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전봉석 2021. 7. 31. 05:29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9:27-28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시 126:2

 

 

재림 신앙에 대하여는 성경이 요구하시는 바이다. 일찍이 초대교회 성도들은 ‘곧 오리라.’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았다. 그런데 날이 더해가고 생각보다 더뎌지면서 곁의 성도들은 하나둘 기다리다 늙어 죽어갔다. 이때 우리의 마음에는 갈등이 인다. 이 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때에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막 13:36).” 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는 물론 바울도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37).” 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았다. 깨어 있는 자만이 본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30).” 하시는 말씀을 우리는 수천 년이 지난 오늘을 살면서 어찌 받아내야 할까?

 

오늘 말씀을 되돌려 그리 묵상하여 본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곧 오늘을 살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그날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주의 재림을 상기하고 기다리며 사는 신앙이 필요하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시 126:2).” 하는 말씀으로 시편이 이어지면서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3).” 우리는 ‘큰일’에 대하여 기대하고 묵상하게 된다. 이것이 유익을 주는 것은 당장, 오늘이라는 시간에 매이지 않는다. 지금의 감정과 어떤 혈기에 사로잡히지 않게 한다.

 

요즘은 부쩍 사람들이 예민하고 내남없이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날들이다. 그러니 보이는 나와 실제의 나는 늘 거리감이 생긴다. 어제 아침에도 어처구니없는 말싸움에 휘말렸다. 이 일을 소개하는 것은 그러한 중에도 주의 영이 어찌 함께 하시는가를 우리로 알게 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늘 공부에 전념하는 아들을 위해 간식을 채워두는 담당이다. 마실 커피며, 밤새 공부하는 데 있어서 출출할 때 먹을 수 있는 간식거리를 준비해둔다. 이를 위해 어제는 아침 일찍 교회에 올라가면서 편의점에 들렀다. 삼각김밥이며 커피우유, 아이스크림과 초콜릿 등 여러 개를 계산대에 옮겨두었다. 알바 청년은 봉투 드려요? 하고 물었고 순간 나는 네! 하고 대답하자, 봉툿값 50원이라며 청년이 퉁명스레 말했다. 늘 그냥 담아주던 것을 전에도 그러더니 또 계산에 넣어서, 나는 됐다고 하고 가방에서 평소 넣고 다니는 에코백을 꺼내며 한 마디 거들었다. 일관되게 해야지, 평소에는 그냥 담아주다 언제는 또 봉툿값을 받느냐? 하고 말하자 순간 청년이 감정이 상했던 모양이다. 내가 언제 그랬냐? 하면서 원래 봉툿값을 받게 돼 있다 하는 이야기로 길게 이어지는 말에, 전에도 그래서 안사고 그냥 갔는데, 그러다 지난주엔 또 그냥 넣어주지 않았느냐? 하고 묻자 내가 그걸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냐면서 말투가 짜증 섞인 시비조로 바뀌는 것이다.

 

그럼 그러려니 하고 말면 되는데 내 말은, 하고 이어지던 말들이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였다. 청년은 순간 푸념을 하듯 가뜩이나 힘들어 죽겠는데, 코로나로 어떤데, 짜증나게 뭐가 어쩌고 하며 감정은 상할 대로 상했고, 나 역시 에코백을 들어 보이며 그만하자는 식으로 한 발 물러서려 하면서도 옥신각신 시비가 붙은 셈이다. 순간 이게 뭔가? 싶은 생각이 들면서 금방 묵상글을 쓰고 나와서, 나의 작태도 참 한심하다 싶어, 나는 손을 저으며 청년의 말을 좀 막으려고 했고 청년은 울고 싶은 아이 뺨 때린 격으로 이런저런 말이 줄줄이 이어져 나오고 서로 오갔다. 안 되겠다 싶어 나는 덥석, 청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내가 미안하다, 화 풀라 하면서 사과부터 했다. 밤새 일하고 고단할 텐데 내가 미안하게 됐다 하고, 나도 모르게 저의 손을 흔들며 기분 풀라며 미안하다고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그러자 청년의 눈에 눈물이 핑 돌면서 순간 위로 받고 싶은 어린아이처럼 이런저런 힘든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곧 딸애가 나오는데, 길어지는 코로나로 직장 문제도 그렇고…….

