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히 13:17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시 130:4
주를 바람으로,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5).” 하고 이어지는 오늘 시편의 말씀에서 한참을 머문다. 시편은 ‘우리 영혼의 해부도’라 한 칼빈은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이 거울에 비추는 것처럼 어느 것 하나도 드러나지 않는 게 없다’고 했다. ‘감정은 우리 영혼의 목소리’다. 댄 알렌더의 말에 나는 동감한다. 욱, 하고 치미는 어떤 감정은 울부짖는 마음의 함성 같다. 평온할 때야 누가 알겠나? 그럭저럭 자신을 무마하고 감정을 다독이며 그런가보다, 하고 살아갈 때는 모른다. 이내 나락을 떨어지는 것 같은 절망감에 또는 가슴이 터지고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노여움에 처했을 때, 그동안 방치고 있던 우리의 감정의 역습이 시작된다. 이에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고 기다린다는 것, 오늘도 시편은 이를 먼저 화두로 던지는 듯하다.
어제는 문득 ‘이게 다인가? 더는 뭐가 없나?’ 하는 어떤 회의가 또는 갈망이 순간적으로 마음을 흔들다 갔다. 무슨 기억 같기도 하고 누구에 대한 그리움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더는 돌아갈 수도 되돌릴 수도 없는… 마치 예전 사진을 보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먹먹해오고 순간 어떤 아쉬움이 또는 노여움이 아련하게 일어나고는 하는 것이다. ‘이 길이 맞나?’ 반복되는 일상은 문득 묻고는 한다. 노아는 어찌 그 긴 시간을 방주를 지으며 외따로운 시간을 참고 견딜 수 있었을까? 아브라함은 무슨 수로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하란을 떠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을까? 그래서 노아는 헛헛함을 이기지 못하고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겨진 채 잠이 들었던 것일까? 그래서 아브라함은 두 번씩이나, 한 번은 데려다 키운 종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로 한 번은 몸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로 약속의 씨를 대신하려 했던 것일까?
이러저러한 감정을 하나님과 씨름하듯 내어놓고 다투지 않으면 즉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면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 다른 우상을 숭배하게 된다. 돈을 사랑함이 그 단적인 예이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나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겠다는 말씀이 실질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우리 안의 감정이다. 싫고, 좋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원하고 멀리하고, 슬퍼하고 기뻐하는 우리의 감정 그 자체는 나쁘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내 안에 이는 감정으로 우리는 주를 바라야 한다. 오늘 말씀을 그리 읽어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15).”
내 입술의 열매 찬송은 범사에 주를 인정하는 것이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찬송이란 자나 깨나 떠오르는 생각이고 입만 열면 나오는 말이다. 그 사람의 관심이 곧 말이 되어 나오고, 어디 있든 몸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그와 같이 누구는 주식에, 골프에, 어디 아파트 청약에 온 맘과 온 몸으로 가 있는 것이 ‘찬송’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드리자’는 오늘 본문의 언질은 불가능한 게 아니다. 표어 같은 말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감정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감정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어떤 감정으로 규정하기 전부터 우리는 알았다.
그와 같은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마음의 언어’를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의 언어란 상처의 언어이고 회복의 언어이다. 무엇으로 상처를 받은 마음이 무엇으로 위로를 받기도 한다. 그때의 언어들이 가감 없이 표출되고 드러나는 성경이 시편이다. 시편의 언어는 마음의 언어다. 함축된 시어라지만 녹여보면 우리 마음의 색깔과 다르지가 않다. 이를 인정하는 데 있어, 감정에 끌려 다니지 말아야 한다.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의 일’을 인정하되 호락호락하게 허용해서도 안 된다. 이쯤 살다보니 마음보다 간가한 것도 없다. 그러니 시인은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2).” 그만큼 어려운 게 마음의 일이다. 모든 게 다 그렇다지만 내 자신도 어디 내 맘 같아야 말이지!
감정은 물론 어려운 상대이지만 모든 게 다 내 안의 일이다. 우리 안에 그 일을 두심은 주가 이루시고자 하는 일의 신호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목사 고시 때 나이 지긋하신 어느 목사님이 먼저 기도로 문을 열며 하신 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인생이란 마치 그와 같아서 빛바랜 사진을 보다보면 더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우리 감정을 흔들고는 한다. 감정은 분명 어려운 상대지만 정직함으로 마주대해야 한다. 시편은 이를 증명한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정직의 언어다. 왕으로서 체면이 있지, 어찌 이런 말을 다 고할까? 싶을 정도로, 독자로서 때론 민망할 정도이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시 39:4).”
기꺼이 하나님과 입씨름도 마다하지 않는다.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89:46).”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통스러운 감정을 이겨내기 위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외면만 확인하고 돌아올 때도 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90:13).” 이 지긋지긋한 ‘언제까지’의 언어가 시편이다. 그렇게 우리의 감정은 하나님과 치열하게 대치한다. 솔직히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실 때는 우리의 행복했던 기억에서보다 슬프고, 외롭고, 고통스러울 때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외면이 아닌 사람의 속성으로 인한 것이다. 내가 그리 생겨먹었다. 좋고 편할 땐 무시하고 안일하다가 어려움에 당면하면 비로소 주를 바란다.
