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전봉석 2021. 7. 26. 05:23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히 4: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 121:1

 

 

말씀을 전하는 사역은 모든 일에 우선한다. 새삼 이를 오래 되새기는 하루였다. 코로나 시국이라 어쩔 수 없이 온라인 화상으로 예배를 드리기는 하나, 이게 여간 예배를 거스르는 게 아니다. 예배 시간이 다 되어 들어왔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뭐가 어려워서 이래저래 부산을 떤다. 그나마 화상으로라도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좋은데 연신 화면을 조정하느라 그러는지, 또 중간에 왜 그리 왔다 갔다 하는지, 이런 게 신경 쓰이고 저런 게 신경 쓰여 말씀을 전하는 일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누가 좀 이를 또 도왔으면 좋겠는데… 말씀을 전하는 자로 또한 말씀 전하는 일과 함께 중요한 것이 이를 듣는 자와 함께 하는 일이겠다. 다른 것으로 기쁜 게 아니다. 우리가 같이 즐거워하고 그 기쁨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면 하는데, 오늘 말씀이 두려움으로 읽힌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 4:1).” 당연히 우리는 같이 간다 여기면서도 행여 저이는 아닐까, 그 소망보다 늘 앞서는 게 돈돈거리는 일이라, 이를 어찌 훈계하고 가르쳐서 될 일도 아닐 테고.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시 122:8).” 우리 안에 평안이 있다는 것은 주를 바람에서이다. 그런데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히 4:2).” 의외에 복음에 대하여 그리 소중한 줄 모른다. 사는 게 우선이고, 사느라 드는 비용에 따른 염려와 근심으로 그 마음에 쉼이 없으니… 안식도 훈련이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에 영향을 주는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누구의 어떤 일이나 성격이나 저의 형편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전하는 자로서 저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마음이 어려웠다. 기어이 우리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의 일을 어찌 받고, 어찌 다루며, 어찌 이어가고 있는 것인지. 물론 사느라 급급하여 먹고 사는 일에 전념하는 것에 대하여 나도 그의 눈물겨움을 안다. 오죽하니 그 마음이 온통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겠나만.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7).”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마음에 들리는 ‘그의 음성’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붙들고 살 것인지. 행여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는 말씀에서 덜컥, 겁부터 나는 것이다. 다들 자신의 마음을 그리도 장담하고 사는 것인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다들 그 마음에 원하는 게 있고 이를 위해 죽어라 하고 사는 일일 텐데, 과연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는 말씀을 무슨 의미일까? 저마다 자신의 믿음을 믿음 한다. 늘 그러려니 하는 태도로도 그 믿음에 대하여 신중하지 않다. 자신이 믿는다고 여기는 그와 같은 믿음이 문제다. 누구는 평생 주의 긍휼하심을 느끼지 못하고 살면서도 주가 계시겠거니, 하고 믿는다. 믿는다고 여기는 자신의 믿음을 믿는 일이란 너무 터무니없다. 그러다 툭, 하고 무슨 일이 또는 어떤 슬픔이 건드리기만 해도 그 믿음은 회의에 빠지는 것이어서.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고후 11:14).” 그것이 자기 이야기가 아닐지, 돌아보아야 한다.

 

성경에도 보면 역설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시대마다 이방 나라 왕들이 대표적이겠으나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 왕도 저의 거룩과 믿음과 열심이 저를 삼켰다. 예수를 판 가룟인 유다도 저의 믿음이 저를 거두었다. 말씀을 등지고 세상으로 간다는 일은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선 자들 같다. 아차, 하는 순간에 헛발질이니. 내가 아는 누구는 평생을 복음으로 말씀으로 그의 사역을 감당하다 노년에 이르러 허튼 이단에 빠지는 경우도 보았다. 누구는 저의 결연함이 주의 길을 가게 하더니 아내와 아이를 위해 ‘다른 직업’을 위해 말씀 전하는 일을 내려놓기도 하였다. 곧 우리의 믿음이란 그 열심이 저로 하여금 곁길로 가게 하기도 한다. 저들의 믿음은 그래도 괜찮다고 여기는 자신들의 신념이었다. 어릴 적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던 선생도 저의 명석한 판단과 현실적인 이상이 유일하신 하나님을 보편적인 신으로 전락시켰다. 저는 가끔 논쟁을 위한 논쟁처럼 그의 믿음으로 나를 흔든다.

