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 11:1-2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 128:1
오후께 뜬금없이 사진 한 장이 카톡으로 보내졌다. 대학 때 친구 몇이 목포에 있는 누구를 찾아뵈러 모인 모양이었다. 놀라운 것은 얼굴이 기억나면서 하나하나 그 이름이 떠올랐다. 그리움이란 기억과 함께 고스란히 저장된 감정이다. 우리의 느낌, 감정은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한다. 사람의 모양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창 1:26).” 이에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의 모양으로 상상할 수 있다. 친구들의 모습에는 예전의 앳된 모습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나이들 들어 그 위에 드리운 중년의 모습이 더해져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르리게’ 하셨다.
곧 이는 주어진 삶의 명령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28).” 우리는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 그런데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이 부분이 많이 상실되고 훼손되긴 하였어도 ‘믿음으로’ 거듭난 우리에게는 다시금 이와 같은 형상, 능력이 소생하게 된다. 이를 계발하고 확장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땅, 삶의 그 모든 영역에서 주를 바라며 온전히 주를 섬기는 충만함이 복원돼야 한다.
이어 우리가 장차 ‘믿음으로’ 가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는 저주가 없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계 22:3).” 곧 나는 친구들의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며 내가 아는 저들 나름의 사연과 그 험난하였던 생의 질곡을 생각하였다. 어떤 저주, 우리 안의 남모를 노여움이 있어 이를 극복하거나 타협하면서 살아간다. 이에 시편 58편을 묵상하면서 저주의 시-기도가 주께 드려질 때 탄원이 되는 것에 대하여 알았다. 그리하여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나는 요즘 이 말씀을 잘 되뇌어 묵상한다. 참으로 역동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안의 노여움, 어떤 서러움과 남들에게 말 못할 여러 슬픔과 어려움이 죄로 인한 이 땅의 결실이었다면 이를 경작하고 지켜 다스려야 하는 일이 우리의 책무다. 온유한 자는 그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곧 우리가 확장해가는 하나님의 나라다.
그 나라는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의 모형을 그대로 가졌으면서도 전혀 새로운 나라다.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계 21:5).” 마치 천국을 관념으로 또는 어떤 영적인 세계로 풀이해서 요정들의 나라로 상상하는 경향이 있는데, 천국은 오늘의 현실과 같이 실제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 65:25).” 그 땅은 더 이상 경작하지 않아도 되고 지켜 다스리지 않아도 되고 정복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생에 사는 날 동안 우리는 ‘그 나라’를 정복하고 침노해야 한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곧 오늘 우리가 확장해 가는 하나님의 나라다. 그런데 되레 침노를 당하고 있으니, 사는 게 점점 팍팍하여지고 그 영혼은 황폐해져 가는 것이다.
사진을 찍어 보낸 친구는 주의 일에 뜻을 두고 필리핀으로 선교를 갔던 이다. 나름 비즈니스선교라 하겠는데, 실은 졸업 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서 가끔씩 이렇게 전화로나 통화를 하는 게 다여서 나는 뭐라 추측할 수 없다. 다만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찬송과 경배가 끊이지 않는 나라가 천국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 이것이 우리가 누릴 나라이며 취할 충만함이다. 곧 내 안에 얼마나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가득하여 더는 바랄 게 없을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이를 위한 우리의 자세는 ‘가난’이었다.
여기서 가난은 실제의 가난이면서 철학적 의미의 가난도 포함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철학적인 가난이라 하면 그 마음이 하나님으로 가득한 것으로 늘 비어져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만 족한 가난이다. 하지만 또 이 가난은 실제의 가난, 돈이 없고, 건강이 안 좋고, 늘 여러 결핍과 허기로 허덕이는 궁핍의 날들로의 가난이다. 아무에게 말할 수 없는 수치와 낭패의 감정이 있고, 억울함과 원통함이 있는 ‘애통하는 가난’이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눅 6:20).” 왜 우리 주님은 이를 콕, 집어서 ‘너희 가난’으로 설명하신 것일까?
사진 속의 친구들에 대하여 나는 ‘어떤 그리움’이 있다. 그저 단순히 예날 일을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시절의 향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나는 저들이 안고 있는 사연을 두고 주께 바라고 구하는 게 있다. 누구는 잠재적인 그리스도인이다. 뜬금없이 한 친구가 페이스톡을 하자 해서 얼떨결에 잠시나마 얼굴과 목소리를 들었다. 한 친구는 대뜸 ‘노인이 다 됐네?’ 하고 나를 보며 허허, 웃었다. 나는 그 말이 싫지 않았다. 본래 노인이 되는 것에 대한 남다른 환상이 있다. 아무리 어쩌지 해도 노인에게는 관조적인 눈이 있다. 살아온 ‘세월의 시선’이다. 어릴 때 할머니의 눈길에서 나는 터무니없이 이를 부러워하곤 했다. 물끄러미 무얼 보고 있는데, 어린나이에 나는 할머니가 건너다보는 세계가 무엇인가 궁금해 하며 ‘할머니 뭐 봐?’ 하면서 그 시선을 좇으려 애간장을 녹이곤 하였다.
