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전봉석 2021. 7. 27. 05:29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히 5:12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시 122:7

 

 

언어는 하나님이 그 영혼을 생명으로 이끄시기 위하여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말씀이시고,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그의 언어는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4).” 그와 같이 언어가 우리를 다루심으로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본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언어다.

 

일찍이 나로 하여금 언어를 다룰 수 있도록 하신 데 감사하다. 우리 공부방에 오는 아이 중에 발달장애를 겪는 아이가 있었다.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읽고, 쓰고, 말하기가 미숙하여 아이엄마는 여러 곳을 전전긍긍하며 아이를 맡기었다. 심지어 미술치료니 음악치료니 하는 곳에서도 ‘아이의 문제’를 심각하게 보았고 엄마의 우려는 눈물겨웠다. 그렇게 학원도 전전긍긍하다 우리에게로까지 온 것인데, 아내는 그런 데 아랑곳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똥을 싸고 오질 않나, 변기 위에 앉아 손에 묻은 똥을 벽에 문지르고 있지를 않나, 같은 층 복도에 오줌을 싸고 다녔고, 한동안은 엘리베이터에서 오줌을 싸대서 결국 CCTV에 찍혀 경비실에서 찾아오기도 하였다. 아이의 배변의 문제는 심리적으로도 여러 해석을 갖는다. 엄마아빠의 이런저런 사연을 알고는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이를 감추고 서로가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어찌 해결이 안 된다. 아이엄마는 구구한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아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2학년이 되고 벌써 여름방학을 맞이하는 아이는 수학에 천재다. 구구단은 물론 곱셈 나눗셈을 척척 풀어낸다. 아내의 말로는 아이만의 어떤 공식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처음에 아내는 아이를 혼자 오게 하고 곁에 앉아 ‘어린이성경’을 같이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어린이 천로역정’을 읽힐 때도 그렇고, 아이의 독해능력은 남달라서 옆에 그림과 선생님의 목소리로 글씨를 읽혀 언어를 습득하였다. 이제는 혼자서 척척 그림 없는 글자 책을 읽는다. 우리는 아이를 수학 천재, 국어 천재라고 칭찬한다. 아이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더는 혼자가 아니라 초등부 아이들과 같이 섞여 다 같이 수업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름의 규칙을 따라야 하고 다른 학년에게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도 배웠다. 다른 학년의 아이들도 처음에는 ‘이상한 아이’로 뜨악해하다 이제는 같이 웃고 같이 이해한다. 그러는 과정에는 언어의 역할이 우선하였다.

 

바른 언어를 구사하지 못할 때는 배변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고 뒹굴고 난장질을 해대며 호소하였다. 그럴 때 아내의 아랑곳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사’가 나는 놀라웠다. 그때마다 ‘그냥 그만 둬!’ 하고 퉁명스럽게 말함으로 아내의 고생스러움을 달래주듯 두둔을 하곤 했는데, 아내는 뭔가 엄청난 희생과 경건한 언어와 엄숙한 사명감으로 아이를 받아낸 게 아니다. 똥 싸면 씻기고, 옷을 버렸으면 딸애의 작은 반바지를 입혀 보내고, 아이들 앞에서 떼를 쓰고 나뒹굴 때는 내버려두었다. 그래놓고는 옆에 앉아 ‘아이의 언어’로 말씨름을 하고 책을 읽히고 아이의 질문을 받아냈다. 딸애가 집에서 쉬는 날 아이를 종종 볼 때마다 ‘엄마 수준하고 비슷해!’ 하며 놀려대곤 했을 정도이다. 곧 우리에게는 그 이상의 어떤 권능, 하나님이 보내셨으면 하나님이 다루신다는 것에 나름의 대처능력도 있는 것 같다.

