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약 3:8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 133:1
말에 은사는 귀하다. 욱, 하고 치밀어 올라오는 말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주의 권능으로밖에 달리 길이 없다. 말은 감정의 문이다. 열린 문으로 들고 나는 말의 정체는 뱃속 깊은 곳의 것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시길,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 그만큼 말이 무서운 것은 그러려고 그런 말보다 얼떨결에 그리 툭, 튀어나오는 말의 정체 때문이다. 더욱이 누구 앞에서 말로 가르치는 일이란 해놓고 돌아서면 그만이겠으나 듣는 이의 마음에 박혀 저를 오염시키기도 정화시키기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여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특히 오늘 말씀은 살면 살수록, 주를 사랑하면 할수록 어려움을 느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래서도 강제해야 한다.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3).”
어제도 누구 일로 생각이 많았다. 저는 일류대학을 수석으로 입학을 한 수재였다. 그런데 학업을 다하지 못하고 정신과를 들락거렸고 두문불출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들어보니 어릴 때부터 ‘특이한 증상’을 보이곤 했는데 주로 혼잣말처럼 엉뚱한 소릴 하곤 했다. 아이의 전혀 다른 이야기에 의아해들 하면서도 이를 천재로 돌려 이해하기도 하고, 그 부모는 일찍부터 쉬쉬, 하며 아이에게 약을 복용하게 하였다. 하여튼 아이의 상태가 다시 악화되어 정신과에 입원을 하였다. 몇 개월 그리 입원하고 나오면 호전되었다가 다시 또 재발하기를 반복한다고 했다. 들어보니 속단할 수는 없으나 그 부친의 윽박지른 말들과 모친의 걱정스런 쟁쟁거림이 문제였다.
왜 그러는가? 하고 묻는데 나는 먼저 서로의 관계 분리와 감정 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그러는 듯하였다. 이는 분화의 문제다. 분화란 각각의 감정은 그 자체로 독특한 특징을 갖는다. 필요없는 감정이란 없다. 미움도 시기도 질투도 그 자체로는 모두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은 악을 미워하신다. “악한 꾀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잠 15:26).” 곧 우리의 감정 자체로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11:1).” 우리 안에 슬픔이라는 감정이 있음으로 애도하고 애통해한다. 분노가 있어야 악을 멀리한다. 두려움은 분노의 배면으로 위험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신 4:24).” 모든 개개의 감정은 하나님의 성품을 짐작하고 알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들이 엉겨 변이를 일으키는 것이다. 죄란 하나님 외의 것으로 혼용되는 감정으로 나타난다. 실제 감정이란 다른 사람이 어떻게 대하느냐에 대한 내 안의 본능적인 반응이다. 이를 배워서 아는 게 아니다. 폭언과 무력적인 부친의 성향으로 아이는 주눅 들고 자신을 위장하여 공격에 따른 방어기제를 동원하게 된 것이다. 그와 상반되게 모친의 지극정성이 아이를 돌본 게 아니라 더욱 위축되게 하고 의존적인 성향을 기른 것이다. 지금도 아이엄마는 저를 죽을 때까지 자신이 책임지면 된다고 눈물짓고, 부친은 그런 꼴이 마뜩찮아서 결국은 서로 갈라서기 직전까지 이른 모양이다. 이게 다 서로의 탓이라고 공격하는 것인데 다들 위협적인 부친을 욕하지만 내가 보기엔 모친의 무한반복적인 무분리관계가 더 큰 문제인 것 같았다.
그렇게 또 묻기를 우울이 불안과 공황으로 이어지냐, 공황이 커지면 조현으로 확대되냐고 묻는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말이 조현이지 일단은 정신분열이라 하여 그야말로 또 다른 세계를 가지고 사는 셈이다. 이는 어느 일정부분 약물로 다스릴 수 있다. 오히려 공황이나 불안보다 훨씬 그 효과는 뚜렷하게 좋다. 한데 문제는 이 모든 감정의 문제들은 하나의 감정 때문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감정이 뒤엉겨서 생겨난 결과다. 가령 이 모든 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서 비롯되는데 단순하게 생각하면 세 가지 방법으로 대처한다. 하나는 같이 맞서는 것이다. 이는 공격적이다. 분노를 표출한다. 차라리 그게 낫다. 한데 이를 억누르고 숨김으로 두려움에 빠진다. 다른 하나는 서로를 멀리하는 것이다. 외면이다. 그럴 때 드는 감정의 구실은 시기와 질투다. 이는 공격적인 성향으로 드러나는 감정인데 상대적으로는 절망이다. 억눌리면 절망에 빠지는 것이다. 마지막 하나는 다가가거나 다가오는 것이다. 이는 사랑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인데, 부정적인 요소는 경멸이고 상대적인 감정은 수치다. 잘못 받아들여지는 감정은 경멸이고,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랑은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이다(댄 알렌더, <감정, 영혼의 외침> 참고).
