제인가 하는 데는 뭐라 할 말이 없다.
같은 하나님을 두고 서로 다른 하나님을 바란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이에 따른 자유함을 누리며 믿음 생활을 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를 오늘 말씀으로 다시 되새기면,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그러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5, 16).” 곧 우리는 이미 정죄함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롬 14:22).” 역으로 이를 받아내지 못하면 얼마나 끔찍한가? 뭐 그리 예수를 믿는다는 일이 힘에 겨운지, 할 건 많은지, 양심에 찌르는 게 많은지, 우리 곁에는 종종 여전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위인들이 적지가 않다.
저들의 공통점은 자기 열심으로다. 애써 수고하는 만큼의 평안을 추구한다. 이는 말씀을 오해함이다. 친구에게 설명할 때도, 우리는 이제 말씀의 시대를 살고 있다. 성경을 상고하고 묵상하는 일은 누가 보았다, 들었다 하는 헛소리에 끌려 다니지 않게 한다. 엄연히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이르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1).” 더는 우리에게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의 결과다. 주가 오신 이유다. 한데 마치 예배가 일이고 교회 생활이 감당해야 할 숙제로 여겨진다면, 믿는 자로서의 삶이 ‘보여지는 것’에 좌우된다면 이는 여전히 예수의 부활 이전의 삶을 사는 것이라 하겠다. 앞서 바울의 증언처럼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이 죄책으로부터 자유하다. 과거의 죄로부터도 앞으로의 허물과 죄로부터도 자유하다. 이는 함부로 대충 살아도 된다는 소리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대언자 예수가 계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하여 더는 죽음 이후의 심판도 두려울 게 없다. 물론 부끄럽고 송구하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 그렇게 의기소침하고 있는 내게 주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런 거 보면 우리는 거저 산다. 모든 걸 주가 행하신다. 저는 나의 죄가 아무리 깊고 무겁고 암울하다 해도, 나의 교만이 아무리 높고 넓고 끔찍하다 해도,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데 드는 확신이 존귀하였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7-19).” 그리하려면 먼저는 내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게 하여야 한다. 나의 묵은 감정과 씻어내지 못하는 마음을 아뢰야한다. 기도밖에는 달리 더 좋은 수가 없다. 앉으나 서나, 어디를 가든지 누구와 함께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기도는 숨을 쉬는 일처럼 연속이다. 그렇게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시게 함으로 그의 사랑이 내 마음에 뿌리를 내린다. 터가 굳어져 더는 흔들리지 않는다. 이에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읍하게 되는데, 나는 목이 메어 뭐라 드릴 말씀이 없을 정도로 그러나 감격하여 주의 사랑을 주체할 수 없는 것은….
그 사랑의 너비 때문이다. 내 죄와 허물이 아무리 넓고 팽창하여 까마득하니 가득하다 해도 주의 사랑의 너비가 더 넓어서 이를 다 품으신다. 또한 나의 멀어지는 마음이 멀리멀리 갔다 해도 주의 사랑의 길이는 이보다 더 길어서 항상 나보다 앞서 나를 마주하신다. 나의 교만이 습성처럼 몸에 밴 것이라 도무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순식간에 나를 높이곤 한다 해도 주의 사랑의 높이가 그런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시며 참고 기다리신다. 내 안의 감정의 뿌리의 깊이는 어떠한가? 파도 파도 계속 튀어나오는 서러움과 원망과 좌절과 낙심으로 나의 깊은 감정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 해도 주의 사랑의 깊이가 더욱 깊으시다. 곧 그의 은혜의 충만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하는 사도의 도고기도에서 나는 늘 한참씩 머물며 주의 은혜에 감동한다.
이를 오늘 시편은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2).” 하고 찬양한다. 찬양은 마치 흥얼거리는 허밍 같다. 때론 가사가 정확히 기억이 안 나고 음이 뚜렷하지 않아도, 한 소절을 입에 머금고 계속 흥얼거리게 되는 일처럼 주를 자랑하는 일이다. 주로 덧입고 주로 행실을 가다듬는다. 하여 우리가 예배를 한다, 본다 하는 의미보다는 드린다는 의미로서 나의 온 맘을 다하는 게 중요하겠다. 이는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지 눈 가리고 야옹하는 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1).” 이는 지상 명령이다. 천국의 일상이어서 오늘의 연장이다.
몇 번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 신앙을 방해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다. 뿌리 깊은 감정이 선입견을 낳고 선입견은 편견을 낳아서 자신들의 하나님을 선호한다. 성경은 배제된 채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으로의 완고함이다. 내가 아무리 대통령을 잘 안다고 한들. 심지어 저의 곁에서 저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라 해도… 가끔 나는 한 장의 사진을 머리 속에 떠올리곤 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둘러선 보좌진들과 함께 긴요한 사안을 검토하며 보고하는 자리에서, 책상 아래 소녀가 대통령 노무현의 발아래에서 노는 장면이다. 또 한 장의 사진은 저 둘이 청와대 앞의 잔디에 앉아 새우깡을 먹으며 환하게 웃는 장면이다. 누구에게 하나님은 일정을 보고하고 업무추진을 위해 자신의 의무와 소임을 다해야 하는 위치에서 늘 부산하고 어려울 따름인데, 누구는 주의 앞에 앉아 서로 담소를 나누며 즐거움을 더한다.
이에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눅 10:40).” 하고 아뢰자,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41-42).” 곧 해야 하고 봐야 하는 일로서의 만남이란 부담스럽다. 그러다보니 누가 나를 보러 온다고 할 때 겸사겸사 여러 일을 하는 중에, 지나는 길에 온다고 하면 나는 굳이 그러지 말라고 한다. 오롯이 나는 저에게 나만이고 싶다. 예수님의 말씀을 내가 바로 이해한 것이라면 마리아의 마음은 예수님으로 족하였다. 무엇을 더하고 보탤 게 없었다.
오늘 말씀은 내게 이르신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 전에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을 쓴 시인 윤의섭은 자신은 밥 먹고, 똥 사랑, 아내와 사랑을 하고, 장을 보러 가고, 일터에 앉아서도, 잠잘 때도… 하루 24시간 시만 생각한다고 하였다. 가끔씩 그 생각이 나는 것은 내게 두신 한 날의 전부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묵상할 때이다. 저에게 시란 그 정도의 가치인데 하물며 내가 주를 사랑함이란, 나에게 있어 주의 인자하심이란. 그러므로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15).” 하는 말씀 앞에서 옳고 그름, 깨끗하고 부정한 것에 대하여,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시는 말씀으로 중심을 잡는다.
이에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시 117: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