시편은 그런 우리에게 자신의 감정을 무시하지 마라. 고민하라. 생각하고 맞서라.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아뢰고, 다 말하라. 그리 외치는 것 같다(시 77:1-3).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목사가 되고 싫든 좋든 누구의 사연을 듣게 된다. 위해서 기도해달라는 소리를 듣는다. 물론 나는 이를 잊지 않으려 메모지에도 쓰고 저를 두고 기도한다. 한데 ‘내가 내 음성으로’ 곧 나의 감정 그대로 주를 대면하고 직고하기를 원하신다. 부르짖을 때 귀를 기울이신다. 나의 환난 날, 그 어두운 밤에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않는다. ‘빈 손 들고 나아가 십자가를 붙드네.’ 다른 어떤 고운 말로 위로 받기를 거절한다. 누구의 위로와 저의 곁이 함정일 수 있다. 멀게만 느껴지는 하나님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남편을 더 의지하고, 언제 들어줄지 모르는 소원보다 내 옆에서 자라가는 자식으로 위로를 받는다. 이로써 족한 줄 알 때,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3).” 아,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감정인가!
사랑하는 가족과 같이 있으면서도 공허함은 달랠 길 없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돈이 되지 않으면 낙심이 오고, 오랜 친구와 만나면서도 서로 다른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우리의 감정은 오랜 시간동안 응축된,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퇴적암 같고 화성암 같고 변성암 같다. 온갖 파편이나 생물의 유해가 서로 뭉개지고 으깨어져 단단하게 하나의 결정체가 된 것처럼 자신의 감정은 누구도 남이 짐작할 수 없다. 심리학은 통계에 의한 것이고 의학은 오늘까지의 경험치다.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있었던, 어떤 기질과 형상의 형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 하나님은 그 땅의 흙으로 우리를 지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
그러므로 우리 안의 불안과 두려움은 하나님께 요구해야 할 게 있다는 신호이다. 기도한다는 것이 단순하게 필요를 구하는 쇼핑몰 같이 여겨지지만 그 이상의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상대적으로 내가 느끼는 감정이란 것들이 얼마나 희귀하고 놀라운 주의 사랑을 응축하고 있는지, 그 안에 형용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주의 형상이 감추어져 있는지, 그래서 칼빈은 시편을 우리 영혼의 해부도라고 한 게 아닐까? 우리의 뇌만 해도 어마무지하게 신비하다. 심장과 폐와 신체기관 중 가장 복잡한 것으로 다른 장기와 달리 대체가 불가능하다. 뇌는 130억 개 이상의 신경세포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또 각기 5천개 이상의 다른 신경들과 연결되어 있고, 어떤 것은 5만 개의 신경세포와 연결되었다. 이는 은하계의 숫자보다 많다. 가령 통증을 느끼는 뇌의 감각만 4백만 개라 하는데, 만지고, 누르고, 주무르며 느끼는 세포가 50만 개, 온도를 감지하는 세포가 20만 개, 여기에 눈과 코와 혀로 느끼는 감각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뇌의 무게는 고작 1.4킬로그램이다.
그러니 말씀에 토를 달 수 없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그와 같이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였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5:20).” 긴 한숨과 함께 나의 오묘함에 대하여 나는 주체할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한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6).” 우리가 주를 바람은 그처럼 호락호락하니 오늘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을 구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우리 영혼은 스스로의 감정에 갇혔다. 그것으로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믿는다는 일, 주를 바라고 사랑한다는 일이 얼마나 가식적이고 가련하였던가를,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 13:3).”
말씀 앞에 가만히 나를 놓아두고 있으면, 모든 게 은혜라.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게 없다. 그런데도 그때마다 우리의 감정은 또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는 하는 것이니,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시 130:1).” 별 수 없다. 감정의 골 깊은 곳에까지 내려가야 한다. 다 잊은 줄 알고 살았던 나의 열등감이나 수치심과 마주해야 한다. 번번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격지심과 고질적인 우울감과 맞서야 한다. 그때의 유일한 출구는 ‘주께 부르짖음으로다.’ 남편이나 아내로 위로 삼고, 적당히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듯 굴러가는 오늘 한 날의 무사함으로 무마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내 우리의 감정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흔든다. 두려움이 역습하고 불안이 포위한다. 옴짝달싹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러서야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2).” 아, 우리의 이 이율배반적인 자기합리화여!
이에 오늘 말씀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그뿐인가?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9).” 실은 우리 주변에 너무 좋은, 많은 위로가 널렸다. 그야말로 돈만 있으면 없던 교양도 저절로 생겨난다. 우아하고 고상한 게 별 건가? 그럭저럭 저들의 교훈에 편승하고 고급지게 자신을 떠받들고 우대하면서도 사는 게 복이지. 그러나 이 모두는 허사였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12).” 그러하다면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13).” 그저 고상을 떨며 괜찮은 척, 무마하고 사는 게 신앙이 아니다.
그렇게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17).” 사느라 애써 사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20-21).” 그러하기를, 그러하실 것을, 그러하심을 믿어 의심하지 않으며….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시 130:1).”
우리의 가장 귀한 것은 감정 이면에 박혀 있는 것으로, 이미 창세전에 모든 것은 예정되고 택정하심을 받은 것이었으니.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이를 지금은 우리가 어렴풋이밖에 알 수 없다고는 하나 그러므로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4, 5).” 무엇이 최선인지는 안다. 이와 같은 간절함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