누구 덕분이기도 하고 요즘 다시 감정의 문제에 관한 도서들을 찾아보게 되는 까닭은 시편 때문이다. 시편을 설교원고로 60여 편 이상을 넘기면서부터 의아한 것이다. 이게 좀 너무한 것 아닌가 싶은, 아무리 그래도 성경에서 어찌 하나님께 항변하고 화내고 그 이유를 주께 돌리고 심지어 조롱하듯 하나님을 향해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아뢰고 고할 수 있을까? 하는 놀라움에서였다. 비열하고 옹졸하신 하나님으로 몰아세우기까지 하면서,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 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시편 44편 11-12절을 보면 하나님은 마치 시정잡배나 자기 이익만 챙기려다 손해를 보는 장사치로 묘사되었다. 주께서 우리를 악에게 넘기셨다! 여러 민족으로 흩으셨고, 헐값에 자기 백성을 팔아버리셨다. 그 판 값의 이익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기고서 말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하나님 탓을 하는 것이다. 이어서 88편 8-11절을 보면 고통을 주는 이는 하나님이시고, 그런 가운데서 돕지도 않는 하나님을 조롱하듯 서술하고 있다.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셀라)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그렇게 유령이 일어나 찬송할까? 죽어서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하시겠는가? 하면서 하나님께 대들고 떼쓰고 표독을 부리듯 막말에 가까운 말로 진술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계적이고 맹목적인 존재로 끌려가는 비인격적인 관계를 원하시는 게 아니었다. 우선은 하나님에 대한 존재를 앎으로 이와 같은 변론도 가능하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막연하게 너무 먼 신적인 존재로만 인식한다면 어려운 일이다. 굳이 그렇다면 그리 애쓰며 살 필요가 뭐 있겠나? 그야말로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 세상이라면!
시편의 역동적인 언어는 표면적인 구술 이면에 놀라운 신뢰와 신의를 바탕으로 한다. 놀랍게도 시편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예배에서 찬송으로 불리고 읊어지는 언어이다. 곧 우리가 입을 조심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제어해야 한다는 오늘 아침의 말씀은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에 서로의 문제다. 기껏 잘 다루다가도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 3:8).” 그러니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 말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돕고 감싸주며 산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말에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가? 이때의 감정은 언제나 말보다 앞서고 치명적이라, 시편은 이를 주께 토하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의 어떤 악함보다 깊고 넓고 높으시다. 사람에게 표출하지 말고 그 감정 그대로 하나님께 가지고 나올 때 우리 안의 저주가 탄원이 되고, 억울한 심정은 감사의 기도로 올려지는 것이다. 이를 야고보는 그러므로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약 3:17-18).” 곧 우리가 주께 토설할 때 첫째는 성결하여진다. 화평과 관용과 양순과 긍휼과 선한 열매로 가득하게 된다. 편견과 거짓이 사라지고 화평하게 하는 자로 열매를 거두는 일이다. 그러므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우리가 어떠하든지 주의 사랑은 더 넓고 길고 높고 깊으시다.
이에 늘 우리의 근본적인 질문은 산다는 게 뭐냐는 것이다. 왜 사나? 무엇을 위해 사나? 이러한 문제는 결국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로 확장된다. 그럴 때면 감정이 늘 걸림돌이 되지만 실제 그 감정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성품을 이해하는 데 더없이 소중한 단초가 된다. 감정은 그냥 이는 게 아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동요가 일지는 않는다. 이때의 우리의 공격적인 성향은 실제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평하심을 알게 한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공격할 때 저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과 같다. 악의적 공격성은 앙갚음을 전제로 한다.
