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히 7:19, 22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 124:7-8
누구의 글을 읽고 그의 이야기를 같이 한다는 일은 귀한 섬김이다. 저절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함께 주 앞에 고하게 된다. 이미 우리 이야기를 쓰시고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로 기도하게 하심은 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내 아이의 심정을 다 안다고 해도 서로 대화하며 말을 나누고 싶어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렇게 나를 드러냄으로 기도는 나의 황폐한 영혼의 밭을 간다. 마음 지천에 널린 응어리진 돌덩이를 거둬낸다. 기도는 그렇게 우리의 묵은 감정을 캐내어 걷어내는 것이다.
가끔은 나로 사는 게 가장 어렵다. 나의 몸과 나의 성질과 나의 처한 여러 사정으로 사는 일이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나의 나 됨을 부인하는 일이란 자기 비하를 통해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리가 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하는 저의 기도에 주님은 주목하시고 그 마음을 어루만지셨다.
결국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다. 내 앞에 하나님을 모심이다. 그럴 때 나는 벌거벗겨진다. 위선과 아집, 고집과 억울한 마음을 주가 알아주신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좌절하는 우리의 기도에 대해 주님은 손을 내미신다. 실은 우리 안에 너무 많은 수치심이 응어리져 있어 그 커다란 돌덩이를 캐내고 뒤엉긴 가시엉겅퀴를 파내는 일은 수치심을 더한다. 느낄 줄 아는 게 그것뿐이라, 학습된 우리의 죄성은 자신의 억울함만을 토로한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어느새 발가벗겨져 주 앞에 어린아이처럼 나를 내어맡긴다.
누구의 글을 읽다 울컥, 하고 저의 심정을 헤아려보다 또한 내 처지와도 다를 게 없어 같이 운다. 우리는 바벨론 강가에 앉아서 운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우리의 기도란 시온을 그리워하며 우는 일이다. 천국을 사모하며 주를 바란다. 사는 데 따른 어려움이 신세한탄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기억하며 우는 일이다. 그러던 기도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기회가 된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기도를 하는 일은 먼저 자신과의 투쟁이다. 당면한 현실 앞에서 더는 옴짝달싹 못하게 된 처지를 두고 때론 억울하고 때론 서러워서 주 앞에 낱낱이 고하다 보면, 이는 마치 나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이 된다. 여태 괜찮다고 여기며 살았던 나의 속성들이 앙갚음을 하듯 일제히 들고 일어나 싸우자고 덤빈다. 나는 잘해보려 하는데 되는 일이 하나도 없고, 자식마저 지겨운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사는 게 지옥 같은 날들 가운데서 비로소 천국을 사모한다. 시온을 기억하며 운다. 누구의 글을 읽다 저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내용이 나의 이야기와 중첩되면서 그의 서러움으로 나도 같이 운다. 이와 같은 토설이 기도다. 치유를 가능하게 한다. 벗기고 상처부위를 째고 벌려 염증을 도려내고 긁어내는 일은 더럽고 흉측하다. 주 앞에 아뢰다 자신의 모습에 신물이 난다. 기억을 곱씹고 과거의 일을 회상한다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하나님과의 씨름이다. 야곱의 기도는 치열하였고 저는 기어이 축복의 약속을 붙들고 늘어지다 절름발이가 되어 평생을 살아야 했다. 하나님을 이긴 자가 되었다. 이스라엘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 32:28).”
희한한 현상은 우리에게서 슬픔을 제거하면 기쁨도 사라진다. 고뇌를 벗어버리면 자비도 벗겨진다. 통회와 애통하는 마음을 무시하면 위로도 얻지 못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분노하게 하시고 저항하게 두심으로 돌밭을 고르고 가시엉겅퀴가 무성하던 밭을 옥토로 개간하신다. 날마다 곡괭이로 나를 치신다. 호미로 나를 파내신다. 그게 어찌 아니 고통스러울 수 있겠나? 저절로 좋은 땅은 없다. 그 위에는 무성한 엉겅퀴가 자라고 온갖 잡풀들이 뒤덮여 있다. 괴로움의 절규 없이 기도는 고상할 수 없다. 저항 없는 기도는 사족이다. 순순히 물러가는 죄의 습성은 없다. 아픈 데 자꾸 손이 가듯 우리를 휘저어 놓는 것은 치유가 필요하다는 증거다. 우리는 하나님께 항변한다. 왜 나를 이렇게 지으셨나요? 왜 내게 이와 같은 사명을 맡기셨나요? 왜 내게 이러시는 것인데요? 그러나 하나님은 대답이 없으시다.