 

믿음의 최종적인 목적지는 안식이 아닐까? 그런데 그 안식이 그저 주어지는 ‘그렇겠거니’ 하는 정도의 안식이었다면 오늘 말씀이 이와 같은 우려를 말씀하실 게 뭐 있겠나?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1).” 믿음은 거저 주셨으나 그 값은 어마어마한 것이었고-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사 죽어주시기까지 한 은혜로써의 값-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는 일은 정말이지 의외의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의미다. 아니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하고 말씀하실 게 무언가? 우린 과연 어떤 힘을 쓰고 살고 있나? 하다못해 돈벌이를 위한 또는 자기 몸을 돌보는 정도의 힘이라도 쓰고 있는지? 오늘 말씀을 다시 주목하면, ‘힘쓰라’ 하시는 데는 ‘이는 누구든지’ 그릇된 길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려니 하고 그저 몸에 밴 어떤 습성에 따른 믿음도 있다는 소리다.

 

문제는 어느 훗날의 이야기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3-24).”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식겁하지 않나? ‘많은 사람’ 저들도 나름은 믿는다고 믿은 자들이었다. 어쩌면 누구보다 열심으로,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는 저들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할 때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하고 우리 주님이 우리를 모르신다고 할 수도 있다! ‘내게서 떠나가라!!’

 

이에 바울도 두려워하였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저의 두려움은 결코 불신앙의 두려움이 아니다. 믿는 자로서의 마땅한 두려움으로 오히려 그 안에 믿음이 없이는 두려워할 줄 모르는 두려움이다. 자신이 전파하고 자신이 버림을 당할까 한다니… 이는 말씀의 배반이 아니라 스스로의 믿음을 자부하거나 신뢰하지 않음이다. 자신을 자신하는 자의 믿음은 때로 너무 과하다. 안하무인이다. 그야말로 자기 눈 아래에 사람이 없을 정도로 방자하다. 그저 자기의 선택이 옳다. 그 믿음이 믿음으로 여겨진다. 엊그제 통화하던 나의 선생의 믿음이 그러하다. 저는 엄연히 믿음이 있다고 한다. 하면 드러나야 하는 것을 찾을 수가 없는데도 저는 스스로를 자부하는 것이다.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안다. 도올의 경우도 그러하고, 감히 말하지만 스스로 그렇다 하고 자부하는 자의 대부분이 그러하다.

 

하여 성경은 일러,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이 얼마나 정교한 교리인가? 전의 ‘개역한글판’의 성경이 더 와 닿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우리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이는 저항한다. 아닌 건 아닌 것에 대하여 맞서게 한다. 그저 그러려니 하고 모두를 섞어버리는 게 아니다. 분명한 것이다. 이는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 그래서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한다. 그와 같은 말씀으로 인하여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 지금은 희미하고 긴가민가 그런대로 숨길 수도 있겠으나,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실 때의 이 말씀이 얼마나 두렵게 다가오는지!

 

나는 모두를 속일 수 있으나 한 분 앞에서는 가릴 수 없다. 전에는 괜찮았던 것이 이제는 거슬린다. 우선하는 무엇으로 인해 밀려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그러니 과연 그러하고 있나? ‘먼저’가 늘 뒤바뀐다. 늘 그 입에 먹고 사는 일로 우선이고, 아이들 걱정, 노후 걱정, 이런저런 염려로 우선하는 것들이 쌓여만 가고 있는데도 스스로의 믿음을 자부하고 있다면 이는 모순이지 않나? 그러니 세상에서 우리의 믿음을 보시겠는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거듭난다함은 우리의 자력으로 되는 게 아니다. 칼빈의 주장처럼 불가항력적인 은혜로밖에는 답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마음이 어렵고 힘든 예배였다. 끝나고 집에 돌아와 괜히 시무룩하고 까부라지는 기분이었다. 누가 함께 하였으면 하던 마음과 기껏 같이 하였던 이들의 자세와 그 마음에서 나는 어려웠던 것일까?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 없는 마음이었다. 좀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상하게 속상하고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는 오후였다. 결국은 이와 같은 공백이 문제이다.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밑줄 친 다음에 다음 문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글 읽기와 같다. 글을 쓸 때도 어느 문장 다음에 막히는 게 문제다. 특별히 아주 신중하게 다루고 싶은 문장 다음의 이야기다. 이를 어찌 자연스럽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가령 누구를 좋아하게 되면 그 마음을 고백하기까지와 고백하고 난 다음의 마음의 공간이다. 어떤 막연함, 우리는 어쩌면 이 공백을 파고 들어 기어이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 뜻을 알아야 한다! 부쩍 드는 생각이 우리의 한계다. 우리가 이 땅에서는 주의 은혜를 지나고 난 뒤에서야 안다. 앞서 믿음으로 안다지만 이는 억지스럽다.