 

말-언어는 사람을 깊이 찌르고 아프게도 하지만 상한 심령을 어르고 달래는 수단이기도 하다. 월요일 아침 일찍 막내동생이 새벽예배를 마치고 접이식 플라스틱 책상 두 게를 가져다주러 일찍 왔다. 그리고는 옆에 소파에 잠시 눈을 붙였을 때, 아홉 시는 넘겨야 올 줄 알았던 아이가 뒤이어 일찍 왔다. 녀석의 손에는 A4용지 다섯 묶음과 KF94 마스크 스무 장과 자신이 쓰려고 주문했던 조그마한 휴대용 약통과 머그컵이 들려 있었다. 이게 다 뭐냐? 했더니, 엄마가 사무일을 하시니까 안 쓰는 이면지가 있으면 달라고 했던 것을 또는 전에 내가 쓰던 약통을 준 것을 새것으로 가져온 것이다. ‘너 써!’ 하고 되물어도 됐다면서 도로 내게 건네는 것이어서 이 또한 심리적으로 여러 해석을 갖는다. 어쨌든 나는 이제 분석보다는 닥치는 대로, 어제 같이 예배를 드리지 못했음으로 설교원고를 주고 둘이서 같이 주일예배를 드렸다. 아이도 이젠 우선하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아이의 원고를 보려니까 소파에 누워 있는 동생도 있고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는지 수요일에 다시 오기로 하고 돌아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은 그 자체로 재생능력과 정화능력이 있다. 속에 쌓아두고 사는 이야기는 언어의 구실을 다하지 못해 곯아버린 감정이 된다. 이를 글자로 입혀 글로 쓰기 시작하고, 말로 서로가 나눔으로 본래 하나님이 우리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그 원리의 생명력을 발휘한다. 나는 이제 언어에 대해 그리 이해한다. 매주일예배로 시편을 다루게 하심도 나로 언어의 깊이를 알게 하려 하심 같다. 여러 장르의 글 중에서도 시는 그 의미가 매우 함축적이어서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다 알 길이 없다. 곧 우리가 주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말씀으로 시작하여 언어로 가져와야 한다. 나는 아이에게 오는 가을 추수감사주일에는 학습세례를 받고 다음 해 봄 부활주일에는 세례를 받자고 하였고, 전에 들려준 성경책 앞 표지에 있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곧 외우라고 일렀다.

 

다들 돌아가고 오는 주일의 본문 시편 61편 초안을 작성하면서 나는 늘 시편의 첫 구절에서 두 손을 든다.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1).” 대부분 두괄식으로 앞의 한두 구절이면 그 의미가 다가온다. 시적배경을 살피는 일은 중요하다. 마치 아이의 성장 배경과 그 부모의 이야기를 빼고는 아이를 이해할 수 없는 원리와 같다. 여러 우여곡절 가운데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권을 잃고 쫓겨 가 요단 동편 마하나임에 머물 때 지어진 시이다(삼하 15:7-17:22). 우여곡절이란 말뜻과 같이 뒤섞여 복잡해진 상황 가운데 가장 처참한 경우는 자식에게 쫓겨 도망 가 있는 신세가 아닐까? 구차하고 면목 없고 그야말로 비참하기까지 한 지경이다. 이때 저는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하고 하나님을 부른다. 그뿐인가? 내 말에 귀를 좀 기울이세요! 하듯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하는, 벼랑 끝의 외침이다. 더는 이보다 더 비참한 심경은 없는 것이다.