이는 이미 우리에게 답을 주신 까닭이었다. 곧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하실 때,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그럴 수 있고, 그리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우리의 울부짖음을 듣기만 하신다(히 7:22, 17). 예수님은 화평이시면서 동시에 검이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잡초처럼 무성한 나의 상념을 도륙하신다. 상처를 후벼 파서 숱한 응어리진 마음을 캐내신다. 주는 맹렬하시며 온유하시다. 사자 같은 어린 양이시다. 농부의 손길처럼 거침이 없으시다. 농부는 가차없이 쓸모없는 것들을 뽑아내고 황무지를 개간한다. 그렇게 심겨진 '농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 나는 실컷 억울함을 토해내다 지칠 때, 비로소 주님은 가만히 말씀하신다.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시 124:7-8).” 연신 내가 구했던 모든 것이 허사였음을 고백하게 된다. 벌거벗겨진 기도는 말이 없어진다. 가만히 눈물지을 때 주가 나를 어루만지신다. 내가 겨우 잠잠해지자 세미한 주의 음성이 들린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2:7).” 내가 떠들고 으르렁거리듯 분을 기워낼 때는 침묵하시다 드디어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나는 누구의 글을 읽다 감정이 이입되어 내 눈가에 눈물이 흐르는가 싶었는데,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0:20).” 아!
가끔은 내가 나로 사는 게 너무 힘들다. 그러한 심정을 주께 아뢰다 누구도, 누구도 다를 게 없이 눈물짓고 있음을 보다 주의 음성을 같이 기다리게 된다. 기도는 우리로 민감해지게 한다. 각성하고 돌이켜 주의 뜻을 살피게 한다. 하나님께 따지고 묻고 억울함을 떠들어대다 침묵하게 한다. 내가 입을 다물자 주의 말씀이 들려온다. 비탄은 우리로 슬프게 하나 주의 세미하신 손길을 느끼게도 한다. 애통하는 마음이 우리로 고통스럽게 하지만 주의 위로를 더하게 한다. 애통하고 애통하다 심령이 가난하여진다. 주가 아니면 살 수가 없다는 고백이 저절로 나온다. 천국을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3-4).” 아무리 세상은 요지경이라 해도 우리 안의 온유함은 주가 더하시는 평안이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 주어진 땅, 오늘의 나의 이 황무지에서 나의 영혼을 개간하여 옥토로 바뀌게 하신다.
이를 바라게 되면서 우리는 이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 목마름으로 배부름을 고백한다. 내 주제에 누가 누굴 위로하고 불쌍히 여기겠나? 싶어, 내 코가 석 자인데 하고 외면하려다가도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7).” 나는 이제 이와 같은 천국의 열쇠를 가졌다. 긍휼히 여김으로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이를 위하여도 더는 마음에 응어리진 무엇이 자라나지 못하게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 하나님을 본 자로서 야곱은 절름발이의 생이 기꺼이 감사할 뿐이다. 그리하여 모두의 화평을 구하나 주의 사람을 돌아본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 이는 연쇄적으로 어느 것 하나 어그러질 수 없고, 정교한 하나님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들려지게 하신다. 하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아픔은 훌륭한 교사다. 고통이 주를 바라게 한다. 기도하게 되고 기도함으로 다른 이야기도 바라게 되는 것이다. 곧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히 7:27).” 다 이루신 일을 두고 우리는 연신 헛발질이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우리가 사울에서 바울되기까지는 스스로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내게 고생이라.’ 누구 탓을 하랴! 나는 누구 이야기를 읽고 차마 그렇게 말해주지는 못했으나 글 속의 저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고백이 자기비하로 끝난다면 이보다 더 허무한 것이 어디 있겠나? 주가 보고 계심을, 저의 기도를 듣고 이를 표본으로 모두를 일깨우고 계셨음을 알 때, 다만 나는 송구할 따름이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왜 그리 당부하셨는지 알겠다. 이는 “항상 기뻐하라”를 이루려 하심이고, “범사에 감사하라”를 가능하게 하심인데,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곧 오늘 나의 이야기가 쓰인 동기이고 목적이었다(16, 18). 하나님은 공연히 오늘의 나를 놓아두시는 게 아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 되고 심지어 답답하고 억울하기까지 하나, 여기까지 지나온 길을 더듬을 때도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알겠는데 하물며…. 그래서 그때 나를 넘어뜨리셨고, 그것으로 절규하다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신 것처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 1:30-31).”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되게 하신다. 나로 인해 너의 것이 되게 하신다. 너로 인하여 나의 것이 되는 것처럼.
“이 사람이 얼마나 높은가를 생각해 보라 조상 아브라함도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히 7:4).” 우리로 주 앞에 바로 서게 하시려고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16).” 그리하여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18).” 비로소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19).” 오늘 우리의 모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실 것이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더 9:12).” 그렇게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히 7:22).”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편 124:3-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