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 6:11-12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 123:1
천국에 대한 소망은 모두의 것이 아니다. 이생을 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할 줄 모른다면 무엇으로 견딜까?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소망을 붙들고 하늘에 있는 것을 준비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 어떻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말씀을 따라 길을 떠날 수 있었으며, 앞서 노아는 홀로 외로이 120년 동안을 방주를 지을 수 있었겠으며, 에녹은 주와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것일까?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6).”
예수님의 복음은 첫 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는 거였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마 3:2).” 부활 후 승천하실 때도 제자들을 향하여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3:11).” 곧 우리에게 향하신 복음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천국에 대해 상세히 묘사해주지 않으신다. 이는 우리가 들어도 감당할 수 없고 보아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씀에서 몇 가지 분명한 단서를 가질 수 있다.
먼저 천국에는 저주가 없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계 22:3).” 우리 안의 어떤 서러움도 노여움도 있을 수 없다. 다음은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같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계 21:5).” 만물이 새롭다 함은 그대로이나 전혀 다른 듯 새로운 것이다. 에덴의 모습과는 다른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과 하늘과 구름과 바람 등의 모든 것이 같을 텐데 전혀 새롭다. 그러니까 만지고 느끼고 실제하는 몸으로 사는 곳이다. 무엇보다 천국은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찬양과 예배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이를 사모함에 대하여 그와 같은 간절함은 가난한 자의 우선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이는 마음이다. 그 영혼이다. 속을 비운 듯 하나님으로만이 심령의 가난을 채울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다소 막연하고 애매한 느낌이 든다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여기에서의 가난은 실제다. 돈이 없는 가난이고, 육신의 건강이 없는 가난이고, 외로움과 낙심과 좌절과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실제의 가난이다. 이를 막연하게 해석할 수 없다. 우리가 느끼는 실제의 가난이다.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념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이런 자들과 함께 하셨다. 실제로 부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 어느 정도 견딜만하다. 그런 자의 마음은 가난할 리 없다. 든든한 무엇이 마음에 있는 자는 심령이 가난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남편을 의지하고, 자식으로 든든하고, 자신이 모아둔 재산으로 넉넉한 자의 마음은 가난한 마음을 소유할 수가 없다.
가령 나는 어제 저녁에 보기 좋게 미끄러져 다리를 비틀며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그것 때문에 온 몸에 파스를 붙이고 지금 이렇게 안절부절 간신히 앉아 글을 쓴다. 끙끙 앓고 이 무더위에 찜질을 한다고 했는데,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아찔하다.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가난은 이처럼 실제적인 것이다. 이를 돈이나 건강이나 어떤 결핍으로 해석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추상적으로 보려하는 것인데 그건 그만큼 가진 게 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태복음의 심령의 가난과 누가복음의 가난은 서로 같다. 그런데 천국은 그런 자의 것이라 하심을, 오늘 말씀에서도 묵상하게 된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히 6:11-12).” 그러할 수 있는 원동력이 가난이다.
가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하는 힘을 잃지 않게 한다.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 긍휼하심으로 나는 이 아침도 끙끙거리면서도 다시 말씀 앞에 앉았다. 어제 저녁만 해도 응급실에 가야 하나? 더는 못 움직이게 되는 것인가? 하는 어떤 두려움이 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나의 가난은 나로 하여금 간절하게 하고, 나로 하여금 원하는 것을 구하게 한다. 부지런하게 하고 소망으로 풍성하게도 한다. 게으르지 않게 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의 기업, 천국을 바라게 한다. 그렇게 주를 바라며 눈을 들어 주께 향하게 한다. 다른 무엇으로도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람이다. 이로써 소망이 있다. 마음의 위로가 있다. 이는 실제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의 삶에서 입증되는 사실이다.
로버트 우스트 교수는 사람의 행복을 연구하였다. 무엇이 사람을 행복하게 할까? 하는 저의 연구는 의외의 결과를 도출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방글라데시였다. 가장 불행하다고 여기는 나라들은 소위 선진국의 사람들이었다. 저의 연구에 따르면 부자는 어느 정도 부가 축적되면 그 뒤로는 그것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잠시 좋기는 하겠으나 그저 그런 일이 되어버린다. 가난한 자에게 빵 한 조각 단칸방 하나는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기쁨이 된다. 어제 누구와 이야기하다 나는 궁금하여 물었다. 그렇게 자기 소유의 집을 하나 가지면 좋은가? 그만큼 물어야 하고 살면서 드는 부대비용이 엄청난데도 왜들 그처럼 죽어라 하고 갖으려고 기를 쓰는 것인가?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으로 인하여 심령의 가난을 잃는 게 아닐까?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행 1:6).” 우리의 관심은 온통 이 땅에서의 삶으로다. 덤으로 천국을 바라기는 하지만 그 천국은 막연하여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마음이 가난해질 수 없는 것은 바리새인과 같이 자신의 의와 나름의 만족함으로다. 하루는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눅 18:10).” 저들의 기도는 상이하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 18:11).” 바리새인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게 많았다. 나름의 노력과 자부심으로 그 마음이 든든한 것이다. 한데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3).”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은 이와 같이 극명하다.