상대적으로 드는 두려움은 분노의 또 다른 표현으로 악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힘을 발휘하게 하지만 공포와 불안을 동원하여 죄에 둔감해지게 하고 소극적이게도 한다. 그래서 두려움은 이내 타협하고 스스로 안주하려 든다. 이때의 부정적인 행동이 외면이다. 친밀감을 상실했을 때 온다. 소중한 존재에서 일시 소외당할 때 외로움이 오고, 외로움의 극단적인 선택이 외면이다. 외면은 희망을 앗아가고 절망을 일으킨다. 스스로를 저주하는 데 이른다. 그와 같이 질투가 내재한다. 남의 것을 갖고 싶은 욕구에서, 부러움은 실제 상실감에서 오는 스스로의 몸부림이다. 그렇게 치닫다가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약 4:2).” 죄의 굴레는 눈에 띄지 않게 굴러간다. 부모의 성향은 고스란히 자식에게로 굴러간다.
그때에 절망을 직면한다. 외로움에서 도피하는 게 절망이다. 더는 외로움으로 괴로워하기 싫은 것이다. 절망은 내면의 갈등 자체를 거부한다. 나아질 소망을 짓밟는다. 소망을 상실한 믿음은 사랑을 파괴적으로 휘두른다. 감히 말하지만 앞서 누구의 일을 두고 다들 저의 부친의 잘못을 지족하는데 나는 모친의 측은지심이 더 큰 문제라고 여겨졌다. 아이가 나아지려면 우선 저 둘과 떨어뜨려야 한다. 물리적으로 아이가 정신과 입원을 하면 상당히 호전되는 이유도 단순하게는 그 부모와 떨어져 있어서이다. 그러나 서로 남 탓을 하며 각자가 자식을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꼴이 같이 죽겠다는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 원인은 자신들인 걸 자신들만 모른다. 여기서 가장 무서운 게 사랑이다. 사랑은 친밀감의 욕구다. 친밀감을 소유욕으로 채우려 하고, 독차지 하지 못한 사랑은 경멸과 수치로 치환하여 침체와 좌절을 반복한다.
조금 우스운 예이지만 다른 사람과 친해지려 하는 마음이 드러나면 수치심으로 전환한다. 이를 상대가 받아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거절당할 때는 경멸이 저주로 바뀐다. 부모 자식 간에 가장 흔히 나타나는 공격적인 감정의 특징이다. 보고 싶은데 같이 있으면 화가 나고, 걱정되고 안 됐는데 마주하면 지긋지긋하니 치를 떤다. 사람과 사람 사이로는 이를 풀 수 없다. 무마시킬 수는 있다. 서로 묵인하고 외면하면 그만이다. 가장 쉬운 것은 회피다.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둠으로 자신은 괜찮은 척 거리를 둔다. 그것이 우리 속에서는 악의적인 감정으로 서로 뒤섞여 정체불명의 화가 또는 눈물이 흐른다. 결국 우리가 이처럼 상하고 씨름하는 대상은 하나님인 것을 시편은 말해주는 것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저는 죄를 짓고 그 문제를 사람과 풀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과 먼저 풀려고 하였다(시 51:4). 성욕에 이끌려 밧세바를 범함으로 일파만파 그녀가 임신을 하면서 일이 꼬였다. 다윗은 그 문제를 풀려고 얼마나 더 큰 악의 구렁으로 떨어졌던가? 이를 은폐하려 충직한 군인으로 전장에 나가 있는 밧세바의 신랑 우리아를 불러들여 서로 동침하게 하려 했고, 여의치 않자 적진으로 몰아 저를 죽이게 하는 끔찍한 살인을 교사하기도 하였다. 그 일 뒤에 모든 게 무마된 것으로 여겨 밧세바를 정식으로 자신의 아내로 삼았으니… 우리 스스로의 문제 해결이란 더 큰 악으로, 악으로 끌려들어가는 신세가 되는 것뿐이다. 이에 저는 깨달았다. 결국 이 모든 죄를 짓고 씨름하는 대상이 실은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하여,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결국은 하나님과의 회복이 모든 문제의 해결점이라는 사실을 알고 주께 아뢰는 것이다(7-12). 결국 우리의 문제는 처음에는 다 선의로 시작한 것인데 이것이 거절당하거나 노출되었을 때 수치와 경멸과 분함이 일어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것이다. 오늘 야고보 사도의 진술이 그야말로 일품이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약 3:4-6)
이를 상기시키려 오늘 시편은 주께서 우리에게 더하신 본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시 133편 전문), 아멘.