 

실은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셨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처음 사람 아담의 죄를 아시면서도 저를 찾아오시고 불러세우신 것처럼,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16:8).” 곧 벼랑 끝의 심경으로 자식 일로 죽고 싶은 심정인 것을 하나님이 모르실까? 그 마음이 처음 사람 아담에게 겪으셨던 마음이라면 여종 하갈의 마음 또한 먼저 다 아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느로 가느냐?’ 하고 물으실 때에 정말 그걸 몰라서이실까? 그럼 당연히 내가 죽겠으니 나 좀 살려주세요, 하고 주께 부르짖고 주의 유의하심을 바라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언제부턴가 우리의 기도는 도식적이고 당위적이다. 틀에 박혔고 마지못해 하는 숙제 같다. 그나마 검사한다고 하니 얼렁뚱땅 운전하며, 걸으며, 설거지하며, 어디서 문득 답안지 보고 해치우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 말을 끌어낸다는 일은 알면서도 넘겨짚지 않고, 상대로 하여금 충분히 속엣 말을 언어로 이끌어낼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한다. 가령 내가 누구에게 글을 쓰게 하는 것은 말이 언어화될 때, 언어가 기도가 될 수 있다는 데 소망을 둔다. 이 둘이 하나가 되기까지 너무 더딘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눈깜짝 할 사이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곧 자신이 말하면서 동시에 듣는다. 언어의 중화작용은 놀라운데 우리 안에 주를 바라는 마음을 일깨운다. 어제도 누가 카페에 두 번째 글을 써서 올렸다. 저의 개인방을 만들고 기다린 지 일 년을 넘기고, 첫 글을 쓰고 두 주가 지난 뒤이다. 첫 번 글에는 응원을 하였으나 이번 글에서는 여러 번 읽고 가만히 두었다. 이야기를 끌어낸다는 것은 자기와의 씨름이 있어야 한다. 누구도 아픈 기억과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다. 또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아이엄마들이 아이들을 보내고 서로가 못 견뎌 두 손 드는 이유는 자기들 이야기를 끝까지 하지 않을 때이다. 심지어 위장하고 아닌 척, 괜찮은 척, 거짓으로 꾸밀 때는 속수무책 우리는 아이를 당해내지 못한다. 아이도 아이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의 방어능력은 직고다. 토설에 있다. 성경은 이를 주목하게 하고 있다.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하고 다윗은 먼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아뢰겠다고 주께 외친다. 부르짖음이란 고상한 언어가 아니다. 우아를 떨며 능청을 부릴 여유가 없다. ‘저도 알아요.’ ‘전에 저도 다 해봤어요.’ 하는 사람치고 더는 속엣 얘길 털어놓는 사람은 없다. 속된 말로 부르짖음이란 체면이고 뭐고 없다. 살려주세요, 하고 바짓가랑이라도 붙들고 늘어지는 심경으로다. 그러니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하며 전능자 하나님을 불러 세운다. 저와 씨름하다 환도뼈가 부러져 야곱과 같이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럴 때 우리 안에 놀라운 권능은, “여호와 나의 힘, 나의 요새, 환난 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렘 16:19).” 저가 누구신가 알고, 자신들이 어떠했는가를 아뢰는 일이 급선무다.

 

아이엄마는 두 번째 결혼으로 남편도 재혼한 사람으로 둘에게는 각각의 아이들이 있었고, 둘 사이에서 난 이 아이는 각각의 형제들과 무려 스무 살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났다. 이러한 실토는 엄청난 용기다. 고작 공부방에 보내며 이런 말을 고백한다는 것은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다. 공교롭게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급한 영혼을 보내신다. 마치 응급실처럼 말이다. 어쩔 땐 왔다 얼마 안 있다 돌아간다. 누구는 몇 년 혹은 그 이상을 같이 하게 하신다. 여기저기서 다 안 받아주던 아이들이 오래 머문다.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이를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겠나? 끝내 자기 자랑과 나름의 방식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말이 없다. 십중팔구 같이 하지 못한다. 저는 더 바라고 나는 저의 이런저런 요구에 부응하려 하면 아이의 이야기는 귀에 들어올 리 없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 1:9).”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우선이다.