 

우리 안에는 누구나 ‘상한 감정’이 있다. 이를 나 역시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떼고 살 뿐이지 어떤 일로 불쑥, 감정이 일면 내남 없는 것이다. 거기서 시시비비를 가려 언성이 높아지고 본때를 보일 뻔했는데,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시 126:4).” 우리 영혼은 포로 된 자처럼 감정에 의해 끌려 다닌다. 나는 9층 어디에 있고 뭐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목사라는 사람이 이 모양이다! 하고, 순간 내 입에서도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청년은 자신이 두 손을 뻗어 다시 사과를 하고 변명처럼 오늘 자신이 처한 상황들을 말하게 된 것이다. 계산대에 물건들을 그대로 올려놓고, 마침 아무도 오지 않는 10여 분의 시간동안 ‘이게 뭔가?’ 싶은 장면이 연출된 셈이다. 언제 한 번 오라하고, 이제 사이좋게 지내자 하고, 나의 말은 두서없었고 주섬주섬 물건을 담아 계산하고 나오려는데 청년은 문가까지 따라오며 죄송하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는 늘 서로에게 죄송하다.

 

나의 하루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나와 화해해야 한다. 그렇게 순간 욱, 하고 올라오는 감정의 전부는 지난 것이다. 묵은 감정이 유통기한을 넘겨서도 여전히 우리 안을 지배한다. 비록 알바 청년과의 시비가 낯부끄러운 일로 여겨지지만, 나이 서른넷. 곧 딸아이가 생길. 아직 결혼도 못한. 취업이 어려운 시국이라 밤샘 편의점 알바를 하는…. 어제는 종일 저와의 일로 민망함과 감사함이 교차하였다. 그 순간에 성령께서는 나의 신분을 밝히게 하심으로 나의 부끄러움을 극대화하셨다. 이 일과 예수 재림의 신앙과 무슨 연관이 있어 이와 같은 연상을 이어가는 것일까?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

 

우리는 살며 등불 들고 신랑을 맞이하려 기다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은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 아니면 미혹하는 영이 마치 오늘이라는 이 시간의 감정에 우리를 포로로 붙들어 놓기 일쑤다.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안에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인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로 말미암아 만국이 미혹되었도다(계 18:23).” 별 것 아닌 듯, 대수롭지 않게, 그날그날 운을 따라 점을 치듯 혹시나 하고 기대하며 사는 시절이다. 만국이 미혹되었다. 난들 예외이겠나? 아내에게 그 말을 들려주었더니 대뜸 혀를 끌끌 차며 나의 나 된 점을 나무랐다. 보면 나도 성마른 성격인 것을 안다. 괜히 종주먹을 휘두르듯 별 것도 아닌 데서 발끈하기 일쑤다. 그래놓고는 늘 후회뿐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것까지도 선으로 바꾸셨다. 나는 덕분에 청년을 위로하게 되었고 청년에게 여러 번 사과하게 되면서 저의 고단한 손을 한 열 번은 잡아준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저에게나 나에게나 ‘그런 시간’이 필요하였다. 나는 부끄러움으로 주를 바라고 저는 나의 사과와 위로로 무엇을 바랐을까?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시절이다.