 

그래서 나는 누구의 너무 지나친 확신에는 늘 주눅이 든다. 저의 믿음을 믿지 못하겠다. 믿음이란 호언장담할 게 아니다. 스스로 호기로운 게 믿음일 리 없다. 나의 선생의 믿음이 그렇고 내가 아는 누구의 선택이 그랬다. 특히 저는 말씀 전하는 자로서의 사명을 버리고 홀연히 사업가로 변신했다가 장사하는 사람이 되었다가… 사는 게 늘 분주하여 믿음은 온전하신가? 하고 물으면 일요일에도 일하느라 예배를 등지고 살면서도 저의 믿음은 여전히 호기롭다.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 도대체 뭘 믿는다는 소린지 나는 알 길이 없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허용하며 산다. 아무나 드나드는 마음이 어떻겠나? 그 밭은 길밭이라! 본래는 옥토였을지 모르겠으나 밟히고 밟혀 쉼 없이 밟은 마음으로는 말씀의 씨앗이 뿌려진들… “내가 너를 뭍에 버리며 들에 던져 공중의 새들이 네 위에 앉게 할 것임이여 온 땅의 짐승이 너를 먹어 배부르게 하리로다(겔 32:4).”

 

마음이 어려웠던 한 날을 보내고, 나는 다시 말씀 앞에 앉았다. 오늘은 어제 못 왔다고 한 아이가 와서 같이 성경공부를 하기로 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 122:1).” 나는 이제 무엇으로 기뻐하나 보았더니,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8).” 이를 말해주고 듣고 같이 성전으로 올라가자는 이가 있을 때였다. 우리는 누구도 혼자 자기 이야기를 쓸 수 없다. 누가 용기를 내어 글을 쓰려 할 때 이를 비공개로 하거나 제한을 두어 한두 명에게만 공개하는 것을 나는 만류한다. 글과 말은 읽고 듣는 이가 있을 때에 살았다. 그러기에는 부끄러운 게 너무 많다 해도 이를 서로가 함께 할 수 있을 때 유익하다. ‘좀 어때?’ 하고 물을 수 있어야 하고, ‘다음은 어떻게 되는데?’ 하고 누군가는 기다려줘야 한다. 그야말로 인생은 결코 독고다이가 아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알아서 혼자 쓰는 이야기는 없다.

 

나는 오늘 시편의 말씀을 그리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하여 우리의 배필은 그저 좋아해서 만나 사랑을 하고 같이 사는 사람의 정도가 아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아 2:10).” 하고 일러 나의 손을 이끌러주시는 이가 주님이시면 우리 또한 누구에게 그 손을 내밀어 같이 쥐어주어야 한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시 122:9).” 오늘 말씀의 의미를 나는 그리 읽고 밑줄을 긋는다. 어떤 외로움, 어제 오후와 같은 어떤 공허함에 대하여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나는 시무룩하였고, 홀로 까부라지듯 초저녁에 일찍 잠이 들었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127:2).”

 

그리고 월요일, 싫든 좋든 내 이야기의 남은 부분을 써내려가야 한다. 앞서 예전의 이야기가 어떠하였든지, 그 이야기가 맘에 들든지 들지 않든지, 우리에게는 아직도 남은 이야기가 있었다. 하나님은 이제 우리로 우리의 이야기를 살아내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이 이미 다 쓰셨다거나 결말은 이미 뻔하지 않냐거나 하는 따위의 마음은 거친다. 쓸모없다. 그래서 뭐? 몰랐으면 모를까 이를 알았다면 이제는 그 이야기, 하나님이 이미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택하신 바, 하나님이 손수 다 쓰신 이야기라면 우리는 기꺼이 그 이야기를 살아드려야 한다. 쓰여야 한다. 그 문장 하나하나에 주체가 돼야 한다. 의지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바울의 의지도 그렇게 읽었다. ‘자신을 쳐서 복종케 함을’ 맹목적인 헌신 내지는 막연한 믿음의 결말로 읽어내서는 안 된다. 우리 곁에 오역(誤譯)이 난무하다. 난독(難讀)환자가 너무 많다. 아, 라고 쓰고 어, 라고 믿는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유롭다는 것이다.’ 독일의 행동하는 목사 본 회퍼의 말이다. 저는 덧붙여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나로 그분의 뜻에 묶어둔다.’ 나는 이를 오늘 오는 아이에게 적용을 하겠다. 어떠하든지 새 힘을 내야 하는 일이다. 어제 주일을 같이 못 지켰으니 월요일이라도 와서 같이 예배를 드리겠다니! 설마 이게 단지 저 아이의 마음이었겠나? 주가 주시는 마음 앞에서 나는 나의 자유함도 묶어둔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시 122:8).” 그리하여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9).” 엄연히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