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전봉석 2021. 7. 21. 05:18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

딛 3:14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 119:50

 

 

그의 나이 마흔일곱. 나에게 저는 언제까지나 애였다. 그런데 47이라 적힌 저의 나이를 보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여태 뭘 잘못 건드렸던 사람처럼. '보육원에서 자라고 배움이 짧아서'라는 이유로 일 년은 족히 망설였던 일이다. 우연처럼 다시 만나고 성경공부를 하고 저에게 글쓰기를 권하였을 때 저는 그저 웃음으로 넘겼었다.

 

꽤 오래 된 글방 카페가 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글을 써서 올리게 하고 같이 읽으며 품평을 하던 것이 한동안 중단되었다. 더는 학원운영을 하지 않으니까 그렇기도 하고, 하지만 여전히 그때 그 아이들의 글과 사진이 있어 나는 카페를 폐쇄하지 않았다. 그리고부터는 개인 방을 만들어 등급을 올리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는 공간이 하나둘 늘어 예닐곱 개가 되었는데,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자라서 그때의 그 글만 여전히 남아 있다. 나는 그처럼 누구의 어떤 심경을 글로 쓰게 권한다. 동기부여을 위해 어디 대회에 내보내기도 한다. 아이들은 물론 성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전이 매우 다양하고 상금도 제법 크다. 나는 서너 달 안에 상금을 받게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이는 과장도 과시도 아니다. 저마다의 이야기는 마치 지문과 같아서 자신의 남다른 이야기가 소재다.

 

하나님을 더욱 알고자 하면, 자신들의 이야기에 뛰어들어야 한다.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때의 그 참혹하고 수치스러운 이야기를 좀 더 관심을 갖고 마주대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더는 우리 영혼을 지배하지 못한다. 마흔일곱. 나는 저 친구의 억눌린 슬픔을 사랑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상한 심령’을 제사보다 귀히 여기신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천국은 애통해하는 자며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3-4).” 자기의 슬픈 이야기를 직면하고 이를 마주할 때 비로소 별 거 아니었다는 것을 안다.

 

결국 자신의 이야기를 사랑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느끼게 된다. 누구나 싫은 과거가 있고, 이를 저마다 억누르듯 외면하고 산다. 그럼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지만 그것으로 아이를 억압하거나 가정이 혼돈에 빠지고 누구를 마주하는 일에 방해를 받는다. 그러는 동안 자기 사랑이 왜곡되고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외면한다. 하지만 자신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마주하고 이를 인정하고 그 이야기에 뛰어들면서,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된다. 오늘의 나는 어쨌든 그때의 나로 인한 것이다. 나로 나를 감사하지 못함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함이다. 내가 내 이야기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물론 이 과정은 지난하고 잔인하다. 열에 아홉은 시작도 하기 전에 그만두고, 기껏 첫 발을 뗐다가도 주저앉기 일쑤다. 그러는 중에 주의 인자하신 손길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조금만, 조금만 더 용기를 내어 걷다보면 알게 된다. 더는 자신의 이야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면서 그것을 수치심으로 꽁꽁 숨기고 살지 않는다. 자유함을 얻는다.

 

나는 저의 첫 글에 감격했다. 그리고 응원하였다.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그렇게 이야기가 드러나면서 우리의 이야기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심을 알게 된다. 누구에게 읽혀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단지 상금이나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게 아니다.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이 오히려 변하여 하나님의 영광으로 반사된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참 기쁨에 참여하게 된다. 보육원에서 자라면서 겪어야 했을 남모를 서러움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종종 저의 이야기에서 사랑의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은 영광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누구나 개별적이지만 계통적이다. 소설가 최인훈 선생에게 글쓰기를 배울 때 저의 책 <문학과 이데올로기>에서 저는 오늘의 내가 결코 나 하나의 개체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는 것을 설명했다. 즉 지금의 나는 싫든 좋든 내 부모의 나이고, 나의 부모는 그 부모의 부모의 부모로까지 계통을 밟는다. 즉 저의 성향이나 성품, 또는 그에 대한 서러움과 증오까지도 실은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처음 사람 아담을 만난다. 그 이상은 하나님이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다. 사람은 존귀하다.

 

어디에서 우리의 존엄은 상실된 것일까? 우리 안에 묵은 감정은 어디까지 닿아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의 안식처다. 피난처가 되신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구원하시고 응답하소서(시 60:4-5).” 우리로 이를 확증하게 하심이 글쓰기다. 자기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는 남의 이야기에 뛰어들지 않는다. 자신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사랑하지 못하면 결코 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물론 때로는 감동도 받고 큰 감회도 경험하기는 하겠으나 이내 자기 안의 숨겨진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이를 갉아버린다. 시편은 이구동성으로 노래한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 91:9-11).