나는 종종 나의 약함과 나의 악함과 나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절규하듯 주를 바란다. 아무리 애써도,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어떤 마음가짐도 어김없이 되풀이 되는 고질적인 악함에 대하여, 나의 약함은 그때마다 주를 바라게 한다. 나는 넘어지면서 ‘어, 주여!’ 하고 외친다. 고통이 일고 수치심과 부끄러움과 공연한 서러움이 올라오면서도 동시에 주의 긍휼하심으로 한 번 더 감사할 수 있는 새 힘을 얻는다. 천국이다. 바로 이것이 내 안의 하늘나라다. 거기서 어찌 감사가 나오겠나? 그런데 감사하는 마음은 내 안의 주의 영의 것이다. 누구의 안타까움을 듣다 ‘오, 주님!’ 하고 나는 탄식한다. 가끔은 내가 좀 능력이 있거나 돈이 있었어 저를 도울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나의 가난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심이다. 축복이란 주를 바라는 마음이다, 간절함으로.
가진 자들은 알 수 없는 마음이다. 저들의 심령은 가난할 수 없다. 마음은 있어도 당장 새로 산 소 다섯 겨리를 돌봐야 하고, 밭에 나가 일해야 하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그러니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행 1:6).” 관심은 오로지 이 땅의 것이었다. 마음의 가난은 그저 고상한 염불 같은 것이 되었다. 마음을 비웠다는 소리는 정작 빈 마음에서 나올 수 있는 소리는 아니다. 빈 마음으로는 애통할 뿐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오늘을 무엇으로 위로 받으며 살아갈까? 누구의 집 문제가 해결되고, 또 누구는 돌아가시며 아버지가 남긴 집으로 서로들 안도하는데… 그러느라 사는 데 번잡스러운 마음으로는 천국을 소유할 수 없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가진 것은 유지하기 위해 애써야 하고, 그것으로 더 가지려 애써야 하고, 애씀을 성실함으로 받아내야 하고 그러느라 저의 마음은 비워질 새가 없다. 어릴 때 찾아가곤 하였던 모 보육원에는 정신박약, 지체부자유한 아이들이 모여 살았다. 더욱이 저들은 고아들이라 늘 마음이 굶주렸다. 누구는 걸음을 한 걸음 떼기 위해 온 몸에 힘을 주어 몸을 비틀어 그 반동을 이용하여 고작 한 걸음이다. 누구는 내 이름을 부르는데 허파 저 안쪽에서부터 소리를 끌어내기 위해 입과 얼굴이 뒤틀리며 침까지 흘러나와 경우 발음을 한다. 어린것이 무엇 때문에 매주 저들에게 갔을까? 생각해보면 심령이 가난하다는 자들은 실질적으로 인생의 가난, 육신의 질병과 굶주림과 절박함과 외로움과 남의 시선과 무관심과 외면과 멸시를 견뎌내느라 그 마음이 빈털털이인 자들이다. 그들의 사투는 경이롭고 생명의 존엄함을 일깨우며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간절한가를 몸의 절실함으로 알게 한다. 저들 앞에서 나는 사는 일이 눈물겨웠고 그 자체로 천국을 바라는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새삼 묵상하게 된다.
물론 속상하다. 마음이 어려워서 혼자 서럽고 눈물짓기도 한다. 한데 어느 훗날 우리들이 주의 품에 안겨 천국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소망으로 주를 바란다. 그렇게 에녹은 외따로이 주와 동행하였을 것이고, 노아는 오늘도 망치질을 했을 것이며, 아브라함은 먼지가 풀풀 날리는 사막을 갈 바도 알지 못하면서 믿음으로 걸어나갔을 것이다. 저들 속에 섞여 찬송을 해본 나로서는 찬송의 경탄이 어떤 것인가, 조금은 안다. 누구는 소리를 미처 다 못 내어 몸을 흔들었고, 누구는 연신 기쁨에 들떠 침만 흘려대면서도 우렁찬 목소리를 울려댔고, 누구는 뜨거운 눈물로 그 기쁨을 다하였다. 저들의 찬송은 언제나 나의 힘이 되었고, 어린 나의 가슴에 먹먹한 감동으로 회상된다. 나는 자빠져 보기 좋게 고꾸라지고 순간 찾아온 아픔과 그 여파로 쩔쩔매면서도 그것으로 주를 바란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오늘 나는 어쩌나? 하고 염려하다가도 그와 같은 염려로 주를 바란다. 오전에 아이가 오기로 했고, 설교원고 작성도 해야 할 텐데, 몸을 비틀어 자세를 달리하면서 끙, 하고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세상 그 무엇도 우리로 하나님과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복인지.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시 61:3).” 곧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어차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우리가 주를 바람은 가난함으로였다. 성취감도 어떤 자부심도 아니다. 나름의 만족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주로만 가난한 것, 주가 아니시면 채울 수 없는 심령의 가난함으로, 나는 아픈 허리를 주체하지 못해 몸을 뒤틀며 가난한 몸으로 애통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6).” 그와 같은 간절함을 오늘 시편은 생동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시 123:2).” 주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음을.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 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 6:19-20).” 처음도 없고 끝도 없고,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는 이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나를 대언하실 것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 오늘 하루도 주의 이름만으로,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4: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