 

우리의 변화된 삶이란 야곱의 저는 다리처럼 알 수 없는 불편함과 부족함으로 남은 생을 다하는 일이다. 이로써 주의 살아계심을 알고 주가 언제 오실지, 우리의 잃어버린 재림 사상을 붙들어야 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의외로 우리 안에는 화가 많다. 그 노여움은 어제오늘의 것이 아니다. 기억 아래 쌓였던 것이 불쑥불쑥 우리를 지배하려 든다. 이때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11:32).” 이 구절을 좀 더 과격하게 읽으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죽여서라도 살리시는 사랑이시다. 내가 나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메아리처럼 맴도는 청년의 사연과 그 심정을 헤아려야 한다.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막 4:24).” 이는 오늘이라는 하루를 사는 날 동안 우리에게 두시는 편지다. 손에 들려주시는 연필이다. 주는 이미 우리의 남은 이야기를 다 쓰셨다. 그럼에도 나로 나의 이야기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나와 함께 나의 남은 이야기를 쓰시기를 기다리신다. 사사로운 것이란 없다. 운을 따지고 기운을 낸다 하고, 그와 같은 것에 자신을 맡겨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기운은 명사형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려 하는 분위기’를 일컫는다. 그저 사사로이 쓰는 말이나 행동에서 우리 삶을 지배하는 미신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왜 바울과 같은 엄청난 믿음의 사람이 날마다 자신을 쳐 복종시켰는지 알겠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

 

아침에 겪은 단편적인 일로 나의 하루는 기묘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여기저기 아파서 결국 주사를 맞고, 설교원고를 완성하고, 주보를 만들고, 청소기를 돌리고… 그렇게 나의 한 주간이 또한 무심히 지나가는가싶지만,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시 2:7).” 하시는 말씀과 같이 날마다 나는 새로운 나이다. 이상에 묻혀 그날이 그날인 것 같아도 우리의 영혼은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날마다 새로워져 가고 있다. 그때마다 나의 짐을 대신 지시는 주를 마주하며 사는 일이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68:19).” 이에 오늘 시편의 찬송과 같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이는 보증이고 문서화된 확실한 약속의 말씀이다(126:5-6). 할 때에 우리에게 있어 재림 신앙, 언제든 주가 오실 것이라는 소망은 우리로 세상에 빠지지 않게 한다. 다시 말해서 세상과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 이 땅의 모든 소망이 안개와 같은 것을 깨달을 뿐이다. 또한 살면서 사는 일에 낙심하지 않게 한다. 여기저기 늘 아픈 사람으로 살면서 나는 종종 실의에 빠진다. 의기소침하여 주를 바라는 마음도 시들하다. 어제는 두 달 치 고혈압 약과 이런저런 약을 좀 받아왔더니, 있던 것들도 쌓여 정리가 안 됐다. 약사 친구에게 여러 장의 약들 사진을 찍고, 언제 어떨 때 먹어야 하는지 정리하는 일도 한 세월이었다. 하루 날 잡아, 네가 좀 와서 정리 좀 해라. 하고 전화를 끊고는 이놈의 일시적인 약을 먹는 일에서도 이리 신중한데 하물며 우리는 우리의 상한 영혼을 위해 무슨 약을 어찌 쓰고 있는지… 잠시 생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재림 신앙 곧 주가 오신다는, 곧 내가 주께 가야 한다는 신앙은 우리들로 하여금 선을 도모하게 한다. 말씀은 일러,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우리의 인류 역사도 인정하든 안 하든 선한 그리스도인들의 주축으로 오늘에까지 유용하였다. 나의 삶은 드러나야 하고 나의 기도도 드러나야 한다. 나는 못한다 해도,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어제 아침, 내 입을 막으시고 내 손을 뻗어 청년의 손을 먼저 잡게 하신 것도, 저의 이런저런 말을 듣고 아들딸 같은 마음에서 저를 위로하게 하신 것도, 그리하여 저의 글썽이던 눈물이 어떤 결실을 맺게 하실지 나는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날마다 우리는 내가 사는 게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의 일이란 날마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게 늘 내 맘 같지 않아 하루에도 열두 번씩 쩔쩔매며 또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지만,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히 9:18, 20-21).” 그러므로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26).” 주의 재림 신앙은 날마다 나의 삶을 지탱하는 그야말로 '기운'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묵상글을 쓰는 나로만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주 앞에 서는 그날까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