 

카페에 개인들 방을 만들고 누가 함께 본다는 것만으로 기도의 힘을 얻는다. 더는 외롭지 않다. 어떤 이는 자해하며 자신의 손목을 긋던 이야기를 글로 옮겼다. 누구는 목을 매고 정신병동에 실려 가는 이야기를 들추었다. 누구는 술주정뱅이였던 친정아버지의 죽음을 연거푸 쓰고 또 쓴다. 그러는 동안 자신을 기워내는 것이다. 나는 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 이야기를 잘 버무려서 어디에 낼 수 있도록 격려한다. 우리는 엄연히 누구에게 보여지는 사명을 가졌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5).” 우리는 빛의 사람들이다. 빛과 소금이어야 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14).” 그러할 때 얼마나 성가시고 더 복잡한 일이 많은지는 나도 잘 안다. 불이 환한 동네로 뜨내기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술 취한 객들이 고성방가하며 조용한 마을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그처럼 내 안에 성가신 일들이 많아질 수 있다. 공연히 남의 일에 마음이 번잡스럽기도 하다. 전에는 홀가분하던 일인데 남과 같이 나누려니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저들의 길을 밝혀주어야 한다. 자신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 하셨는지를 알지 못하면 누구의 이야기에도 관심이 없다. 더욱이 소명을 받은 자라면 자기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깊은 관여와 필연적인 목적을 읽어내야 하고 읽혀지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쓰여진 그리스도의 편지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3).”

 

누구는 글을 쓰고 그것을 같이 읽고 다듬으며 운다. 서러움에 울다 주의 은혜에 감격하며 운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기쁨이 되게 하신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11).” 어떤 이의 글을 마주하고는 동시에 헉, 하고 숨이 막혀 힘에 부친다. 그럼에도 감사하는 것은 그것으로 주의 영광을 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주의 영광을 발하여야 하는 빛이다. 사람들에게 비치어야 하고 온 동네를 밝혀야 한다. 나는 저의 첫 걸음에 감사하였고 부디 저의 이야기가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인애를 체험하는 장소가 되기를 기도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고통과 슬픔에서 하나님의 사랑은 빛난다. 그의 인자하심은 찬란하다.

 

요셉의 고백을 들어보자.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20-21).” 오히려 저가 원수인 형들을 위로한다. 자기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은 것이다. 끔찍한 노예로 팔려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였지만, 곧 내가 나의 어린 날을 용서하면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드러나는 것이다. 때로는 어떤 이야기에서 막힌다. 어째서 나를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셨는지, 아무리 기도해도 왜 나의 이야기는 점점 더 악화일로로 치닫게 하셨는지, 하나님은 끝내 침묵하시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그것까지 사랑하게 하심으로 어느 훗날 우리가 주의 얼굴을 마주하고 섰을 때 비로소 그 모든 수수께끼는 풀릴 것이다.

 

이생에 사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지난날의 이야기로만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알 수 있다. 누구도 미래를 알지 못한다. 오늘 당장 무슨 일이 닥칠지, 언제 어떤 일이 닥쳐올지, 미래는 말이 없고 과거는 아우성이다. 우리로 이 ‘낀 시간’을 살게 하심이 주의 은혜였다. 오늘 이후의 이야기는 믿음으로다. 믿음으로밖에는 딛고 설 수 없다. 믿음의 발판은 과거다. 지난날 하나님이 내게 어떠하셨는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앞으로의 확신은 더해진다. 막연하고 애매할 때 아니 외면하고 감추고만 살 때는 우리 주의 사랑의 넓이나 깊이를 알지 못한다. 서럽고 억울한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 길이 없다. 그러니 남의 이야기에는 관심도 없이 허송세월을 살다 두려움 가운데 죽음을 맞이한다. 이를 숙명으로 여긴다.

 

오늘 말씀을 그리 읽는다.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딛 3:14).” 믿음으로 산다고 살면서, 우리의 열매가 무엇인가? 자식 낳고 남들처럼 악착같이 벌어서 집칸 장만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다 가는 것으로 족하다면, 그런 인생을 두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죽기까지 하셔야 했을까? 고작 이생의 자랑으로 전부였다면?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50).” 우리 주님은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하여 오늘이 고난 중이라 해도 나의 이야기는 위로다. 왜?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시 119:9).”

 

그 힘은 자신의 이야기에서 자신만이 얻는 능력으로다.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거기서 내게 임하시고 또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들로 나아가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말하리라(겔 3:22).” 더는 희망이 없고 바랄 수 없는 중에도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37:1).” 우리로 거기에 세우신 까닭은,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고전 6:14).” 우리로 다시 살게 하려 하심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4:16).” 이로써 감사하고 찬송하고 기뻐할 수 있는 영광이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 이를 드러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마주해야 한다. 이를 발굴하여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내야 한다. 동기부여가 될지 모르겠으나 여러 대회에 자신의 이야기를 써서 내는 까닭은 그러므로 자신을 마주하는 용기를 얻게 하고 싶어서이다. 자기 이야기를 직면하지 않고는 우리 이야기를 알 수 없고, 우리 이야기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야기는 없다.

 

마흔일곱. 나는 저의 첫 글을 주의 이름으로 응원한다. 누구의 슬픈 사연이 그저 슬픈 이야기로 그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때로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 119:25).” 나의 지난날이 진토에 붙은 것처럼 더는 가망이 없는 것 같으나 “내가 나의 행위를 아뢰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사오니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26).” 내가 나의 주께 아룀은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28).” 주의 말씀으로 세우실 것을 믿는다. 고로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34).” 부디 저들의 글쓰기가 단지 푸념의 정도가 아니라, 즐거움이고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35).” 주의 길에서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있기를,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37).” 그리하여,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 119:49-5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