 

저들은 이를 알지 못하지만 주의 긍휼하심이 함께 하신다. 한데 믿는다는 사람들은 더 골치다. 자신의 믿음으로 할 수 있는 걸 마치 좀 덜어주듯 굴 때는 역겹다. 저도 기도하고 저도 말씀을 알고 저도 주를 잘 안다고 자부함으로 온전히 그 마음을 내어놓지 않는다. 그게 자존심이든 뭐든 종종 나는 동기들의 이런저런 사연에 접근하다 벽에 부딪칠 때 그 의미는 동일하다. 얼마 전 누가 아이문제로 곧 보내야 할 것처럼 상담을 했는데, 대충은 그러지 못할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저는 말 속에 자신들도 안다는 뉘앙스가 깔렸다. 그러니 어쩌란 건지? 오늘 말씀을 그리 되새겨보면,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히 5:12).”

 

두 말할 것 없이 그게 나였다. 일찍부터 교회에서 자랐고 말씀 밥을 먹고 컸다. 귀가 높고 마음은 단단하여져 누구 말도 듣지 않았다. 나름 다 안다. 저들이 꼴같잖다. 하나님을 배역하고 안 믿는 자들과 어울려 지내면서도 나는 다 안다! 그런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하는 짓은 가관이라. 그야말로 안 믿는 자들보다 못한 관계의 부부 사이와 아이들과의 유대관계는 비틀어져 안하무인이다.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이를 인정하기란 정말이지 자기 의지로는 안 된다. 그러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늘 그 기도는 남들 바라는 것 이하의 수준이고 세상 복락을 즐기는 것으로 축복을 가늠한다. 그러면서도 누군 목사를 하고 어디 선교를 꿈꾸며 성경의 다양한 지식으로 앞서 판단한다. 저의 입에서는 결코 부르짖음이 나올 리 없다. 하나님이 자기 기도에 유의하시길 바라는 마음도, 그럼 좋고 아님 어쩔 수 없고… 한가하고 배부른 영혼으로 산다.

 

그런 저들 곁의 상한 영혼의 심령이 보일 리 없고 저들의 절규가 자신에게까지 들려질 리 없다. 교회 시스템에 의해 돌아가고 섬김을 받되 섬기려 하지 않고, 가정에서와 교회에서의 이중생활은 계속된다.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하고 물으시는 말이 귀에 들릴 리 없다. 그러니 배부른 소리하듯 그럴까? 하며 말을 꺼내놓고는 급할 게 없다.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하는 식이라, 내가 나설 게 없다. 그러면서도 누가 물으면 ‘더 굴러!!’ 하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이다. 이는 저주가 아니다. 벼랑끝에서의 다윗의 호소가 들리겠나? 그와 같은 위기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앞으로의 회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기나 하겠나? 오히려 저의 적당함이 저주다. 애매한 고통이 저를 요령껏 굴게 한다. 시편은 그리 적당한 언어로 쓰이지 않았다. “내 마음이 약해 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시 61:2).”

 

이내 하나님은 벼랑 끝으로 밀어 떨어뜨리신다. 그때 우리에게 주의 권능의 날개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한다. 아내는 요즘 코로나 4단계로 아이들이 반 토막 나면서 나만 보면 보채듯 ‘기도 좀 해!!’ 하면서 다그친다. “만일 재앙이나 난리나 견책이나 전염병이나 기근이 우리에게 임하면 주의 이름이 이 성전에 있으니 우리가 이 성전 앞과 주 앞에 서서 이 환난 가운데에서 주께 부르짖은즉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 하였나이다(대하 20:9).” 그럼 나는 아내에게 이를 알린다. 주께 엎드리고 자복하는 수밖에.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엡 3:13).” 우리에게 더하시는 어려움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신다. 곧 우리의 노여움-서러움과 말 못할 사정과 남 모를 고통으로 찬송이 되게 하신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그러므로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시 122:7).” 이는 성전으로 올라가는 세 번째의 노래다. 결국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4).” 곧 천국에 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천국에 갈 자로 살아야 한다. 그에 따른 준비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 122:1).”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축복이었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8-9),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