믿는 자로서의 그리움은 시선 너머에 있다. 우리는 모두 가난한 자로 왔다 가난한 자로 가야 한다. 사람이 오고 가는 일에는 차별이 없다. 주님이 말씀하신 가난의 의미를 그리 받고 묵상해본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천국이 저의 것이다. 그렇다면 이내 가난한 자로 왔으나 가난한 자로 갈 수 없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바라고 구한 것, 얻고 취한 것을 놓지 못하고 가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억울해서 눈을 감을 수 없다’는 말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은 아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믿음 장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믿음의 선진들에 대해 열거되어 있다. 저들은 믿음으로 살았다. 실상은 없으나 바랐고, 보이지는 않으나 증거로 삼았다. 믿음이 주는 엄청난 권능이다. 이로써 주를 경외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시 128:1).”
나는 이처럼 말씀과 말씀을 연관 지을 때 알 수 없는 기쁨을 느낀다. 마치 ‘할머니 뭐 봐?’ 하고 아무리 물어도 저이는 끝내 자신이 보는 것을 설명해주지 못했으나,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가? 이에 답해야 한다. 그래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해 우리의 감정과 느낌을 하나님의 것과 다르지 않게 주셨다. 때론 내 안의 분노, 두려움, 질투, 절망, 경멸과 수치심 등으로 낭패를 겪지만 그 너머에 시선을 두면 ‘그 나라’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였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이생을 사는 동안 여러 묵은 감정이 나를 해하려 하나 하나님은 이를 선으로 바꾸어 하나님의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신다. 이는 믿음으로 사는 자의 사명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나타난 결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아직 우리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지 않았다. 이생에서는 우리 안에 두셨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이를 어찌 확장하고 발굴하여 살아갈 수 있을까? 이를 위하여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이것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믿음으로다.’ 오늘 히브리서 11장에 거론되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39-40).” 이 길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다.
믿음을 증거로 갖았으나 약속하심을 이 땅에서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음을 ‘믿음으로’ 알고, 우리로 ‘온전히 이루려 하심’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는 아직 온전할 수 없는 것이나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반드시 우리는 그 앞에 설 것이다. 지금은 희미하고 간헐적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는 일이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이 얼마나 가슴 벅차고 성마른 일인가? 때론 조급하고 때론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들썩이지만….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아벨도 에녹도 노아도 모세도 다윗도, 칼빈도 어거스틴도 윌리엄 쿠퍼도 조나단 에즈워드도 로이드 존스도 챔버스도, 손양원도 옥한흠도 그리고 나의 아버지와 형제들도 이 길을 걸어갔고,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처럼 내가 아는 나의 친구들도 우리 함께 걸어가야 하는 길, ‘믿음으로’ 서로가 통일되고 함께 지어져 가는 나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0).” 이는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19).” 너희, 곧 오늘의 우리는 누구인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4-6).”
아, 이 놀라운 은혜의 말씀 앞에 나는 숨 가쁘다. 가슴이 벅차다. 나야말로 하등에 쓸모없는 자인데 그런 나에게 주가 더하신 은혜의 넘치는 기쁨이 ‘믿음으로’ 누구를 위하고 생각하고 주께 아뢰게 하는 일이었으니….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되었다면 나의 이 타락한 감정, 양가감정으로 그 내면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욱 확신하게 하시는 일이었으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나는 이와 같은 역설을 사랑한다. 내가 얼마나 끔찍한 죄인인가를 알게 하는 것은,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곧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믿음으로 살아갔던 사람들을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나의 나 됨은 터무니없는 죄악들 뿐인데,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20, 21).” 내 속의 양가감정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욱 맛보아 안다? 그러니 죄에 머무는 것도 유익하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1-2).” 어느 날 나는 죽었고, 나는 살았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이처럼 내가 나의 시선 너머 저 관조의 나라가 아닌 실제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것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희한하지? 하다못해 우리 몸도 스스로를 일깨운다. 가령 요즘은 알람은 4시 반인데 눈을 뜨기는 자꾸 3시 반이다. 하다못해 이 몸도 주를 바라고 말씀 앞에 나로 앉히려는 것일 텐데 하물며 믿음으로야!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7).” 이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시 128:1, 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